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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출발점
도미노를 일정 간격으로 세워놓고 손가락으로 튕기면 다른 도미노들이 연쇄적으로 넘어진다. 이때 도미노는 자기보다 1.5배 큰 도미노까지 넘어뜨릴 수 있다고 한다. 1.5배 큰 도미노는 더 많은 위치에너지를 보유하고 있고, 이것이 넘어지면서 더 큰 운동에너지를 생성하게 된다.
2001년 샌프란시스코 과학관에서 한 물리학자가 도미노 효과의 에너지 체증 현상을 실험으로 검증했다. 그는 뒤의 도미노를 앞의 도미노보다 1.5배 더 크게 만들었다. 첫 번째 도미노는 5cm 높이로 만들고 마지막 8번째는 85cm 크기로 제작했다. 그가 첫 도미노를 손가락으로 톡 치자 8번째의 커다란 도미노가 쾅 하고 넘어졌다.
이렇게 도미노 크기를 1.5배로 계속 불려나가면 23번째 도미노는 에펠탑 높이보다 커지고, 31번째 도미노는 에베레스트산보다 높아진다. 그리고 57번째가 되면 도미노 높이가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와 맞먹게 된다. 5cm 크기의 도미노를 손가락으로 치면 57번째에선 38만km 높이의 도미노가 넘어진다는 얘기다. 작은 변화가 나중에 어마어마한 괴력을 일으키는 셈이다.
인간 사회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인류의 발전과 변화도 처음엔 5cm 크기의 도미노에 불과했다. 첨단 로봇과 우주선도 그 출발은 아득히 먼 조상의 볼품없는 돌도끼였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모이고 서로 융합하면서 오늘의 문명을 이루었다.
테레사 수녀는 어떤 이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아요. 나는 한 사람을 바라볼 뿐입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고 한 사람만을 붙잡습니다. 만일 내가 그 한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 많은 사람들을 껴안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인 조동화는 이렇게 노래했다.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다. 봄이면 온 천지를 수놓는 망초꽃도 처음엔 아메리카에서 건너온 한 톨의 씨앗이었다. 그 씨앗이 산과 들녘을 하얗게 물들인 것처럼 지금의 작은 선행은 훗날 세상을 바꿀 밀알이 될 것이다. 그것을 실천할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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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으로 대하라
우리는 처음 누구를 만날 때 언행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깎듯이 예의를 차리고 조심스럽게 상대를 대한다. 거기에는 '당신도 나와 같은 소중한 존재'라는 존중심이 깔려 있다. 만약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도 없이 겉으로만 그럴싸한 태도를 취한다면 참된 예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예절은 마음속의 존경심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예의는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가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역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존중심을 행동으로 실천한 분이 퇴계 이황이다. 그는 신분이 미천한 사람에게도 예의를 다했다. 손님이 오면 설혹 나이가 어리더라도 반드시 계단 아래로 내려가 맞이했고 전송도 그렇게 했다. 나이 어린 제자들에게도 ‘너’라고 하대하지 않았다. 제자들을 맞이하고 보낼 때 예의를 갖춰 존중심으로 대했다.
존중은 영어로 respect이다. re(다시)와 spect(보다)가 합쳐진 말로, ‘다시 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히 상대에게 시선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상대의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관계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설파했다. ‘나-그것(I–It)’과 ‘나-너(I–Thou)’의 관계이다. ‘나-그것’은 상대를 사물처럼 대하는 관계이고 ‘나-너’는 인격 대 인격이 마주하는 관계이다. 타인에 대한 존중심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히 후자이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상대
를 사물처럼 취급하지 않고 소중한 존재로 대할 때 가능하다.
내가 무심코 대하는 사람은 누구의 아버지이거나 아내이다. 또한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고 딸이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든 예의와 존중으로 대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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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모나리자
어떤 분이 모나리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보고 “모나리자보다 모나리자 앞에 서 있는 분이 더 멋져요. 한쪽은 인간의 작품이지만 다른 한쪽은 신의 작품이기 때문이죠.”라는 글을 보냈다.
