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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살티 공소
도로주소: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살티길 9
간월 공소와 대재 공소가 박해로 파괴되면서 설립되어 부산 교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소가 된 살티 공소(1868년~)는 지금은 번잡한 관광지에 속해 있지만 박해 시대에는 수목이 울창해 대낮에도 길을 잃기 십상이었던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만큼 사람이 찾아 들기 힘든 은밀한 지역이었기에 박해시대에 신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피난처의 구실을 해주었던 곳이다.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언양 나들목에서 12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 살티는 극심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이 원인이 되어 1876년 1월 24일 치명한 김영제 베드로의 묘가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 때부터 교우촌이자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의 고장이기도 하다.
언양 성당, 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나 석남사 앞 주차장에서 1km쯤 더 간 곳에 살티 공소가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 경상남도 밀양군 · 울주군의 경계 지점에 있는 가지산(1,241m)의 중턱에 위치한 살티는 원래 예로부터 전쟁을 위한 화살을 만들었던 곳이라 해서 시현(矢峴)으로도 불리었다.
그러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간월과 언양 지방에 살던 신자들이 호랑이 등 맹수가 많아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워 숨어 지내기 좋다는 이유로 이곳 안살티(현재 청수골 주변인데, 아무런 흔적도 없다)로 피난을 와서 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박해를 피해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살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즉, ‘살티’라는 말의 유래는 “당시 관헌들이 교우들을 찾아 석남사까지 왔다가 경주로 빠져 나감으로써 이곳의 교우들이 죽음을 면하고 무사히 살아남아 ‘살 수 있는 터’라고 하여 살티 혹은 살틔라 부른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1981년 11월 언양 본당 신자들의 정성으로 김영제 베드로의 묘소를 말끔하게 단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묘지 주변은 후손들이 1984년과 그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중장비를 동원해 정지 작업을 해 둔 채 보존하여 오다가 부산 교회사 연구소의 주관으로 1994년 4월 2일 서북쪽으로 약 18미터 지점인 현재의 위치로 유해를 이장하고, 순교자의 5대손인 김윤근 베드로 신부가 울산 본당 신자들의 후원금을 모아 분묘를 단장하고 순교비를 건립하는 동시에 십자가, 제대, 예수 성심상 그리고 성모상 및 성지 표지석을 세워 묘역을 다듬었다.
살티 공소 인근의 간월골에는 1815년 을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큰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신자수도 늘고 공소 건물도 신축되었다. 하지만 1860년 경신박해,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로 공소는 불타 버렸고 교우촌은 폐허가 되었다. 이때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간월골의 몇몇 교우들은 깊은 산 속으로 피해야 했고 새로운 은신처로서 나무가 울창하고 맹수들이 득실대던 이곳 살티로 숨어들었다.
병인박해가 경상도 지역을 휩쓴 1868년 간월골의 김영제 베드로는 체포되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경주로 압송되었다. 그 후 김영제를 제외한 세 사람은 울산 장대에서 순교하였고,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한편 김영제는 다시 서울로 이송되어 9개월 동안 무수한 매를 맞는 고초를 겪은 후 고종의 혼인날을 기해 특별히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안살티에 정착했다.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안살티에 살던 신자들은 논밭을 일굴 수 있는 평지를 찾아 현재의 공소가 있는 살티로 이주하여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하지만 숱한 고문으로 반죽음이 되어 돌아온 김영제는 그 후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다 마침내 1876년 1월 24일 장하치명(杖下致命)하였다. 현재 그의 묘소는 이곳 살티의 가족 묘소에 안장되어 있고 그의 후손들도 이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후손들에 의해 순교자들의 신앙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살티는 최재선 주교, 김문옥 · 이종창 · 김윤근 신부 등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聖召)의 고장으로 자라났다. 현재의 공소 건물은 1982년에 부산교구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8월 27일)]
살티 김영제와 김 아가타 묘
지번주소: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산218-1
부산 교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소인 살티 공소에 그 묘가 모셔져 있는 병인박해 당시의 순교자 김영제 베드로(1827-1876년)는 일찍이 그 위세가 지방에 크게 떨치던 집안의 후손이었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조부 김교희 프란치스코(일명 재권, 1775-1834년)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부는 당시 서울을 왕래하면서 남인파에 속한 선비이자 초대 천주교회의 창설자인 권일신, 정약용 등 양반들과 접촉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익히고 함께 영세함으로써 부산 지방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그의 아들 김상은 야고보(1804-?) 역시 부친의 뜻을 따라 입교해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조부 김교희는 교난을 피해 인근 간월골(현재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로 피신했다. 여기서 김영제는 김상은과 경주 최씨(마리아)의 사이의 2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가 전국을 휩쓸면서 쫓기던 신자들은 영남 지방에까지 밀려왔다. 이때 김상은 야고보는 지방 관리들의 횡포와 고발, 재산 탈취, 집안 어른들의 배교 강요를 견디다 못해 간월을 떠나 경상북도의 자인골, 청도의 정자동, 월성군 탑곡 등을 전전하며 피해 다니다 박해의 칼날이 무디어진 1850년 12월 다시 간월의 불당골로 돌아왔다.
