가만히 곁을 내어주는 온순한 동물처럼
처음 만져보는 식물이었다. 보들보들, 복슬복슬. 이런 표현을 떠오르게 하는 사물을 보면 나는 겨를 없이 이끌려 손을 뻗게 된다. 램스이어와의 첫만남도 그랬다. 은백색의 털로 뒤덮인 이 식물은, 선명한 초록을 뽐내는 다른 식물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램스이어를 쓰다듬었다. 램스이어는 가만히 곁을 내어주는 온순한 동물처럼 그렇게 한동안 내 손길을 받아냈다.
램스이어의 보드라운 은빛은 정원 구석을 우아하게 밝힌다. 램스이어는 한국의 혹독한 겨울을 견딜 수 있는 다년생 식물이다. 더위와 과습, 그러니까 한국의 여름 장마같은 기후 때만 조금 신경쓰면 웬만한 곳에서도 잘 살 수 있다. 램스이어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은빛 털이 동물의 털과 같은 기능을 하는 건 아니겠지만, 추위를 잘 견디고 더위에 약한 특징은 털 달린 짐승의 그것과도 닮았다고 느낀다. 여름을 잘 보내고 나면 다음 해에는 배로 불어난 램스이어를 만날 수 있다. 씨앗과 간단한 포기나누기로 번식이 가능하고, 땅에 닿은 줄기에서도 뿌리를 내리리는 등 번식에 까탈스럽지 않은 식물이기 때문이다. 독특한 질감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외형에, 한국 기후에 잘 맞는 성질이 더해져서 정원 조성에 무던하게 제 역할을 잘 해낸다.
바람이 서서히 습기를 머금고 살갗에 닿는 햇빛이 따갑다고 느껴지는 늦봄과 여름 사이쯤, 램스이어는 꽃대를 올린다. 자연에서 직선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들 하지만, 램스이어의 꽃대는 ‘꿀풀과’의 특징을 따라 네모나게 각져 있다. 잎을 가만히 쓰다듬던 손으로 길게 뻗은 꽃대의 도드라지는 각을 따라 네 개의 면을 훑어 만진다. 이 털복숭이 식물에게는 둥근 선만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올곧음이 있다. 하늘로 향한 꽃대 끝에는 꽃을 피울 준비 중인 꽃봉오리가 다글다글 모여 있다. 아기 손톱처럼 작고 습자지처럼 얇지만 짙은 보라색을 가진 꽃이 차례대로 피고 진다. 긴 꽃대의 길이감을 살려 전정가위로 잘랐다. 스무 송이씩 묶어 직사광선이 들지 않는 곳에 거꾸로 매달아 놨다. 이제 푹푹 찌는 여름을 지나는 동안 은빛 발광하던 램스이어는 잠시 세가 죽을 것이다. 올곧게 꽃피운 이 찰나의 순간을 채집해 잘 말려둔다.
내게 10월은 두꺼운 이불을 꺼내는 달이다. 해가 잘 들지 않는 시골집은 겨울이 채 오지도 않았건만, 뭐가 그리 급한지 서둘러 차갑게 식는다. 서운할 지경이다. 긴팔, 긴바지, 외투를 세탁하고 여름용 얇은 이불은 정리해 장롱 깊숙히 넣었다. 여섯 시면 해가 지고, 밤에는 코끝이 차가워지는 서늘함이 감돈다. 10월 어느 날, 산책 길의 개구리 소리가 사라진 걸 깨달았다. 고요한 산책 길이 낯설었다.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 나는 여름내리 줄곧 그분들이 내는 소리에 둘러 쌓여 있었구나. 곧 성큼 다가올 적막한 하얀 계절에 나는 무엇에 기대어 살게 될까? 타박타박, 내 발소리와 개들의 발톱이 아스팔트 바닥에 닿으며 나는 탁탁, 가벼운 마찰음만 울리는 산책길 위에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나의 개들이 이불 속을 파고는 계절이 됐다. 얇고 긴 털이 촘촘하게 나서 내 몸에 닿는 느낌이 보드라운 반반이. 얘가 내 곁에 다가오면 나는 한 뼘 더 다가가 끌어안곤 한다. 거칠고 두꺼운 털이 부스스하게 난 버찌. 털이 닿는 느낌은 반반이만은 못하지만, 버찌는 곁을 내어주는 방법을 아는 개다. 내 겨드랑이를, 옆구리를, 어깨와 목 사이의 공간을 파고들며 붙어 있기를 좋아한다. 해가 뜨지 않아 보이는 게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새벽이라도 나는 내 곁에 붙어 있는 개가 반반이인지, 버찌인지 알 수 있다. 나는 얘네를 보면, 이 글의 첫 문장에 쓰인 것처럼 ‘겨를 없이 이끌려’ 쓰다듬게 된다. 개들은 사람이 손으로 얼굴, 배, 등 따위를 쓸어주는 행동을 어린 시절 엄마의 혀 빗질-그루밍-처럼 느낀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나의 개들을 쓰다듬는다.
램스이어를 만나면 잠깐이라도 멈춰서 잎을 쓰다듬고야 마는 것은, 내가 없는 집에서 (나는 영영 모를) ’개인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의 개들을 떠올릴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