인간은 모두 신이 창조한 위대한 걸작품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 만든 작품을 보고는 감탄하면서도 신이 만든 작품에는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 다른 인간을 험담하거나 갑질을 일삼는다. 신성모독이 아닌가?
우리들 각자는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이다. 각자가 유일무이한 원본인 만큼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다. 인간이 존엄한 것은 이런 절대적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말했다. “모든 포드 자동차는 완전히 똑같은 성능과 디자인으로 만들어지지만 이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인생을 누릴 자격이 있다. 신은 사람을 창조할 때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값비싼 자동차를 보고는 “와!” 하고 놀라면서도 스스로에 대해선 경탄하지 않는다. 자신의 절대적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인간의 가치를 안다면 굳이 모자리자 앞에서 놀랄 까닭이 없다. 매일 아침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이 가장 위대한 '모나리자'임을 것이다.
[모]두가 신의 작품이다
[나] 역시 귀한 존재이다
[리]스펙트(존중)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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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없는 사이는 없다
아들이 중학생일 때였다. 밤중에 안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자 내가 말했다.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떡하니? 안방에 들어올 때 노크 좀 해.”
아들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빠 엄마 방인데 왜 노크해야 해요.” “나도 네 방에 들어갈 때 노크하잖아. 그게 에티켓이야.”
우리말에 ‘허물없다’라는 말이 있다. ‘매우 친하여 체면을 돌보거나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친하니까 조심할 필요가 없다니! 모르는 타인에게 예의를 잘 지키면서 친밀한 사람과는 안 지킨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가까운 사이라면 더 깍듯이 예의와 에티켓을 지키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한국 사람은 조금 친해지만 함부로 프라이버시를 침범하는 성향이 있다. 자식이 결혼하지 않았으면 왜 결혼하지 않았는지, 아이가 없으면 왜 없는지 꼬치꼬치 캐묻는다. 원치도 않는 조언을 하거나 간섭한다. 싫은 내색을 하면 “유별나게 군다.”고 언짢아한다. 그에게 털어놓지 않은 비밀이 있으면 “우리 사이에 그럴 수 있느냐?”고 화를 내기도 한다. 이것은 친함을 가장한 폭력이다.
허물없는 사이는 없다. 허물없는 사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행동한다면 그것이 그의 허물이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상대의 사적 영역을 인정하고 그의 감정과 생활방식을 존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은 지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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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멈춤
아침에 집을 나섰다. 풀섭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귀뚜라미 소리는 더 또렷 해졌다.
우는 귀뚜라미는 모두 수컷이다. 수컷은 톱니 모양의 앞날개에 긁개로 긁어서 소리를 낸다. 암컷은 신체에는 이런 구조가 없어서 소리를 낼 수 없다. 말하자면 수컷은 연주자, 암컷은 청중인 셈이다.
수컷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연주법을 구사한다. 암컷을 유혹할 때, 다른 수컷과 영역 다툼을 할 때, 짝짓기 전후에 내는 울음이 모두 다르다. 한 번도 과외 교습을 받은 적이 없는 귀뚜라미가 이런 기술을 터득했다는 사실이 신비롭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아서 루빈스타인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어떻게 해서 당신은 그렇게 음을 잘 다루십니까?" 그가 대답했다. “내가 남들보다 음을 더 잘 다루지는 않지만 멈춤은 잘 다룹니다. 아! 예술이 머무는 곳은 거기입니다."
보통의 연주자에게는 콩나물 모양의 빼곡한 악보만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대가는 악보 사이의 쉼표를 본다. 멈춤의 고요함을 통해 피아노의 선율이 더 선명하고 감동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까닭이다. 멈춤의 순간이 있기에 순수하고 진실한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멈춤은 진실로 통하는 관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너무 바쁘게 세상의 속도에 휩쓸려 다니느라 멈춤을 모른다. 책을 읽거나 음식을 먹거나 일을 할 때 잠시 멈추어보자. 하던 행동을 멈추고 편안하게 앉아서 눈을 감자.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자.