간월로 돌아온 김영제는 부산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당시 경상도 지방을 담당한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 및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맞이해 공소를 설립하고 1858년에는 공소 건물을 짓기도 했다. 당시 간월골에는 경기 · 충청 · 전라도 등지에서 박해를 피해 온 많은 신자들이 모여 교우촌을 이루었다.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후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등도 이 지방에서 살다가 붙잡혔다.
1860년 경신박해로 김영제는 부친과 여동생 김 아가타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부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이 박해는 조정과 무관하게 지방 관리들이 사사로이 일으킨 것으로 조정의 반대와 당사자들의 파면 등으로 9개월 만에 그치고 대부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김영제만은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대구 감영을 거쳐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풀려났다. 결국 경신박해의 여파로 인해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공소도 불태워져 없어졌다.
게다가 1866년 병인박해의 화가 전국에 미치고 무진박해가 경상도 지역을 휩쓴 1868년 7월 김영제는 또다시 체포되고 이때 간월, 대재 등지에 숨어 살던 많은 신자들이 잡혀가게 되어 간월 공소는 물론 1840년경 형성된 대재 공소도 함께 소멸되었다.
2008년 간월에 있던 김 아가타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김영제가 잡히면서 집은 불태워지고 가산은 몰수됐으며 가족들은 또다시 흩어지고 말았다. 그는 경주부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서 허인백 등 울산의 순교자 세 사람을 만나 순교하기를 결의했으나 이들 세 사람만 울산으로 이송되어 순교했고 김영제는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대구에서 그는 전교 신부들의 행방을 묻는 관리들로부터 극심한 고문과 문초를 당했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종지뼈가 으스러져 불구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굳건하게 믿을 지켜 한양까지 이송되었다가 다행히도 1869년 봄, 마침 나라에 경사가 있어 특별히 사면되어 죽지 않고 9개월 만에 풀려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영제는 피신한 가족들을 수소문해 의령 남씨 등이 피신한 안살티에 정착한 후 여기서 다시 살티 공소를 설립해 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박해가 뜸해지면서 논밭을 일굴 수 있는 평지를 찾아 현재의 살티로 옮겨 와 살게 되었다.
하지만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이 전신으로 퍼지고 상처 부위에서는 항시 피고름이 흘러 한겨울에도 바지를 걷고 진물을 받아 내야 하는 고통 속에 살다가 그는 결국 1876년 1월 24일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고문으로 인해 생긴 병이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교회에서는 ‘장하 순교’(杖下殉敎)라 일컫는다.
십자가 뒤에서 바라본 순교자 묘역 전경.이렇듯 순교자 김영제는 양반 가문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신분이었으나 오직 천주를 따르겠다는 굳은 신앙 하나로 세상의 안위를 버리고 순교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현재 살티 공소에서 5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김영제의 묘소는 1981년 11월 언양 성당 신자들이 정성을 모아 말끔하게 단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1994년 4월 2일 부산교회사연구소 주관으로 서북쪽으로 약 18m 지점인 현재의 위치로 유해를 이장하고, 울산 본당 신자들의 후원금을 모아 분묘를 재단장하고 순교비를 건립하는 동시에 십자가, 제대, 예수 성심상, 성모상, 성지 표지석 등을 세웠다.
그리고 2008년 3월 4일 간월에 있던 여동생 김 아가타의 묘도 김영제 묘 옆으로 이장하여 그해 9월 29일 축복식을 가졌다. 나란히 자리한 남매 묘소 우측에 있는 가족묘 상단에는 부친 김상은과 모친 최 마리아의 묘도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7월 22일)]
간월 김 아가타 묘
지번주소: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산 209
간월골에 살던 동정녀 김 아가타(1836-1860년)는 언양의 첫 신자 김교희 프란치스코(일명 재권, 1775-1834년)의 손녀로 경신박해 때 아버지 김상은 야고보(1804-?)와 오빠 김영제 베드로(1827-1876년)가 잡혀가자 뒤를 따르고자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러나 포졸들이 다른 데로 팔아넘기려 하자 도망쳐 나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피신해 있는 죽림굴에서 은신하며 지냈다.
