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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내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한결
꿈과 시련과 비전을 준 한내
한결
첫째 이야기 : 한내라는 이름
한내는 그 이름부터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예천 시가지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을 한천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한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한나라 한(漢)자에 내 천(川)자를 써서 한천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우리 조상들이 중국을 대국이라 부르며 중국과 비슷한 것만 있어도 중국의 지명을 본떠 부르는 사대사상에 빠진 결과입니다. 우리나라를 중국의 축소판 정도로 생각하였고 중국의 지명을 딴 이름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떠 올리면서 한천을 한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로 고쳐 부르게 되니 참 정감이 넘치고 속 뜻이 깊은 말이 되었습니다.
한내를 시멘트로 정리하기 전에는 맑은 물이 흘러가는 냇물이었습니다. 시내의 생활하수가 흘러들지 않는 드물게 보는 참 맑은 냇물입니다. 갈대와 자갈과 모래톱이 곱게 어울러진 한내에는 피라미와 붕어와 모래무지와 쉬리가 놀고 일급수에서만 자라는 버들치와 가재와 자라가 있었고 가끔 은어도 올라오는 시내였습니다.
글모임 이름을 한내라고 부르니 한내처럼 맑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맑고 깊이 있는 글들이 많이 발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말은 생각을 나타내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생각을 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고 합니다. 한내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글이 좋아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였습니다. 모두 발표하는 글들이 진솔하고 맑았습니다.
한내사람들은 우리말을 누구보다 사랑하며 임원도 모두 우리말로 바꾸어 앞일꾼 막일꾼 살림꾼으로 불렀습니다.
한내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처럼 옳곧고 온전한 정신이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둘 째 이야기 : 한내글모임의 출발
한내글모임을 처음 만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서 30년이 지났습니다.
그 때 아동문학평론을 하시는 최지훈님을 예천교회에서 만났습니다. 고요라는 아호를 쓰는 분이었습니다. 당시 예천농업고등학교 국어선생으로 오셨습니다. 일을 좋아하고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도 일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랍비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저녁 예배 후에는 교회 사무실이나 집에 모여 친교를 나누며 대화를 즐겼습니다. 그 때 최지훈님에게 제가 문학 모임을 만들 것을 제안했습니다. 단박에 의기투합되어 회원 모집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당시에는 선뜻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작위로 각급학교와 관공서에 편지를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받는 사람 이름도 쓰지 못하고 '문예 담장자'와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1981년 12월 2일 오후 3시에 예천읍사무소 위에 있는 고려다방에 모이기로 하고 출입문이 잘 보이는 자리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습니다. 열 명 쯤은 모일 것이라고 하며 출입문에 신경을 쏟고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당시 호명초등학교 교사인 심천보님이 오셨고 곧 향석초등학교 교사인 김성옥님이 오셨습니다. 문을 들어서자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모임에 오신 것을 알았지요.
인사를 나누고 얘기가 시작될 무렵 용문중학교 교사인 김소내님이 도착했습니다. 집안에 볼일이 있어 늦었다고 게면적은 웃음을 지으며 도착했습니다. 반갑기 그지없었습니다. 한참을 더 기다렸지만 더 오시는 분은 없었습니다.
한내는 그렇게 다섯 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회보를 내기로 뜻을 모으고 글을 프린트하여 다시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며칠 후 다시 모여서 이름은 한내로 정했습니다. 고요님은 한내에 글모임을 붙이자고 했습니다. 한내글모임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그전에 몇몇 교사들이 모여서 예천 학생들의 글을 모아 교육청에서 발행한 ‘한냇가 이이들’이란 책이 있었습니다. 1968년으로 기억합니다. 손남주 시인 최진연 시인과 같이 만든 문집이었습니다. 제가 표지를 그리고 글도 발표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책이 지금도 보고 싶습니다. 그 문집을 보관하고 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한내글모임은 아동문학을 하는 김순 님을 첫 앞일꾼으로 모시고 막일꾼과 꾸밀이는 최지훈 님이 맡았습니다.
최지훈 님은 그 후 경주여고로 전근 가셨다가 두산그룹이 출판사를 인수할 때 사전 편찬 일에 스카웃되었고 이후 김형석교수와 국민독서운동본부에서 일했으며 지금은 '왜옥동네의 전설'이라는 대하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해방전후 대구를 무대로 한 소설이며 오늘로 267회를 집필하여 페이스북과 메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셋째 이야기 : 한내글모임의 활동
글을 모아 12월에 프린트판으로 첫 회보를 내었습니다. 일을 좋아하는 고요님은 이 일에 온 열정을 쏟았습니다.
