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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거절하는 것과 거역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거절에는 이유가 있지만 거역에는 이유가 없다. 거절은 어떤 면에서는 정중한 거부이기도 하지만, 거역은 무례한 일방적인 거부이다. 물론 거절이든지 거역은 우리에게 없어야 될 요소이지만 때로는 거절이 필요할 때가 있다. 선을 위한 악에 대한 거절이 바로 그것이다. 악이 요구하는 것에는 철저히 거절해야 한다.
당신의 거절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기준이 되고 있습니까?
[마 5:42]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후5:14-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은 원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부르던 말이였습니다.
초대 교회 중 하나인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들의 생활이 변화되었습니다. 모진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 안의 그들을 볼 때에 뭔가가 달랐습니다. 어떻게 저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은 놀라고 또 놀랐습니다. 저들이 교회 안의 성도들을 볼 때에 성도들이 오직 한 분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 안의 사람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따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좇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믿습니까?
혹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도 영접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죄인인 우리를, 죽어 지옥 갈 우리를 살 찢고 피 흘려 대속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자 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나 삶의 계획이나 삶의 방편이 따로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것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옛것으로 살면 안됩니다. 옛것은 마귀와 죄와 사망으로 살던 그 생활을 말합니다. 믿지 않을 때의 옛사람의 생활을 다 청산하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새것이 되었으므로 새사람으로 살 우리들인 것입니다.
부패, 타락의 일차 창조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자로서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낡아지지 않고, 진동되지 않을 이차 창조의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법칙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도, 소망도, 지능도, 새 것으로 살아 새 하늘과 새 땅, 새 세계의 새 법칙으로 살아서 우리는 성공도 새 성공, 영광도 새 영광, 기쁨도 새 기쁨, 일도 새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온전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새 생활을 해야 합니다. 믿기 전의 생활과는 다른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나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명심하고,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온전하게 자라가야 함을 명심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 생활을 하지 못하였으면 오늘 이 시간부터 우리가 새로워지고, 새 생활로 온전해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가다가도 넘어지고, 새로운 각오와 작정과 새로운 출발로, 과거의 모든 잘못된 것을 청산하고 새롭게 결심해도 가다가 넘어지고 실패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는 힘을 다 기울이면 하나님의 능력이 새 생활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로 새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를 예수님께서 대속하였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언제나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 생활이 천국 생활입니다. 주님을 잊고 주님을 내놓는 것을 내 놓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뺏기면 생명을 뺏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우리의 성공과 축복의 근원이신 모든 것의 근원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언제든지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가 되어야 이런 사람의 삶이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날 구원하신 주님을 잊으면 안됩니다. 언제든지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어떤 고난과, 어떤 형편에서도 어떤 시험이 와도 주님을 내놓으면 안됩니다.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표어가 있습니다. '나는 독립으로 무언의 용사로 주님만 모시고 어디까지든지' 주님을 모시고 주님 말씀을 붙들고 살면 넘어지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잘못해서 옆길로 가다가도 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님을 모시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이분과 끊어지면 사망이요, 죽음이요, 이분과 연결되면 생명이요, 영생인 것을 알고 이분을 우리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생활은 그리스도가 날 구원 하셨고, 우리를 대속해 주셨으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기념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날 구원하신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기념하는 생활은 어떤 생활입니까?
