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94) 조조의 실책
조조는 그날부터 추씨에게 반하여, 여러 날이 지나도 허창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호위 책임자인 전위 장군(典韋 將軍)에게 자신에 숙소에는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어떤 비밀이라도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어느날 가후는 장수를 찾아가, 조조와 추씨의 염문을 일러 바쳤다.
장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했다.
"가후! 조조가 제아무리 천하의 영웅이기로 우리 가문을 그렇게나 욕보일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그놈이 이렇게 나온다면 나는 패망의 고배를 마시는 한이 있더라도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싸우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훙분하셔서 섣불리 움직이면 만사를 그릇치기 싶상이니, 좋은 계교를 써보도록 하십시다."
가후는 이렇게 말한 뒤에, 장수의 귀에 입을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장수는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이튼날 장수는 조조를 장중으로 찾아가,
"요사이 제가 거느린 병사들이 자꾸만 도망을 쳐버려 큰일 났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조조는 그 소리를 듣고, 소리내어 웃으며 말한다.
"그거야 사대문에 위병(衛兵)을 세워서 출입하는 자들을 감시하면 되지 않겠소?"
"저도 그렇게 하고는 싶으나, 조 승상의 허락도 없이 병사를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서...."
"그런 걱정은 말고 좋도록 하시오."
조조의 허락이 내리자, 장수는 곧 심복 부하들을 중군(中軍)으로 옮겨 놓고 거사를 도모하려는데, 단지 하나 걱정스러운 것은 조조의 호위 대장인 전위가 걸리는 것이었다.
가후가 장수의 고민을 알고, 이렇게 품하였다.
"편장군 호거아(偏將軍 胡車兒)를 불러서 전위를 처치할 계획을 세워 보십시오."
호거아는 오백 근의 무게를 짊어지고 하루에 백 리를 주파하는 괴력의 장사였다.
호거아는 곧 불려와서 가후의 설명을 듣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제가 세상에 무서운 놈이 없사오나, 전위의 쌍철극(雙鐵戟)만은 당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무슨 방법이 없을까?"
"전위를 불러다가 술을 취하도록 먹이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 틈에 조조의 중군으로 들어가 전위의 쌍철극을 빼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쌍철극이 없다면 전위도 문제가 없습니다."
장수는 호거아의 말대로 전위에게 술을 먹이기로 하였다.
이날 밤, 전위가 조조의 장중을 지키고 있는데, 호거아가 찾아와서 말한다.
"전위 장군님! 장수 장군의 심부름을 왔습니다."
호거아는 이렇게 말하며 편지 한장을 내밀었다.
전위가 편지를 펼쳐 보니, 장수가 내일 오후에 자기한테로 술을 먹으러 오라는 전갈이었다.
전위는 술을 마신 지가 이미 오랜지라, 내심 매우 고맙게 여겼다.
게다가 마침 다음날이 비번(非番)인지라,
"돌아가시거든 고맙다고 말씀드리시오. 내일 오후에는 불러주신 대로 꼭 가겠소."
하고 말하였다.
다음날 전위는 장수와 더불어 밤이 깊도록 술을 마셨다.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취했을 때였다.
"전위 장군님! 이제 그만 하시고 중군으로 돌아가십시다. 주공의 명령으로 제가 숙소까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하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어허 취한다. 자네는 누군가?"
전위가 취기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니 그 사람은 어젯밤 편지를 가져왔던 호거아가 아닌가.
"오, 자네였군그려. 자네가 나를 바래다 주겠나?"
"예, 주공의 분부로 제가 장군을 모시겠습니다."
호거아는 전위를 중군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전위는 방안에 드러눕기가 무섭게 코를 골며 골아 떨어졌다.
그러자 호거아는 전위의 숙소에서 나오는 길에 전위의 쌍철극을 훔쳐가지고 밖으로 달려나왔다.
조조는 이런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이날 밤도 추씨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문득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여봐라! 저게 웬 말발굽 소리냐?"
조조의 호통에 호위병이 달려와서 대답한다.
"장수의 군사가 도망병을 막느라고 순찰다니는 말 소리입니다."
"못난 것들 같으니라고, 밤중에 왜들 그꼴인고?"
조조가 안심하고 하던 짓을 계속하는데, 이번에는 중군에서 요란한 함성이 일고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창고에서 불이 일어나, 불을 끄고 있습니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함성이 더욱 가까워졌다.
조조가 얼른 일어나 창문을 열고서 밖을 내다보니, 군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순간, 보통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조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전위! 전위는 어디 있느냐?"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전위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한편, 전위는 술에 곯아 떨어져 자다가, 밖이 하도 소란하므로 잠이 깨어 내다보니, 사태가 심상치 않아보였다.
