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내 유일의 5층 목탑
국보 제55호
- 공식명칭 : 보은 법주사 팔상전 (報恩 法住寺 捌相殿)
- 지정일 : 1962.12.20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면적 : 1기
- 시대 : 조선시대
- 주소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법주사 (사내리)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인도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승려 의신이 처음 지은 절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화재청]
법주사(法住寺)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는 글자 그대로 법(法), 즉 부처님의 말씀이 머무는 절집이라는 뜻이며 신라 진흥왕때에 의신 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오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보면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하며, 진표 율사가 그 후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房)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으며 그 때 진표 율사가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하였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는데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 스님이 미륵불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진표 스님의 법을 받은 영심 스님 등도 마찬가지로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즉, 현재의 법주사는 (진표 율사의 말씀에 따라) 영심 스님등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보며,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 시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지금까지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법주사]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충렬왕, 충숙왕에 이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하던 공민왕도 법주사에 들려갔으며 공민왕은 이때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으니 지금도 능인전 뒤쪽에 사리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 세조때에는 신미대사와 특별하게 지내던 세조가 이곳에 행차할때 임금이 타던 가마인 연(輦)이 나뭇가지에 걸릴듯하자 스스로 번쩍 들어주어 무사히 지나가게 해 준 소나무에 정이품을 제수했다는 정이품송이 절 못미처에 지금도 잘 자라고 있으며 멀지않은 곳에 부인 소나무로 불리우는 정부인 소나무도 있어 흥미롭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법주사 대부분이 불타버리고 소실되었으나 1605년(선조 38)부터 1626년(인조 4)에 걸쳐 사명(四溟) 대사 유정(惟政) 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하였으며 이후 벽암 각성(碧巖覺性) 스님의 대대적인 중창불사와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지원으로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종때에 미륵장륙상이 있는 2층건물 용화보전이 헐렸으며 근대이후에 미륵불 조성사업이 시작되었으나 조각가의 요절로 중단되었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으로 완성은 하였으나 시멘트로 만든 미륵불이었으니 1990년 청동미륵대불을 완성하고 다시 2002년에는 개금불사를 마무리하니 지금의 금동미륵대불이다.
금년 6월 법주사는 우리나라의 열세번째 세계유산 '한국의 산사' 7곳에 포함되어 자랑스런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팔상전(八相殿)
국보 제55호 법주사 팔상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오층목탑이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황룡사 구층탑도 목탑이었으며 최근까지는 화순 쌍봉사 대웅전인 삼층목탑 (보물 제163호)이 있었으나 1984년 실화(失火)로 소실된후 다시 지어 현재로서는 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하다.
▲ 국보 제55호, 법주사 팔상전.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때 불타버린후 사명대사 주관으로 인조 4년(1626)에 다시 지어졌다. 이후 1968년에 완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층과 2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가 5칸, 3층과 4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가 3칸, 5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가 2칸의 정방형으로 되어있으며 4층까지는 주심포방식이나 5층은 다포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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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상전 내부구조는 3층까지는 한 통으로 트인 상태이며, 가운데 심주석을 둘러싼 네개의 기둥을 막아서 벽을 만들고 각각의 벽면에 팔상도 그림을 2장씩 붙였다. 그림 앞에는 불단을 짓고 오백나한산을 몇줄로 둘렀으며 동쪽에서 시계방향으로 남, 서, 북쪽으로 돌아가면서 팔상도 그림을 순서대로 배치하였다. 위사진에서 왼쪽은 시작하는 동쪽으로 탄생을, 오른쪽은 끝나는 북쪽으로 누워서 열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팔상전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을 8개로 나누어 그린 그림, 즉 팔상도를 봉안한 전각을 말하는데 여기서 여덟가지 장면 팔상(八相)은 첫째, 도솔천에서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도솔내의상(兜率來儀相), 둘째, 룸비니동산에서 탄생하는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셋째, 태자시절의 석가모니가 성문을 나서 세상을 관찰하는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넷째, 성을 떠나 출가하는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다섯째, 눈 덮인 산에서 수도하는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여섯째,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일곱째, 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을 하는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여덟째,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등이다.
현재 법주사 팔상전은 1층 네곳의 출입구를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서 네 벽에 붙은 팔상(八相)을 한바퀴 돌아보며 모두 친견하거나 예불을 드릴수 있으며 5층 지붕위 상륜부는 인조때 재건한 모습 그대로 온전하다고 하는데 높이 관계로 상세히 살필 수는 없었다.
또한 팔상전 2층에 걸린 현판에는 八相殿이 아니라 捌相殿이라고 씌어 있는데 捌은 '깨뜨릴 팔'이다. 이를두고 여덟그림이라는 팔상(八相)외에 相, 즉 고정관념을 내려놓아라, 깨뜨려라 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글씨를 씀에 있어 나중에 가필등으로 변할수 있는 특히 숫자에 관련된 글씨, 예컨대 一 二 三 등을 壹 貳 參으로 쓰는 것처럼 八도 捌이라 쓴것이며 이를 함부로 고치지 못하게 복잡한 글씨로 쓰는 갖은자라고 한다니 참고 할 일이다.
▲ 팔상전 2층에 걸린 현판, 八相殿이 아니라 捌相殿으로 씌어있는데 너무 낡아서 육안 식별이 어렵다. 부득이 문화재청 사진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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