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가 종영된 지 벌써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대중들은 김수미를 일용엄니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 김수미에게서 몸빼 바지 입고 사투리 팍팍 쓰던 일용엄니의 흔적은 거의 지워져 가고 있다. 28살, 꽃다운 시절부터 할머니 역을 맡았던 이 여배우는, 오랜 세월동안 일용엄니 안에 갇혀 있던 한풀이를 하려는 듯, 국내 최장수 농촌드라마였던 [전원일기]의 종영 이후 더 활발한 활동으로 자신의 진가를 빛내고 있다.
최근 김수미의 주 활동 무대는 TV가 아니라 영화다. 삐리리리 욕설을 내뱉고 젠틀맨 송을 유쾌하게 그녀를 [프란체스카3]에서 볼 수 있었지만, TV보다는 영화에서의 활동반경이 훨씬 크다. 1951년생인 김수미는 올해 56살이다. 아무리 여배우의 수명이 예전보다 연장되었다고는 하지만 50대의 여배우가 이렇게 스크린을 누비며 활동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스크린 공략은 활기가 넘친다. 2005년과 2006년을 보면, 김수미가 출연한 영화는 각각 5편씩 개봉을 했다. 올 해도 현재까지 [마파도2]와 [못 말리는 결혼] 등 2편이 개봉을 했고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올 여름 영화시장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격이 심상치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스파이더맨 3]는 파죽지세로 극장가를 점령했다. 전체 스크린의 반 이상이 [스파이더맨 3]를 상영했고 한국 영화의 위기가 거론될 때 [못 말리는 결혼]이 개봉했다. 유진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한 [못 말리는 결혼]은 하석진 등 젊은 연기자들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지만 진짜 주인공은 사돈지간이 될 두 청춘 남녀의 부모 역을 맡은 김수미와 임채무다. [못 말리는 결혼]은 흥행의 분수령이 되는 첫 주말, 4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개봉 2주차에는 스크린 수를 오히려 늘렸다.
[못 말리는 결혼]의 흥행은 전적으로 김수미의 우먼 파워에서 비롯된다. 영화의 웃음은 전부 김수미에 의해서 시작된다. 서로의 집안의 차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결혼을 앞두고 그 차이를 희극적으로 강조하는 방법은 상황의 언밸런스를 만드는 것이다. 웃음은 거기에서 파생된다. [못 말리는 결혼]의 특징이 있다면 사랑하는 남녀 당사자보다 그들의 부모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자 시사회 무대인사에서 곱게 웨딩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김수미는 무대 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작품은 럭셔리 홈 코미디고, 그리고 김수미의 카리스마는 역시 욕 아닌가? 국제화 시대고 그래서 이번에는 영어로 욕을 많이 했다.]
청담동에서 명품샵을 운영하며 럭셔리하게 살고 있는 심말년(김수미 분) 여사는, 외동아들 심기백(하석진 분)이 결혼하겠다고 데리고 온 며느리감 후보 은호(유진 분)의 아버지가 보잘 것 없는 풍수지리가 박지만(임채무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 집안을 멸시하기 시작한다. 기백은 기백대로 은호의 아버지인 박지만의 눈에 들기 위해서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한다. 드디어 양가 집안 어른들이 만나게 되는 자리에서 신경전은 극에 달하는데, 이런 이야기 전개는 너무나 흔한 것이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멸시 당하기 딱 좋은 소재이다. 김수미는 자신이 맡은 심말년 여사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못 배우고 그런 여자지만, 또 돈 밖에 없지만 돈이면 다된다는 성격이지만,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청국장을 먹는 씬에서는 눈물이 많이 났지만 눈물을 절제했다. 나도 때로는 개인적으로 호텔에 가서 스테이크 먹자는 때가 많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청국장에 와작와작 밥말아 먹어야 잠이 잘 온다. 가식이나 허영도 없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디테일하게 배역에 대해서 연구 많이 했고 최선을 다해서 연기했다.]
[못 말리는 결혼]은 정석대로 초반에는 차이를 강조한다. 두 집안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확실하게 관객들에게 전달해야만 극적 분위기가 고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이의 드러냄에 있어서 [가문의 영광] 시리즈의 각본을 쓴 김유찬 작가는 심말년 여사를 연기한 김수미의 비속어에 의존한다. 상당 부분 현장 애드리브로 완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상황 자체가 졸부 이미지의 김수미 캐릭터에 의존하게 되어 있다.