태국의 불교 스승 아잔 붓다다사는 자연스러운 짧은 멈춤을 '일시적 열반'이라고 불렀다. 경험을 붙잡거나 그것에 저항하지 않는 멈춤의 순간에 속박에서 벗어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다. "멈춤의 순간이 없다면 살아 있는 것들은 죽거나 제정신이 아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차분함, 온전함과 편안함의 시간이 있기 때문에 살 수 있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귀뚜라미 소리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잠시 멈춤 덕분이다. 멈춤은 우리를 주변의 존재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준다. 지금 여기, 현재의 순간을 오롯이 느끼게 한다. 가을이 깊다. 잠시 멈춰 서서 가을의 소리에 귀를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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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최대 적
인간은 꽃을 꺾거나 꽃병에 꽂아둔다. 그런 행위는 인간에겐 이득이 되겠지만 꽃의 본성을 해치게 된다. 또 코끼리에게 빨간 치마를 입혀 서커스 묘기를 훈련시킬 수 있다. 이것 역시 코끼리의 본성을 해치는 일이다.
돌, 짐승, 식물은 자기 스스로 해치지 못한다. 어떤 꽃도, 코끼리도, 돌멩이도 스스로 잘못된 길로 들어설 생각을 하지 못한다. 오직 인간만이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고, 다시 올바른 길로 자신의 행로를 바꿀 수도 있다.
독일 철학자 요제프 피퍼가 말한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힘든 점은 스스로를 파괴할 만큼 자신을 무질서 상태에 빠뜨릴 능력을 갖춘 것이 다름 아닌 가장 깊이 자리한 인간의 내적 자아라는 점이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자연이나 다른 존재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인간은 땅에 경계를 긋고 마치 지구를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인간에게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고작 20만년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바다의 고래는 5천만년, 개미는 1억년, 그리고 악어는 자그마치 2억3천만년을 헤아린다. 굳이 원소유권자를 따지자면 인간보다 동물에게 있다.
그런 인간이 짧은 시간에 지구를 완전히 망가뜨린 일은 경악스럽다. 인간이 배출한 쓰레기와 대기 오염으로 지구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파괴할 핵무기를 1만5천개나 보유 중이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100번 절멸시킬 수 있는 분량이다.
“교사 출신으로서 어떤 교육관을 갖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자 알리바바 그룹의 창시자 마윈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이들에게 기계와 경쟁하라고 가르칠 순 없습니다. 기계는 훨씬 똑똑합니다. 교사는 지식만을 전달하기를 멈춰야 합니다. 가장 먼저 '가치'를 가르쳐야 해요.”
인간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AI나 기술 혁명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탈인간화이다. 그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하면 머잖아 인간 스스로 멸종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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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이 없어
"난 뒤끝은 없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가식이 없고 솔직하게 속마음을 드러낸다고 얘기한다. 자신이 화통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은연중 자랑한다. 마치 장점이나 되는 것처럼.
하지만 이런 사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내뱉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남에게 충고하고 지적한다. 이것은 솔직함이 아니라 무례함이다.
뒤끝이 없는 말일수록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 화자는 말을 한 후에 잊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청자는 화자가 쏟아낸 가시 돋친 말에 아파하고 속으로 삭여야 한다. 뒤끝 없는 사람의 뒤끝을 감내하는 것은 오로지 청자의 몫이다.
사람 사이에는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그것이 상대에 대한 존종이자 예의이다. 스스로 뒤끝이 없다고 떠벌리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관대한 반면 타인의 실수에는 옹졸하다. 타인의 작은 흠까지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누구에게 비난을 받으면 이성을 잃고 화를 낸다.
말과 술은 충분한 숙성기간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뒤끝이 없다는 사람은 그냥 생각나는 대로 불쑥 말을 내뱉는다. 숙성되지 않은 술은 몸을 상하게 하고, 함부로 내뱉은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
말씀 언(言)은 ‘돼지해머리(亠)’와 ‘둘(二)’, 입(口)으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로 두 번 생각해서 입을 열어야 한다는 뜻이다. 생각 없이 입을 열면 말이 아니라 흉기일 뿐이다. 혀 아래 도끼가 들었다라는 속담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말은 한 번 입 밖으로 나오면 주워 담을 수 없다. 뒤끝 없는 말은 하지 말자. 자기 말의 뒤끝을 스스로 살피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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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새
까치가 나무에 집을 지을 때는 나름 원칙이 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주로 둥지를 짓는다. 알이나 새끼를 노리는 수리부엉이나 너구리 등 천적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다. 실제로 까치 새끼의 부화 성공률은 숲속보다 도심지의 둥지가 더 높다.