여기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바깥소식을 전하고 식사 준비와 빨래 등으로 최 토마스 신부를 정성껏 공경하였다고 전한다. 최 토마스 신부는 짚신을 삼고 교우들은 이것을 팔아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다. 잡혀갔던 후유증으로 여러 날을 앓다가 모든 성사를 신심 깊게 받은 김 아가타는 최 토마스 신부의 임종경을 들으며 24세의 나이로 선종했는데, 둘러있던 교우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시신에다 솔가지를 덮고 묘비인 패장을 세워 주었으며, 며칠 후 교우들이 간월골로 옮겨와 공소 뒷산에 매장하였다.
김 아가타가 매장된 간월골은 경상남도의 첫 공소인 간월 공소가 있던 곳으로 김교희 집안을 중심으로 박해를 피해 모여든 신자들에 의해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이전에 이미 샤스탕(Chastan) 신부의 방문이 있었고, 1845년 다블뤼(Daveluy) 주교가 방문했을 때는 예비신자가 150명이나 되는 큰 공동체였었다. 1850년에는 최양업 신부가 방문하기도 했다.
동정녀 김 아가타는 선종 후 경상남도의 첫 공소인 간월 공소가 있던 간월골의 이곳에 묻혔다.그러나 1860년 경신박해 때 포졸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17명의 신자가 체포되고 남은 신자들도 가산을 모두 빼앗긴 채 쫓겨났다. 마침 순회 전교를 위해 이곳을 방문한 최양업 신부 또한 죽림굴로 피신하는 등 간월 공소는 거의 해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결국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김 아가타의 아름다운 생애는 그동안 구전으로만 이곳 신자들에게 전해오고 있었는데, 최양업 신부가 선종(1861년 6월 15일)하기 전인 1860년 9월 3일 죽림굴에서 리브와(Libois) 신부와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에게 보낸 열아홉 번째 마지막 서한에 그녀가 소개되어 있음이 후에 확인되었다.
“24세 된 동정녀가 있었는데, 교리에 밝고 열심하여 모든 신자들 중에서 출중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를 원하더니 자기 부친과 다른 신자들이 체포될 때 포졸들한테 가서 자기도 같은 신자이니 잡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다른 신자들의 만류로 다른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거기서 포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포졸한테 가서 잡혀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때 이 동정녀가 가르치며 선생처럼 지도한 두 처녀를 묶어가지고 가다가 여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없으므로 저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처녀들을 농락하고 나서 다른 데 팔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세 처녀들은 놓아 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놓여났습니다. 동정녀의 이름은 아가타였습니다.
아가타의 부친과 오빠가 감옥에 갇혔고, 집도 갈 곳도 없어 방황하다가 마침내 내게로 왔습니다.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여 탈진한 몸으로 병석에 누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둘러있던 신자들과 같이 임종경의 마지막 말마디를 끝내자 아가타는 운명하였습니다.”(언양 성당 신앙전래 200년사, 1993년)
부산교구는 2008년 김 아가타의 묘를 살티에 있는 오빠 김영제 베드로 순교자의 묘 옆으로 이장하였다. 1991년 4월 17일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김 아가타의 묘소를 정리하고 비석을 세웠다. 비문에 이해인 수녀가 쓴 시가 홀로 그녀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사랑의 순교를 열망했던 / 천심의 복된동녀 아가다여 / 지지않는 꽃으로 피어나소서 / 믿음의 길 밝히는 별이되소서.” 순례자들은 여인의 몸으로 천주를 고백하고 자진해 체포되려 했던 김 아가타의 용감하고도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부산교구는 2008년 3월 4일 간월에 있는 김 아가타의 묘를 살티에 있는 오빠 김영제 베드로의 묘 옆으로 이장하고 그해 9월 29일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간월 공소 뒷산의 묘소 또한 보존하고 있다. [출처 : 부산교구 울산대리구 발행, 들풀, 바람 그리고 - 울산의 성지를 찾아서, 2010년, 내용 일부 추가 및 편집(최종수정 2020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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