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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4월 13일(목요일) 강화 나들길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길 탐방일정
회비 : 21,000원 4월5일 결제 완료, 22번 좌석 예약
탐방지 : 강화 나들길 제1코스 심도역사문화길
['강화나들길'은 심도기행에서 출발했다. 2005년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화남 고재형 선비의 '심도기행'을 강독하는 모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선비가 나귀를 타고 다녔던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강화나들길을 있게 한 시초였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은 과거에 급제는 하였지만,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은 선비였다. 그는 당시 강화군의 17개면 100여 마을을 나귀를 타고 다니면서 두루 다 돌아보고 그 감상을 256편의 시와 산문으로 남겼다. 자신이 사는 두두미마을을 시작으로 해서 노정(路程)의 순서대로 글을 썼으니 '심도기행(沁都記行)'이 바로 그것이다.
심도(沁都)는 강화의 옛 지명이다.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온 고려 무신정권은 39년 동안 난리를 피해 강화에서 살았다. 그때 강화의 인구는 삼십만 명이 넘었고 개경의 궁궐을 본떠서 강화에도 궁궐을 지었다. 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으며 부처님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 조판도 시작했다.
심도의 '도(都)'는 39년간 한 나라의 도읍이었음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강화도 사람들은 강화가 한때 나라의 수도였음을 상기하며 지금도 강화를 강도(江都)라고 부르기도 하며 강화가 심도였음을 잊지 않는다.
강화나들길 1코스의 이름은 '심도문화 역사길'이다. 이름 그대로 강화의 문화와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길이다. 강화터미널에서 출발해서 갑곶돈대에서 끝나는 이 길은 약 18km의 길이며 소요 시간은 휴식 시간과 점심시간을 포함해서 약 6시간 가까이 걸린다.
이외에도 강화 동쪽 해안에 설치된 돈대를 따라 걷는 '호국돈대길'을 비롯해서 고려 왕릉을 보러 가는 '능묘 가는 길', 또 갯벌과 철새를 보러 가는 길 및 강화도령 첫사랑길, 고인돌을 만나러 가는 길 등 14개의 나들길이 길꾼들을 유혹한다. 또 강화본섬에 딸려있는 석모도와 교동도 그리고 주문도와 볼음도를 걷는 6개의 나들길이 더 있다. 이렇게 해서 현재 강화나들길은 총 20개의 길이 있으며, 앞으로도 좋은 길이 더 개발될 것이다.
강화나들길 1코스는 철종 임금의 잠저인 용흥궁과 또 고려 시대의 궁궐터,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강화성공회 성당 및 강화산성의 북문을 지나간다. 그리고 정묘호란 때 청나라와 화의를 맺은 연미정까지 걸어가면 대개 점심 먹을 시간이 된다. 연미정은 강화에서 풍광이 아름답기로 옛 부터 소문이 난 곳인데 요즘 사람들에게는 북한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연미정을 출발해서 갑곶돈대를 향해 길을 나선다. 갑곶돈대는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돈대로써 강화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강화는 한양으로 들어서는 들머리였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강화 바닷가를 따라서 수많은 군사시설을 만들었으니 갑곶돈대도 그 중의 하나다.]
탐방코스: [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동문~성공회 강화성당~용흥궁~고려궁지~강화향교~은수물~북문~북장대~오읍약수~연미정~월곶돈대~옥개방죽~갑곶성지~갑곶돈대 안내소 ] (약 18km/6시간)
일시 : 2023년 04월 13일(목요일)
날씨 : 높은 구름이 낀 날씨 [강화군 : 최저기온 6도C, 최고기온 16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50분 소요)
07:00~09:00 “좋은사람들” 버스를 타고 양재역 12번 출구 전방 국립외교원 앞에서 출발하여 인천 강화군 강화읍 중앙로 43 번지에 있는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로 이동
[2시간 소요]
* 09:00~09:20 인천 강화군 강화읍 중앙로 43 번지에 있는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에서 탐방출발하여 강화산성의 동문인 망한루(望漢樓)로 이동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로 천도한 고려 조정은 강화도를 방어 요새로 구축하고자 하였다.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강화의 성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 방어 체계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둘레 약 1.2㎞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34년(고종 21) 1월부터 축조되었다. 중성은 둘레 약 9㎞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50년(고종 37)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축조되었다. 외성은 강화도 섬을 두른 토성으로 1233년(고종 20)부터 쌓기 시작하여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이 세 개의 성은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할 때 모두 헐렸다.