대개 까치는 느티나무, 버드나무, 플라타너스 같은 활엽수에 둥지를 짓는다. 가지가 넓게 퍼져 둥지를 지탱하기 쉽고, 넓은 잎이 둥지를 가려주기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풍이 많이 부는 제주에선 바람에 잘 견디는 침엽수를 더 선호한다. 바람에 둥지가 흔들려 새끼가 아래로 떨어지는 불상사를 예방하려는 것이다.
까치도 도구를 사용한다. 부리가 닿지 않는 좁은 틈에 먹이가 있으면 주변에서 나뭇가지나 철사를 물고와 꺼내 먹는다. 틈새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구부러진 철사를 부리로 펴서 사용하기도 한다. 어느 각도로 넣어야 먹이가 걸려 나오는지를 판단해 도구를 알맞게 가공하는 것이다.
까치는 놀라운 공통체 의식을 지닌 동물이다. 여러 가지 소리로 의사소통하고, 천적이 나타나면 동료들에게 소리로 대피 신호를 보낸다. 또 어떤 까치가 죽으면 근처를 지나던 다른 까치들이 모여들어 주변을 빙빙 돌거나 나뭇가지에 조용히 앉아 있다. 인간의 눈에 마치 추모나 애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까치의 장례’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이다.
까치는 ‘새 중의 철학자’로 불린다.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고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기임을 깨닫는 '자기 인식(self-recognition)' 능력을 지닌 까닭이다. 그런데 하루에도 몇번 거울을 보는 인간은 무엇을 철학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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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품에 속지 말자
좋아하는 감정과 사랑을 혼동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많이 좋아하거나 오래 좋아하면 사랑이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사랑과 좋아하는 감정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사랑은 양적인 감정인 동시에 질적인 감정이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경우엔 누구를 많이 사랑할 수도 있고, 깊게 사랑할 수도 있다. 반면 좋아하는 감정에는 깊이가 없다. 누구를 많이 좋아할 순 있어도 깊게 좋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랑에는 좋아하는 감정에 없는 하나가 더 있다. 희생(헌신)이다. 모든 사랑은 대상을 향한 희생과 헌신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 안중근의 조국애처럼 사랑에는 반드시 헌신이 따른다. 반면 좋아하는 감정에는 대상보다는 자기 중심적이다.
고양이와 쥐의 관계를 보자. 고양이는 쥐를 좋아하지만 쥐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람은 생선을 좋아하고 꽃을 좋아할 순 있어도 생선이나 꽃을 사랑할 순 없다. 쥐, 생선, 꽃에서 자기 잇속을 채우려고 할 뿐, 그것을 위해 희생하려는 마음이 없는 까닭이다.
사랑은 헌신에 따른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만약 자신의 애정 행위에 대한 반대 급부를 바란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 해줘야지." 이것은 거래이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자기 희생 없이 사랑은 존립하지 않는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 행세를 한다. 애국(愛國)과 호국(好國)은 다르다. 애국은 자기 희생과 헌신이 수반되는 숭고한 사랑이다. 그러나 호국은 쥐를 좋아하는 고양이처럼 자기 배를 채울 욕심으로 나라를 좋아할 뿐이다. 그들이 자기 잇속을 위해 나라와 국민을 보고 있진 않은지 두려움이 앞선다.
사랑에도 진짜와 가짜, 그리고 짝퉁이 있다. 절대로 유사품에 속아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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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담의 첫 번째 희생자
남의 험담을 자주하는 사람이 있다. 저 사람은 저래서 싫다며 이러쿵저러쿵한다. 설혹 그 말이 사실일지라도 험담이 계속되면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험담하는 사람이 놓치는 대목이 있다. 험담의 첫 번째 희생자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다. 험담은 남을 해치기 전에 자신의 정신세계를 먼저 오염시킨다. 내가 누군가를 헐뜯을 때 그 말이 가장 먼저 귀를 통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타인을 향해 쏜 화살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셈이다.
