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민주화운동본부가 북한에 ‘풍선 삐라’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2004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를 이끌고 있는 박상학 대표는 일가족 5명이 1999년 가을 탈북해 2000년 봄 한국에 들어왔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애드벌룬팀장 박영학씨는 박 대표의 친동생이다. 기독탈북인연합회 이민복 대표는 북한 농업과학기술원 출신의 과학자로 1995년 탈북했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측은 처음에는 문방구에서 파는 풍선을 이용했다. 북풍(北風)이 불 때 DMZ 근방에 접근해 풍선에 삐라 봉지를 매달아 날려보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인력과 비용이 많이 드는 데 비해 효율성이 떨어졌다. 풍선이 기류를 타기 위해서는 3000~5000m 상공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이 풍선은 중간에서 터지는 경우가 발생했다. 국방부에서는 대형 풍선을 만들어 띄우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궁(窮)하면 통(通)한다고 했던가. 대형 풍선을 띄우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은 과학자 출신의 이민복 대표였다. 수소가스를 이용해 대형 비닐로 애드벌룬을 만들었다. 헬륨가스를 이용하면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비용 때문에 포기했다. 이 대표는 삐라 부대가 3단계(단거리, 중거리, 장거리)로 터지도록 타이머를 개발했다. 공중에 떠오른 지 30~40분 지나 터지는 게 1단계로 DMZ 부근의 인민군용이다. 2단계는 DMZ를 너머 평양 이남에서 터지도록 되어 있고, 3단계는 평양 시내 한복판을 겨냥한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측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지난 1년간 한국 정부에 10차례 ‘삐라 풍선’에 대해 항의했다고 한다. 이민복 대표는 “이런 반응은 그 어떤 것에도 꿈쩍하지 않던 (북 당국이) 삐라 풍선으로 치명상을 받고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남북한은 40년 이상 서로가 서로에게 체제선전용 삐라를 날려보냈다. 탈북자의 말을 종합하면, 그 동안 군 당국이 날려보낸 삐라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대로 1970~1980년대 북한체제가 나름대로 안정되어 있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삐라의 내용이 북한 실정과 맞지 않게 기술되었거나 지나치게 자본주의 냄새가 강했기 때문이다.
이민복 대표는 “특히 삐라의 내용에 영어식 표기를 남발했다는 것이 문제였다”면서 “이것은 오히려 북한 주민으로 하여금 남한이 미제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북 당국의 주장을 믿게 했다”고 말한다.
Hungary를 우리는 ‘헝가리’라고 표기하지만 북한에서는 ‘웽그리아’라고 쓴다. 또한 World Cup을 한국에서는 월드컵이라고 하지만 북한에서는 ‘세계축구선수권대회’라고 쓴다. 그 동안은 북한에서 실제 쓰는 언어로 삐라를 만들지 못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과거 대북 삐라를 작성하는 군 당국에 탈북자 출신은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자리에 모인 '삐라 풍선'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학 팀장, 박광일 사무국장, 박상학 대표, 이민복 대표
그렇다면 현재 탈북자가 작성한 삐라는 어떻게 다른가.
북한민주화운동본부가 만든 삐라에서 ‘녀배우 성혜림과 김정일’의 일부 내용을 옮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