최지훈님은 회보를 예천의 학교와 전국에 발송했습니다. 회보로 우리 모임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회원들도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세운다실에서 회원들의 첫 시화전을 가졌습니다. 회원들의 시에 제가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시절은 다방에서 문화행사가 많이 이루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어 회보는 계속 발간되었고 몇 번 더 시화전을 가졌습니다.
두번째 글모음 '우리네 꺽꺽한 사투리로 부르는 노래' 내면서 '옹기와 바가지에 담은 시'라는 독특한 전시회도 가졌고 회원들의 시를 돌에도 써 보았습니다. 특히 옹기 제작과정에서 찰흙으로 그릇을 빚고 어느정도 건조된 다음 잿물을 올리고 말리는 과정에서 싸리꼬챙이로 시를 새기듯이 쓴 작품은 우리들의 창안으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건조 후에 구우면 글씨 부분은 붉은 빛이 나고 바탕은 옹기빛을 띄는 작품이었습니다. 차도 없던 시절 안동과 상주로 옹기동막을 찾아가서 밤을 지새우며 작업했습니다. 작품도 잘 팔리었고 그 작업은 몇 번 계속하였습니다.
1982년도에는 예천지방 학생을 상대로 문학강좌를 가졌습니다. 여기 모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벗글모임이 조직되어 청소년 문화에도 관심과 애정을 가졌습니다. 회원들이 한벗 담당을 하면서 오랫동안 청소년에게 꿈을 주는 일을 했습니다.
모임이 만들어진 3년째 되던 해에는 ‘아직도 진달래꽃 부끄러운 이 땅’이라는 문집을 내었습니다. 우리 책을 갖는다는 감격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 후 해마다 문집을 내었고 문학 활동을 계속하는 중에 몇 가지 시련이 있었습니다.
회원들 중에는 전교조운동에 뛰어든 분도 있었고 우리는 예천문화를 위해 다른 모임과 연합하여 예천문화예술제라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나중에는 독특한 지역문화제로 자리매김하고자 예천아리랑제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올해로 열아홉번 째 갖는 축제입니다. 그러나 예천의 독특한 문화제로서의 자리를 잡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강릉단오제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이야기 : 한내의 시련과 모함
참으로 힘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교육청 관계자와 조사한 경찰관과도 함구하기로 약속한 일입니다만 이제는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밝혀도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예천우체국 소인이 찍힌 우편물이 전국의 중고등학교 역사교사 앞으로 배달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을 한 사람을 한내글모임으로 지목했던 것입니다. 저는 그 편지와 내용을 아직까지 본 적도 없습니다.
그 때 한내글모임 앞일꾼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일과 중에 학교로 두 분의 형사가 찾아와 숙직실 건물에서 줄입문을 안으로 잠그고 약 두 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습니다.
저의 집을 샅샅이 뒤지고 몇 권의 책을 갖고 갔습니다. 오적이 실린 김지하의 시집과 한내 회보와 책도 가지고 갔습니다. 다시 경찰서에 불려가 받은 질문을 또 다른 수사관에게 앵무새처럼 대답해야했습니다. 당시는 모기관에서 남자를 여자로 만들거나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외에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오공시절입니다. 한결같이 사실과 진실만을 말했습니다.
질문에 대답이 서툴거나 다르게 나오면 조사관들은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진실만을 말했습니다. 교육청에서도 덩달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는 무혐의처리가 되었지만 당시 교육청에 있던 분이 한내사람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실명을 거론하며 그들은 사회주의 좌경사상에 깊이 물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분도 비슷한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조사를 받으며 문학활동과 문학작품으로만 생각하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 후 저에게 붙여진 이름은 빨갱이였습니다. ‘요시인물 제1호'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요시인물이란 요시찰인물의 약자입니다. 예천에 저와 같은 연배의 교직 친교모임이 있는데 빨갱이는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직도 그 모임에서는 저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학교장은 전교조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람이라면서 그런 활동할려면 학교를 나가라고 했습니다. 사실을 말해도 변명이라고 했습니다. 명문학교를 만들기 위하여 기숙사의 전신인 청운실을 만들어 운동선수를 훈련하듯 공부선수를 길러 학생들의 대학진학에 획기적인 제도를 만들었고 교직을 천직으로 알며 일하던 것이 한 순간에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이 일은 당시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저의 집사람 귀에도 들어가 모든 일을 의심하고 예천으로 다시 내려오게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집사람도 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저는 선천적으로 반골은 못 되고 긍정과 참여에서 발전이 있다고 믿는 교회 장로이며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제일 좋은 제도로 믿고 있습니다.
지도자의 자질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저 문학이 좋아 모였고 예천을 위해 예천문화를 위해 일하며 평생 바친 교직의 꿈을 의심과 모함을 받고 좌절한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직도 그 누명(?)과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 무서운 세상이었습니다.