그리하여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쌍철극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쌍철극은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는 이미 전투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전위는 황급히 보졸(步卒)의 요도(腰刀) 한 자루를 빼앗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 군마(軍馬)를 타고 공격해 오는 적들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였다.
앞장 선 기마대는 그렇게 막아 내었다.
그러나 한 부대가 쫓겨가자, 새로운 보병 부대가 공격해 온다.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 한 전위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면서 싸웠다.
이러는 중에 칼이 부러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적병을 한 손에 하나씩 움켜잡고 마구 휘둘러 대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적들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
적들은 한발 뒤로 물러서더니, 이번에는 활을 쏘아갈겼다.
전위의 몸은 순식간에 무수한 화살이 꼿혔다.
전위는 그럼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중문 앞에 떡 버티고 서서, 적들의 진입을 막았다.
그러나 뒷문을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장수의 부하들은 뒷문으로 몰려 들어와, 전위를 등뒤에서 창으로 찔러 넘어뜨렸다.
한편, 조조는 전위가 죽기로 중문을 지키고 있는 사이에, 재빨리 뒷문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말에 뛰어 올라 정신없이 도망을 치는데, 뒤에는 조안민이 따라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나 조안민은 말이 없어 뜀박질로 도망을 치다가 적의 화살을 맞고 쓰러져 버렸다.
조조도 왼쪽 팔꿈치에 화살 한 대를 맞았다.
말의 몸에도 화살이 세 대나 꼿혔지만, 워낙 명마인지라 그대로 달린다.
조조는 정신없이 달려서 육수 강변에 도달하였다.
뒤로 추격해 오는 적들의 함성이 더욱 가까워졌다.
조조는 말에 채찍을 가하며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말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어두운 강을 헤엄쳐 건넜다.
가까스로 강을 건널 무렵에 돌연 화살 한대가 날카로운 소리로 날아오더니, 조조가 타고 있던 말의 왼편 눈에 깊숙히 박혀버렸다.
말은 <어흐흥!> 소리를 내며 앞발을 번쩍 들더니, 그대로 모래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제사 깨닫고 보니. 강 건너편에서 적들의 횃불이 밝힌 가운데, 젊은 장수 하나가 급히 말을 타고 강을 헤치며 건너오는 것이 보였다.
(아차, 이제는 도망도 못 치고, 꼼짝없이 죽게 생겼구나!)
조조가 크게 낙담을 하고 있는데, 천만 뜻밖에도 강을 건너온 젊은 장수는 큰아들 조앙(曺昻)이었다.
"아버님! 빨리 이 말을 타고 피하십시오!"
조앙은 죽은 말 옆에 망연히 서있는 조조를 보고 말하였다.
"너는 어떡하고?"
"제 생각은 마시고 어서 타십시오."
"그건 안 된다. 같이 타고 가자!"
"추격이 급합니다. 혼자서 먼저 가십시오. 저는 걸어서 뒤따르겠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화살은 수없이 쏟아지고, 적병 십여 기가 급히 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애야! 빨리 타고 가자!"
"아닙니다. 먼저 타고 피하세요."
조앙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의 화살이 조앙의 오른편 가슴에 깊이 꼿혔다.
"앗!"
조앙이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본 조조가,
"앗! 앙아!"
조조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말에서 뛰어내릴 듯하다가, 다음 순간 말에 박차를 가하여 맹렬히 달리기 시작하였다.
어둠을 뚫고 죽기로 달리길 삼십 여리, 그제서야 날이 훤히 밝아온다.
조조는 뒤따라 온 병사들을 거두어 모았다.
그런데 완성으로 함께 출병한 우금(于禁) 하후돈, 허저(許楮),이전(李典), 악진(樂進)등의 장수들과 그의 부하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는 중에 우금이 찾아와 승전을 알린다.
"장수(張繡)는 우리에게 패퇴하여 얼마 남지 않은 패잔병을 거느리고 유표(劉表)에게 가버렸습니다."
조조가 그제서야 알아보니, 장수는 자신에게 원한을 가지고 자신의 숙소에 모든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하였을 뿐, 완성 곳곳에서는 조조군의 세력에 밀려, 패전을 거듭하였다는 것이다.
조조는 그길로 다시 완성으로 돌아왔다.
그런 뒤에 전위와 조앙과 조안민의 영혼을 위무하기 위하여 제사를 크게 지냈다.
그리고 제단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불민하여 맏아들 앙과 조카 안민을 잃은 것도 슬프나, 그보다도 더 뼈저리게 슬픈 것은 맹장 전위를 잃은 것이오."
말을 마친 조조가 목을 놓아 울어 대니, 수하의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이 조조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내심으로 새삼스럽게 맹세하였다.
다음날 조조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쓴 입맛을 다시며, 허창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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