험담은 버릇이다. 반복할수록 뇌의 특정 부위가 강화되고, 그 강화된 부위는 비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반복적인 비난이 그 사람의 시각을 점차 공격적으로 바뀌게 하는 것이다. 결국 조롱, 멸시, 불평이 그의 일상에 자리 잡게 된다.
험담은 상대를 훼손하려는 의도를 띠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흐리게 한다. 한 마디의 험담은 맑은 샘물에 한 방울의 오수가 떨어진 것처럼 마음의 수면을 혼탁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흉을 보는 순간, 그 말의 그림자는 내 영혼에 먼저 내려앉는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타인을 헐뜯는 말은 타인의 품격을 떨어뜨리기 전에 자신의 인격을 먼저 드러낸다.”고 했다. 남을 폄훼하는 말은 나의 품위를 먼저 훼손한다. 그러니 험담을 삼가라. 남을 깎아내리는 그때, 추락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당신의 인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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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품격
어제 서울 강남의 커피솝에서 있었던 일이다. 실내는 손님으로 만원이었다. 한참을 기다려 겨우 빈자리를 찾았다. 2인용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았다.
잠시 후 가족 셋이 옆 테이블에 앉았다. 그 테이블도 2인석이었다. 의자 하나가 모자라자 중년의 신사가 내게로 오더니 의자를 가져가도 되는지 물었다. 흔쾌히 승낙하자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윽고 옆 테이블의 가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년신사의 아들이 의자를 내 자리에 도로 갖다놓으며 말했다. "의자 잘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가게의 의자는 내 소유물이 아니다. 그냥 가게를 나가면 그만이지 굳이 의자를 원래 자리로 옮겨놓고 감사 인사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러지 않았다. 의자를 빌려준 타인의 소소한 배려에 고마움을 표한 뒤 자리를 떴다.
품격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 평소 부모의 말과 행동이 아들의 몸에 스며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부전자전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배우고 실천할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다. 그런 지식은 AI에 접속하면 언제든 얻을 수 있다. 진짜 필요한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품격이다.
커피숍에서 나온 나는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예식이 거의 끝날 무렵, 한 정치인이 단상으로 나와 건배사를 했다. 그가 "잘살자"라고 선창을 하자 하객들이 일제히 "잘살자"라고 외쳤다.
그런데 잘살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잘살자'와 '잘 살자'가 그것이다. 비록 띄어쓰기 하나 차이지만 의미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잘살자는 부유하게 떵떵거리며 살자는 의미이다. 반면 잘 살자는 삶을 가치 있게 제대로 살자는 뜻이다.
그동안 우리는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잘사는 것에만 치중했다.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만큼 잘 사는 일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할 시점이다. 커피숍에서 만난 부자처럼 타인의 배려에 깎듯이 예를 표하는 고품격 언행을 스스로 실천하고 자녀들에게도 가르쳐야 한다. 베풀고 겸손하고 배려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정말 '잘살아 보세'가 아니라 잘 살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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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의 복구 비용
예전에 어떤 이의 행동을 꼬집는 글을 썼다가 호되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익명의 글이었으나 당사자는 본인인 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항의 전화를 받고서야 내 행동에 심각한 잘못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구차한 변명도 하고 사과도 했다. 그를 만날 때마다 깍듯이 인사했다. 몇 년이 흘렀는데도 그와의 관계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잘못을 범하기는 쉽지만 원상회복은 결코 쉽지 않다. 우선 잘못은 '고비용 행동'이다. 잘못을 저지르면 당사자에게 싹싹 빌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잘못은 한 번일지라도 사과는 여러 번 해야 한다. 정신적 비용과 복구기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는 그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과 같다. 못을 빼도 못 자국이 남듯이 뒤늦게 백배사죄를 해도 원상복구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잘못은 애초 저지르지 않는 게 상책이다.