조선 초에 고려 때의 내성을 축소하여 석성(石城)을 축성하였으니 지금의 강화산성이다. 그러나 강화산성은 1637년(인조 15)에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청나라 군사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1677년(숙종 3)에 강화유수 허질(許秩)이 고려 때의 내성 규모로 크게 고쳐 쌓았다. 1709년(숙종 35)에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중수한 뒤에도 조선 말기까지 계속 보수하였다. 이 때 성벽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도 두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무너진 상태이다. 성 안에는 남장대(南將臺)·북장대(北將臺)·서장대(西將臺) 등의 장대와 2개의 수문이 있었다.
1970년대 시행된 강화전적지 정화사업을 통하여 1975년에는 남문 안파루(晏波樓), 1977년에 서문 첨화루(瞻華樓)와 북문 진송루(鎭松樓) 등을 복원하였고, 2003년에 동문 망한루(望漢樓)를 복원하였다.]
* 09:20~09:30 대한제국기에 건립된 한옥 형태의 성당인 강화 성공회 성당으로 이동
[언덕 위에 지어진 강화 성공회 성당은 터키 아라라트(Ararat)산의 구원의 방주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성공회 제3대 주교 트롤럽(Mark Trollope)이 설계하고 감독했다. 백두산 원시림에서 적송을 뗏목으로 엮어 운반해와 지었다. 고려 때는 궁궐 터였고 1894년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 학당 군사교관 콜웰(W. H. Callwell) 대위의 관사가 있었던 땅이다. 건물 측면과 뒷면의 아치형 출입문 4개는 영국에서 가지고 들어왔다. 건물 앞마당 오른편에 커다란 보리수가 한 그루 서 있다. 영국에서 돌아오던 신부가 인도에서 10년생 묘목을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수령이 100년이 넘었다. 확실치 않지만 나무를 심은 이는 트롤럽이었을 추정한다. 건물 왼편에는 자유분방하게 가지를 뻗은 회화나무가 서 있다. 학자수라고도 불린다. 보리수는 석가모니의 득도를 상징하고 회화나무는 유교의 선비를 상징한다. 성당 건물은 두 나무 중심축에 자리 잡고 있다. 먼저 전래되어 뿌리내린 종교들과 융합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 09:30~09:35 철종 임금의 즉위 전 강화도 거주 주택이었던 용흥궁(龍興宮)으로 이동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 09:35~09:40 사진촬영
* 09:40~09:55 강화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로 이동
* 09:55~10:10 강화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 탐방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사용하던 궁궐터다.
1232년(고종 19) 6월 강화에 궁궐을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현재 강화 고려궁지라고 부르는 곳이 정궁(正宮)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그러나 1270년(원종 11)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강화 고려궁은 정궁의 지위를 잃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1631년(인조 9)에 고려궁지에 행궁을 건립하여 국난시 이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강화유수부, 외규장각(外奎章閣), 장녕전(萬寧殿), 만녕전(萬寧殿) 등을 세웠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거의 소실되었다. 현재 조선시대 관아 건물인 명위헌(明威軒), 이방청(吏房廳) 등과 복원된 외규장각이 남아 있다.]
* 10:10~10:35 강화 향교로 이동
* 10:35~10:40 사진촬영
* 10:40~10:45 은수물로 이동
[강화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물의 약수터로 오랫동안 지역 여인들의 빨래터로 쓰이던 곳이다. 물도 맑고 시원하여 목을 축이기도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인근에 강화여고 기숙사가 신축되어 물줄기가 지대가 낮은 쪽으로 바뀌는 바람에 약수터에 거의 물이 말라 있다.]