[시나리오 읽고 촬영 들어갈 때, 감독님 허락 하에 영어로 욕 애드리브 하는 것은 전부 내가 직접 만들었다. 특히 퍽큐 같은 것. 욕 하고 나니까 시원했다. 사실 어떤 감독들은 애드리브 하는 것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감독님이 맘 놓고 애드리브하게 만들어 주었다.]
청담동의 현대적인 럭셔리 명품 숍을 운영하는 심말년 여사와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벼루에 먹 갈고 글씨 쓰는 박지만의 대립은, 설정 자체부터 극과 극이다. 온갖 해외 명품을 걸친 심말년 대 개량 한복을 입고 한옥에 살면서 전통 예습을 중요시하는 박지만의 외형적 모습부터 사고방식까지 극단적인 대립이 한눈에 보이게 설정되어 있다. 이런 극단적인 갈등의 노출은 너무나 전형적이고 상투적이어서 새로움은 전무한 대신에 대중들에게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갈등이 전달된다.
[못 말리는 결혼]은 초반에는 갈등의 극대화에 주력하고 후반에는 갈등이 봉합되고 위기가 마무리되는 수순을 밟아간다. 이 과정에서 역시 상상력의 새로움이라든가 문화적 차이가 발산하는 계층간 세대간 문제의식의 제기는 없다. 그저 웃고 즐기자는 것이다.
김수미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자신이 읽고 좋은 책만 갖다 놓은 [일용 엄니 책방]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소설책도 펴냈고 현재 김혜자씨를 모델로 한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해서 틈이 날 때 자주 떠나는데, 특히 인도의 깊은 정신세계를 동경한다. 우리가 일용 엄니의 이미지로 그녀를 너무나 좁게 가두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전원일기] 이후 영화 쪽에서 제의가 왔을 때 까메오같은 작은 역할이었다.
2003년 [오 해피데이] 이후 [위대한 유산][슈퍼스타 감사용]을 거쳐 [가문의 위기](2005년)를 찍으면서 그녀의 진가가 빛나기 시작했다. 가문의 영광 시리즈의 주 번째 작품인 [가문의 위기]는 신현준 김원희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김수미의 촌철살인 애드리브가 없었다면 심심해졌을 것이다. 결국 가문 시리즈의 세 번째인 [가문의 부활](2006년)에서는 김수미가 전면으로 등장한다. 50대 여주인공이 작품을 끌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김수미에게서는 어색하지가 않다.
[간 큰 가족]이나 [구세주]같은 범작도 끼어 있지만 확실히 2002년 [전원일기] 종영 이후 스크린 진출을 시도한 김수미는 뒤늦게 영화에서 또 다른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지구를 지켜라][범죄의 재구성][타짜]의 백윤식이 50대 이후에 스크린에서 빛을 발한 경우는 있지만, 여배우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관객들이 여배우에게 요구하는 것은 지금까지 개성 있는 연기보다는 미모와 섹시함 등이었다.
[마파도](2005년)의 흥행 성공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주연 배우들은 충무로의 톱클래스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이문식의 첫 주연작이었고, 상대 여배우들은 모두 그보다 나이가 많은 5,60대의 여배우들이었다. 그중에서 단연 압권은 김수미였다. 김수미가 빠진 [마파도]를 생각해보라. 얼마나 싱거운 것인가.
김수미의 뒤늦은 스크린 전성기는 어떤 이유 때문일까? 그것은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개성 있는 연기 때문이다. 항상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이상을 소화해냈다. [마파도]에서도 할머니들의 비중은 애초에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도 단연 김수미가 돋보였던 이유는 눈치 보지 않는 거침없는 개성 때문이다. 특히 코미디에서 김수미는 발군의 순발력을 자랑한다. 코미디는 0.1초의 승부다. 웃음은 타이밍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춰 끼어드는 그녀의 대사는 관객의 급소를 찌르며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는다.
거의 동물적 감각을 갖고 웃음의 코드를 정조준 하는 김수미의 정확한 타이밍은, 그녀가 타고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지난한 삶의 바닥에서 진실되게 건져 올린 것이어서 관객들에게 체감도 있게 전달된다. 그녀는 노력하는 연기자다. 책을 읽고 혼자 여행하는 일용엄니를 상상해 본 적 없듯이, 그녀는 늦은 나이지만 쉬지 않고 변신을 꿈꾸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코미디 이상의 또 다른 감동을 주는 김수미의 연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