비록 이전의 상태로 관계를 되돌리기 어렵더라도 사과를 포기해선 안 된다.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않고 넘어가면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공자는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잘못”이라고 했다.
한자 사과에서 사(謝)는 ‘면하다’, 과(過)는 ‘과오’를 의미한다. 지난 잘못에서 벗어나는 것이 사과라는 얘기다. 사과를 지칭하는 영어 apology는 그리스어 apologia에서 나왔다. ‘그릇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이다.
깨끗이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면 과오에서 벗어날 길이 열린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한다. 다만, 어리석은 자만이 잘못을 고치지 않고 고집한다.” 고대 로마 철학자 키케로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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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죽이는 병
지난 연휴 기간에 일본 다카마쓰에 다녀왔다. 사람들이 느리게 움직이는 중소도시였다.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오가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아내와 골목길을 걷다 한 가정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꽃과 나무들이 잘 가꿔진 아담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마당엔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가 배를 바닥에 붙인 채 한가로이 누워 있었다. 강아지는 우리의 인기척에도 본체만체 했다.
"저 강아지는 낯선 사람이 왔는데도 짖지도 않아." 아내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왜 그런지 알아? 연휴니까 강아지도 쉬는 거지." 마침 일본에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황금 연휴 기간이었다.
우리들은 참 바쁘게 산다. 바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만 실은 악덕에 가깝다. 왜냐하면 자신을 돌아보면서 삶을 성찰할 시간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암적 존재라는 말이 있다. 집단 내에서 악영향을 끼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암세포의 주된 특징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쁨이다.
인간의 신체는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을 위해 세포 분열을 계속한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일단 세포 증식을 멈추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세포 분열을 한다. 이것이 세포 사회에서 통하는 불문율이다.
이 규칙을 깨는 것이 암세포이다. 암세포들은 쉬지 않고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다. 이들에게는 휴지기가 없다. 자신의 영역을 넘어 다른 장기까지 침범해 빠르게 세포를 증식한다. 암세포에 짓눌린 정상 세포들은 제대로 살지 못하고 폐사한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 결국 장기 전체가 망가지는 지경에 이른다.
괴테는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향해 "악마처럼 바쁘다"라고 일갈했다. 젊은 시절에는 바쁨이 미덕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나이 들어서까지 바쁘다면 바람직한 삶으로 볼 수 없다. 자기 성찰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사는 것은 암세포의 삶일 뿐이다.
한자 바쁠 망(忙)을 보라. 마음 심(心)과 죽을 망(亡)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쁘게 서두르면 마음이 죽는다는 뜻이다. 바쁨은 마음을 죽이고 삶을 죽이는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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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는 자
수레가 삐걱거릴 때는 수레를 멈춰 세워야 한다. 왜 삐걱거리는지, 원인을 살피고 점검해야 한다. 만약 그대로 수레를 몰고 달린다면 바퀴가 빠지고, 자칫 수레가 전복될 수도 있다.
살다가 인생이 삐걱거릴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잠시 멈추고 삶을 점검하라는 경고음이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차근차근 돌아보면서 일이나 인간 관계를 다시 살펴야 한다. 만약 그대로 인생을 질주한다면 삶이 전복되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이규경 시인이 ‘용기’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용기를 내야 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못해요.
일이 마음에 내키지 않거나 옳지 않을 때 “나는 할 수 있어”가 아니라 “나는 못해”라고 단호히 말해야 한다.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도 용기이지만 도중에 멈추는 것 역시 용기다.
현대사회는 의욕 충만의 시대이다. 세상의 혼란과 온갖 악행은 용기 부족이 아니라 잘못된 용기의 과잉에서 빚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옳지 않은 길이라면 스스로 멈춰 서서 고독하게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설혹 백만 대군이 진군의 나팔을 불지라도 홀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용기 있는 자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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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감사하라
우리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다른 사람과 인사하거나 고마움을 표시할 때 “감사합니다”라고 응대한다. 이것은 대개 의례적인 감사일 뿐이다.