* 10:45~11:10 강화산성의 북문인 진송루(鎭松樓)로 이동
* 11:10~11:20 강화산성의 북장대로 이동
* 11:20~11:25 사진촬영
* 11:25~11:30 오읍약수로 이동
[강화도 오읍약수터는 고려 고종이 강화도에 머물 때 극심한 가뭄으로 고려 장정들이 목이 말라 시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청천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바위가 깨지면서 샘물이 솟아나 역군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는 하늘이 어여삐 여겨 도와준 것이라 믿고 있다고 한다. 이에 제를 지내던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다섯오’에 ‘울 읍’자를 써 오읍(五泣)약수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오읍약수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 11:30~11:50 간식
* 11:50~12:50 1627년 정묘호란 정묘호란 때 청나라와 강화조약을 맺은 장소인 연미정(燕尾亭)으로 이동
[월곶돈대 꼭대기에 세워져 있는 정자인 연미정은 강화에서 풍광이 아름답기로 옛날부터 소문이 난 곳인데 요즘 사람들에게는 북한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옛날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는 이 정자 아래에서 만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썰물 때는 물이 빠져 나가는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물살이 세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정(燕尾亭)이라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연미정의 달맞이는 강화8경의 하나이다.
연미정은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후 조선은 오랑캐라 여겨온 청나라를 형제처럼 대우해야 하는 굴레를 지게 된다.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제23대 왕 고종이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중종(1510)이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병마절도사와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황형(黃衡) 장군(1459~1520)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황형 장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연미정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아왔고 최근까지만 해도 황 씨 집안 소유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연미정 옆에는 원래 수량 500년이 넘은 2그루의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2019년 9월 태풍 링링의 영향으로 북쪽 느티나무가 부러졌는데, 느티나무 뿌리와 줄기 자체는 살아있어서 현재 새싹이 다시 나고 있다.]
* 12:50~12:55 사진촬영
* 12:55~13:00 연미정 옆에 위치한 월곶돈대로 이동
[강화 5진 7보 중 하나로 남쪽으로는 강화해협인 염하와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의 하구인 조강이 서로 만나는 지점 중 강화도 쪽 돌출부인 월곶에 자리한다. 이 월곶돈대는 서해에서 한강, 임진강 두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조선시대 해상 교통로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매우 번성한 포구였다.
이 돈대는 숙종 15년(1679) 당시 강화유수 윤이제가 정비한 돈대로 전체적인 모양은 타원형으로 둘레가 148m에 이른다. 돈대의 동서양방향의 폭은 약 47m, 남북방향의 폭은 약 38m이다. 해안 방향으로 3구의 포좌가 있으며, 문루인 해조루까지 성벽으로 연결되어 강화 외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돈대의 출입문은 홍예식이며 지대석 위에 홍예기석 1단을 놓고 그 위에 홍예석과 선단석으로 형태를 갖추고 성벽은 사각으로 다듬은 돌로 11단을 쌓고 미석을 두지 않고 총안 1구를 갖춘 여장을 두었다.
돈대 내에는 연미정(인천시 유형문화재)이라는 정자가 있다. 강화해협과 조강의 물결모양이 마치 제비의 꼬리 같다고 해서 제비 ‘연(燕)’, 꼬리 ‘미(尾)’자를 써서 연미정이라 부른다. 팔작지붕의 겹처마로 10개의 장초석 위에 기둥을 얹은 민도리집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벽체는 두지 않았다. 북쪽으로는 개풍군, 동쪽으로는 문수산이 한눈에 들어와 아름다운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다.]
* 13:00~13:30 옥개방죽으로 이동
[옥개방죽의 수로는 저어새와 황로 등 철새가 자주 오는 곳이다. 옥개는 옥같이 맑은 냇물이란 뜻이다.]
* 13:30~14:30 갑곶 순교성지(甲串 殉敎聖地)로 이동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문헌상에 나와 있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터를 매입한 후 2000년에 순교성지로 조성하였고,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박순집의 묘를 이장하였다. 박순집은 참수 희생자는 아니지만 목숨을 걸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보호한 인물이다. 갑곶순교성지는 순교자묘역과 박순집의 묘, 성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14:30~14:35 사진촬영
* 14:35~14:40 강화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었던 갑곶돈대로 이동
[갑곶돈대는 강화8경 중 2경에 해당하며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무려 38년 동안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다.]
* 14:40~14:45 사진촬영
* 14:45~14:50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225-9 번지에 있는 갑곶돈대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4:50~15:00 휴식
15:00~17:00 “좋은사람들” 버스를 타고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225-9 번지에 있는 갑곶돈대 주차장을 출발하여 서울 양재역으로 귀경 [2시간 소요]
강화 나들길 제1코스(심도역사문화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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