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할 배은 암덕 (尹) 아무개는 지체와 문벌이 있는 무변이었다. 성질이 아주 악독하고 경망하였지만 글재주가 약간 있어 시임 재상들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재상들 사이에서 제법 인정을 받았다.
윤무변이 전라도에 있을 적에 마침 거상중이라 생활이 곤궁해서 지내기가 어려웠다. 동리에 마침 잘 아는 사람이 개성(開城) 상인과 돈거래를 트고 있었으므로 윤무변은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 사람은 80냥 짜리 어음을 써 주면서 개성 상인의 처소로 가서 찾아 쓰게 했다. 윤무변은 그 어음에 쓰인 열 십(十) 자를 일백 백(百) 자로 살짝 고쳐 8백 냥으로 꾸며서 서울로 올라가는 전주의 공납전(公納錢)과 바꾸어 사용하였다.
환전(換錢)할 시기를 놓치자 전주감영(全州監營)에서 사실을 조사하였는데 마침내 무변의 소행이 드러나게 되었다.
박윤수(朴崙壽)가 당시 전라감사로 있었는데 진영(鎭營)의 교졸(校卒)을 풀어 윤무변을 잡아 들이라는 뜻의 엄명이 떨어졌다. 교졸들이 들이닥치자 무변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어음을 써주었던 사람이 윤무변에게 와서 말했다.
“노형의 당초 소행은 아주 불미하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된 바에 노형은 전직출신인데 전직출신으로서 한 번 진영에 들어가고 보면 망신이고 앞길도 끝장나는 것이 아니오? 나는 포의(布衣)니 내가 대신 잡혀가겠소. 정한 기간 내에 돈을 갚아 주구려.”
윤무변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람을 대신 보냈다. 그 사람은 곤장을 맞고 옥중에 갇혔다. 그 돈을 납입해야만 방면될 것이었다. 그 사람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자기의 논밭과 가산을 전부 팔아서 갚고 수개월 만에 풀려났다. 집에 돌아와서도 장독(杖毒) 때문에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 이 때문에 집안 살림이 말이 아닌 지경이 되었지만 윤무변에게 돈이 나올 구멍이 전혀 없는 줄 알고는 뒷날을 기다리며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 윤무변은 단천부사(端川府使)가 되었다. 그 사람은 비로소 말을 세내서 타고 천리 원로에 윤부사를 찾아갔다. 윤부사가 자기를 보면 손을 잡고 매우 반기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문지기에게 저지를 당하여 관문을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한 달이 넘게 지체하였다. 노자는 벌써 떨어졌고 객점주인에게 진 빚도 적지 않았다. 그 사람은 묘책이 없으므로 실로 진퇴유곡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어느 날 본관이 출타한다는 소문을 듣고 길에서 지키고 섰다가 앞으로 나아가서 소리쳤다.
“내가 여기 온 지 오래 되었소.”
윤부사는 돌아보더니 하예(下隷)들에게 명하였다.
“저분을 관아로 모셔라.”
그리고는 계속 길을 재촉하였다.
이윽고 윤부사가 돌아왔다. 서로 대강 인사를 나누고 별다른 말이 없자 그 사람이 말을 꺼냈다.
“나의 빈궁한 처지는 노형도 잘 아시는 터 아니오? 옛날의 정의를 생각해서 불원천리하고 찾아왔다가 문지기에게 저지를 당해 한 달포를 지내느라 밥값으로 진 빚도 적지 않다오. 나의 딱한 처지를 좀 동정해 주기 바라오. 전에 노형이 내게 진 빚을 굳이 갚아 달라는 건 아니오.”
윤부사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불쾌해 했다.
“공채(公債)가 산더미 같아 당신을 구제할 겨를이 없구려.” 윤부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밖에 사처를 잡아주는 것이었다. 대접이 냉랭하기 이를 데 없었다. 며칠 지나서 다리를 저는 말 한 필을 내주면서 윤부사가 말했다.
“이 말 값이 수백 냥 나갈 것이니 타고 가서 팔아 쓰오.”
그리고 따로 50냥을 노자로 쓰라고 주었다.
“이 말은 보다시피 다리를 저는 말이오. 돈도 이걸 가지고는 그 동안에 든 식채와 돌아가는 노자도 부족하겠소. 이를 장차 어찌하란 말씀이오? 더 좀 생각해 주시구려.”
윤부사는 안색이 변하여 소리쳤다.
“내가 당신이기 때문에 빚더미 속에서도 이만큼 도와 주는 것이오. 당신이 아니면 어림없지. 빈손으로 쫓겨날 것이오. 여러 말 마오.”
그리고 그 사람을 내보내게 하였다. 그 사람은 홧김에 돈을 뜰에 팽개쳐 버리고 윤부사를 대하여 욕설을 퍼부었다.
“네가 나라의 돈을 도둑질하여 진영으로 잡혀가게 되었을 때 내가 의협심으로써 너 대신 잡혀가지 않았더냐? 그리하여 옥중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또 내 가산까지 탕진하면서 네가 진 빚을 갚아주었다. 이제 네가 만금 태수가 되었으므로 내가 불원천리하고 너를 보러 왔거늘 너는 나를 만나 주지도 않더니, 가까스로 대면하자 냉대를 하다가 이제 겨우 50냥을 주고 말아? 이걸로는 오고가는 노자도 부족하다. 고금 천하에 너같이 몰인정한 도둑놈이 어디 있겠느냐?”
그 사람은 목을 놓아 통곡을 하며 관문을 나와 길거리에서 원성을 높이며 지나다니는 사람을 붙들고 전후의 사정을 하소연하였다. 윤부사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상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악한 소행을 들춰내는 것에 분개하였다. 그래서 장교를 시켜 그 사람의 행장을 검색케 하였다. 행장 속에서 종부 낭청첩(宗簿郞廳帖) 두 장이 나왔다.
윤부사는 그 사람을 옥에 가두고, 당일로 감영으로 출발하여 감사를 뵙고 아뢰었다.
“하관(下官)의 고을에서 어보(御寶)를 위조한 죄인을 잡았습니다. 장차 어떻게 다스리면 좋을지요?”
“본읍에서 치죄(治罪)하도록 하오.”
“그러면 하관이 처결해도 좋을지요?”
“그렇게 하오.”
윤부사는 감영에서 돌아오던 길로 곧 그 사람을 때려 죽여버렸다.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이 잔인하고 몰인정한 사람도 있을까? 슬프다. 참혹하구나. 《청구야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