첫째로, 죄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으므로 소극적으로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주님의 대속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죄는 무섭고도 무서운 것이 죄입니다. 얼마나 죄 문제가 크기에 창조 주되신 주님께서 사람 몸 입고 오셔서 우리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셔서 우리 죄를 씻어 주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형편이 온다하더라도, 어떤 유혹과 핍박이 오더라도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는 우리가 죽음보다 진한 죄를 멸하는 것이 주님의 대속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삐뚤어 진 것을 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되는 것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 된 우리들의 삶 속에도 뿌리 깊숙이 말씀에 배치되는 것을 감추어 두고 있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위해서는 밤잠 자지 않고 힘쓰고 애쓰면서도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희생과 봉사하기를 주저하고 있으며, 땅에 속한 사망선 아래의 것을 위해서는 힘도 정력도 투자하며, 자녀들까지 이 생활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지만, 영생의 것에는, 하늘과 하늘에 속한 것을 위한 투자에는 예배시간 한 시간 드리는 것도 아까워하고 있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댓가는 그 값은 죽음뿐인 사망뿐인 죄를 우리는 뿌리 뽑아야 합니다. 멸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 된 우리들의 삶인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불의 때문에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순종하시므로, 우리가 의인이 되었고, 칭의를 가졌으므로 우리는 의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의인으로 사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삶인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義입니다. 주님은 죽으시기까지 하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평가해보고 비판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 순종에 어느 정도 투자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가진 시간, 우리의 가진 소유, 우리의 가진 이 육신, 우리의 가진 그것으로 우리는 얼마만큼 말씀 순종을 위해 투자하며 희생하며 봉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소극적으로 불의를 제거해야 합니다. 말씀에 불순종한 이것을 우리에게서 뽑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는 이제 의를 건설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입혀 주신 크신 칭의의 은혜의 터 위에 부족하나마 우리도 주님의 대속의 칭의를 기념하여 우리도 의를 건설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삶인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우리와 연결이 끊어져서 살았는데 주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와 연결을 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이 죽으시기까지 하셔서 우리에게 화친의 새생명을 주셨습니다. 소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져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배반하지 않는 한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도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버리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둥치 떠난 가지가 살 수 있을런지 몰라도,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하더라도 주님 떠난 성도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연결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생활을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디에서나 어떤 때에든지 천국생활이요, 영생생활이요, 이 자의 삶이 새로운 피조물의 삶인 것입니다.
한 사건을 말씀 드림으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 덴버의 리틀턴(Littleton)에서 에릭 해리스와 딜러 클리볼드라는 두 학생의 총기 난사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들은 히틀러의 생일을 맞아 이런 광기의 학살적 행동을 감행하였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폭력 비디오나 게임에 빠지 철없는 학생들의 불장난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 사회의 숨어 있는 부패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사건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져 있었습니다. 이 총기 난사 사건으로 인하여 미국의 10대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타임지에는 "10대의 심령에 부흥의 물결이 흘러 넘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부흥의 물결이 흘러 넘치는 것일까요? 총기 난사를 벌인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학생들을 캠퍼스의 한군데 말씀아 놓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총구를 갖다대며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믿지 않는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음흉한 미소르 지으며 학생들의 생명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확실한 신앙 고백을 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캐시 버넬이었습니다. 그녀는 총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 그러니까 너희들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해"
이런 담대한 고백은 주변에 떨고 있는 많은 학생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분노 가운데 "네가 믿는 하나님 곁으로 가라"고 외치며 총기를 난사하였습니다. 거룩한 순교의 순간이였습니다.
사건이 끝나고 난 다음에 그 자라에 있던 많은 학생들은 엄청난 신앙적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캐시 버넬의 순교 앞에서 자신의 비겁을 한없이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의 부끄러움은 신앙적 각성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남아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들도 캐시 버넬과 같은 담대한 증인으로 서야 되겠다는 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케시 버넬의 담대한 신앙 고백의 장면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많은 사람들의 잠자던 심령에 불을 붙여 놓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미국 전역의 각 학교에서는 "우리도 캐시 버넬의 길을 따르자"라는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고, 국기 게양대 앞 기도회가 다시 부흥되어 인산 인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부흥 운동에 불을 붙인 것은 캐시 버넬의 부모님들의 고백이었습니다. 부모님들은 딸의 죽음에 대해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캐시는 이것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의연히 말하는 이 말이 잠자던 모든 심령의 불을 붙이는 부흥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믿지 않던 많은 학생들까지도 왜 캐시가 그런 고백을 하면서 죽었는가를 생각하며 진지한 자세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곧 다가올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의연히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 너희들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해"라고 말한 캐시 버넬의 말과 "복음을 위해서 순교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해서 딸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부모님들의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야 하고, 죽는 것도 그리스도인 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더럽게 사는 것 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을 향한 정절을 지키렵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에, 스데반은 청장년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이다"고 강하게 외쳤습니다.
죽음을 의연히 맞이한 캐시 버넬의 삶이, 딸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감사하는 그녀의 부모님의 삶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담대히 신앙을 외친 순교자 주목사님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아닐까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길을 걸었고, 지금도 걸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도 역시 이 길입니다. 그리스도인 답게 삽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답게 죽읍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우리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주를 향한 소망이 있습니다.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 있습니다. 천국을 향하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소망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세상 속에 천국을 마련하며, 세상 속에 천국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주님 뜻대로 살겠다는,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 보겠다는 작정과 각오와 결심과 뜻을 정하여 우리의 현실에서 실제로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이 생활을 하다가 이 세상을 끝마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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