다섯째 이야기 : 남은 삶을 위하여
저는 개인적으로도 참으로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우리시대에 가난은 누구나 누린 이야기입니다만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저는 가난을 벗어나고자 무진 애를 쓰고 살았습니다. 독학으로 공부도 했고 취미겸 부업으로 방안에서 병아리도 길어보았으며 돼지도 길러보았습니다. 카드와 연하장을 수공으로 만들어 전국의 백화점과 문방구점에 납품한 일을 몇 년 간 했습니다. 학교 교재원에서 만난 꿀벌에 매료되어 아직도 양봉을 하고 있습니다.
알뜰히 살았고 열심히 살았지만 화재로 재산과 명예가 하루아침에 불타버리는 일도 당했고 교통사고로 다리가 세 동강이 나고 장출혈이 있어 죽음 가까이 가 보았고 1년 가까이 병원에 있어야 했습니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희귀암인 신우암으로 콩팥 하나를 떼어내고 방광을 도려내는 큰수술에 이어 암투병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위로와 기도 사랑과 권면도 받았습니다. 제가 받은 분에 넘치는 사랑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리오. 그저 감사하며 남은 인생 열심히 사는 것이 그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퇴직 후에 무엇을 하며 살까 고민하며 글도 써보고 그림도 그려 인터넷에 올려보았습니다. 글과 그림에는 별 호응이 없었으나 꿀벌에 관한 글을 올렸드니 벌떼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꿀벌에 관한 주별 관리법을 써서 인터넷 카페에 발표했습니다. 개조식 설명문이랄까, 제목과 소제목을 붙여 편지형식으로 발표한 글은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발표한 글을 모아 ‘양봉52주’라는 책과 ‘꿀벌편지’라는 책을 내었습니다. 초판 수정판에 이어 개정판 3쇄를 내었고 수만 권이 팔렸습니다.
한국양봉학회 이사가 되고 농촌기술센터 농업기술원 농촌진흥청 대학과 대학원에 강의도 나가게 되었습니다. 몇몇 교회에서도 간증했습니다.
아직도 강의요청이 오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정원 같고 공원 같이 아름다운 우리 나라,
이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되는 비전을 보면서 꿀벌치는 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했습니다. 국토밀원화운동을 제안했고 양봉용어 우리말쓰기운동과 품질향상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바탕은 한내글모임에서 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귀한 분들과 문학과 세상이야기를 나누었고 문학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시를 쓰고 수필을 쓰고 글을 다듬는 훈련을 했습니다. 양봉 52주를 쓰게 된 힘을 한내글모임에서 갈고 닦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맑게 흐르며 제길을 가는 한내처럼 회칙도 없이 30년을 맑게 흘러온 한내글모임!
이제는 강해원 님 같은 소설가도 자리하고 있고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며 주옥 같은 시를 쓰고 글을 쓰는 귀한 분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수준 높고 그윽한 향기와 정감이 넘치는 글을 대할 때마다 기쁨과 감격에 잠겨봅니다.
한내글모임은 예천의 긍지요 자존심입니다. 자만심을 가져도 될 귀한 모임입니다. 고희를 살아가는 저에게 힘과 보람을 있게 한 한내와 한내사람들입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한내글모임이라는 이름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하나의 작은 문학동인으로 인식됩니다. 예천문인협회와도 유대를 갖고 활동하시면서 문향 가득한 예천을 만들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저는 문기있는 글을 쓰지 못하고 한내를 떠나 있지만 한내에서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습니다. 꿈과 비전과 글 쓰는 버릇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보람을 누리게 만들었습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과 국가는 쇠퇴의 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가진 비전이 삶을 이끌어 갑니다. 비록 오늘은 초라할지라도 비전을 가진 사람의 앞날은 찬란하게 펼쳐지게 됩니다. 오랫동안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에게는 벅찬 감격의 날들이 반드시 오게됩니다. 진실과 비전의 열차는 연착을 하더라도 감격을 싣고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한내사람들, 모두들 서로 존중하고 격려하면서 꿈과 비전을 갖고 오늘도 좋은 글 많이 쓰시길 바랍니다.
참 좋은 세상입니다.
( 2011. 12. 10. 한결)
첫댓글 한내 참 추억의 곳입니다.
아카시아꽃 따먹다가 순시원_엄청 무서웠지요_에게 쫓겨 냇물로 내려와 고기잡고 목욕도하고
겨울이면 썰매타고 놀던 곳이었지요.
장로님 !
" 한내 " 의 내력을 잘 얘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등시절 방과후 냇물에서 참외 (공놀이) 하나 수건 (송사리 잡이) 들고 놀다가 쉴 참에는 모래성 쌓아 집짖고 크로바 뜯어 물김치 담고하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장로님 ! 좋은 추억 되세길수있는 시간주셔서 감사합니다
권사님과 건강하세요
- 대구 장권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