진정한 감사는 삶에 대한 긍정이다.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감사로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교통사고를 당해 결코 다시 걸을 수 없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십중팔구 가혹한 운명을 탓할 것이다.
삶에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다르게 행동한다.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 1995년 승마 도중에 낙마해 전신 마비가 되었다. 이후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그는 재단을 설립해 장애인과 척수손상 환자들의 권익 향상에 앞장섰다. 스크린 바깥 그의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슈퍼맨 모습이 아니겠는가.
감사는 삶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든 ‘예스(yes)’라고 말하는 것이다. 날씨가 춥든, 하루 종일 비가 내리든, 감기로 콧물이 나오든 자신에게 ‘예스’라고 외쳐야 한다. 그러면 마음속에 어두운 감정이 물러나고 밝은 감정이 샘물처럼 솟아날 것이다.
미국 작가 팻 로드거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슬픔에 ‘예스’, 두려움에 ‘예스’, 은밀히 속삭이는 갈망에 ‘예스’라고 말하세요. 사랑은 벽과 울타리를 한쪽으로 치워버리고 문을 열고 ‘예스’라고 말하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 대해 그저 예스라고 말하면 천국에 머물게 됩니다.”
‘노(no)’는 짜증의 먹구름을 몰고 오지만 ‘예스’는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게 한다. 자기 삶에 ‘예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진정한 감사의 세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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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우주에 간섭하지 마라
며칠 전 사무실에 있던 오디오 앰프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기존에 쓰던 중고 앰프는 집으로 갖고 와 아들 방에 두었다. 아들이 온라인 중고 사이트에 올려서 팔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저녁 늦게 아들이 큰 소리로 말했다. “왜 앰프를 내 방에 갖다 놨어요? 서재에 놓아야죠.” “아니, 네가 앰프를 봐야 하니까 거기에 둔 거지.” 아들과 말을 주고받으면서 판단과 감정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아들 방에 두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고 아들은 마땅히 서재에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두 사람의 판단은 다를 수 있다. 아무리 부모 자식이나 부부 사이라도 내밀한 기준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험과 기준이 똑같다면 그것이 더 기이하지 않은가?
우리는 타인의 의견이 나와 다르면 곧잘 불만을 드러낸다. 왜 나와 다른 판단을 하느냐, 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지 않느냐고 언성을 높인다. 그것은 서로 다른 각자의 경험과 기준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다.
같은 생각, 같은 판단을 하려면 두 사람 사이에 내면의 기준이나 경험이 동일해야 한다. 타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데이터를 지운 후 거기에 내 데이터를 입력해야 가능한 일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타인은 나와 다른 별개의 우주이다. 그 우주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로선 알 수 없다. 그것을 나와 똑같이 만들려는 것이야말로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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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탐욕 사이
우리가 흔히 혼동하는 말이 열정과 탐욕이다. 탐욕이 자주 열정의 옷을 입고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물의 겉모습만으로 판단을 하므로 탐욕의 실체를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이가 자신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면 그가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쉽게 단정한다. 열정과 탐욕은 다같이 자신의 꿈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탐욕적인 사람의 관심은 늘 바깥으로 열려 있고, 열정적인 사람은 내면을 향한다. 탐욕적인 사람이 더 많이 갖는 것을 지향한다면 열정적인 사람은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한다. 전자는 더 많이 갖기 위해 타인을 밀어내지만 타인과의 나눔을 미덕으로 여긴다.
열정을 가리키는 영어 ‘enthusiasm’은 그리스어 ‘entheos’에서 나왔다. ‘내재하는 신(a God with)’이라는 뜻이다. ‘내 안에 신을 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월적 경지에 이른 정신 상태가 열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열정적인 사람은 자기 안에 신이 내재하고 있기에 신처럼 행동한다. 내면에 신을 품은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낮춘다. 반면 탐욕적인 사람은 우월감에 취해 타인을 얕본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느라 그의 입은 잠시도 쉬지 못한다.
꿈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욕심이 되어선 안 된다. 나이 들어 욕심을 부리면 노추(老醜)가 되지만 열정적인 사람은 청년처럼 언제나 젊다. <배연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