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6일 백령도 인근에서 근무 중이던 천안함이 침몰하자 온갖 음모론이 난무했다. 천안함 폭침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비열한 기습공격이었다. 46명의 장병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휴전 후 평시(平時) 적의 공격에 의한 최대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사건이다.
빛나는 民·軍의 활약
北 소행의 결정적 증거인 어뢰 잔해 찾아내
정부는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증거를 찾지 못할 경우 전개될 상황이 너무나 명약관화(明若觀火)했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두고두고 국론 분열의 도화선이 될 것이고, 이는 북한이 바라는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전사한 장병들의 명예가 손상되고 그들의 희생이 빛이 바랠 가능성이 있었다.
이 침몰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 음모론을 영원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힌 두 명의 숨은 영웅이 있다. 한 명은 당시 해군 특전대대장으로 현장을 지휘한 권영대(51) 대령(해사 42기)이고, 또 다른 이는 쌍끌이어선을 이끌고 현장에 투입되었던 김남식(54) 선장이다.
- 다수의 기자들 "진짜 어뢰를 건진게 맞느냐"
- 김남식 선장 "뭘 더 건져주면 믿을 것인가"
막중한 임무를 맡은 해군은 두 달간의 사투 끝에 결국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물)’을 건져 올렸다. 천안함을 두 동강 낸 바로 그 어뢰를 찾아낸 것이다. 이는 범행 현장에서 범인의 지문을 찾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권영대 대령은 최근 천안함 수중 작업 진행 당시의 상황을 담은 책 ‘폭침 어뢰를 찾다!’(조갑제닷컴)를 펴냈다. 이를 통해 천안함 폭침의 증거를 찾아낸 인물이 권 대령이라는 것이 세상에 드러났다. 기자는 이 책을 보는 순간 천안함 증거 확보의 또 다른 1등 공신인 김남식 선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 6월 초 기자는 김남식 선장을 인터뷰했다. 국방부 민군 합동조사단의 발표가 있은 직후였다. 김 선장은 발표 현장에 직접 참석해 어뢰를 발견한 경위를 차분하게 설명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김 선장은 “수많은 기자가 찾아와 당신이 진짜 어뢰를 건진 것이 맞느냐고 물었는데 혹시 내가 국방부와 짜고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대체 뭘 더 건져주면 믿을 것인가”라며 답답해했다.
전남 고흥 출신인 김남식 선장은 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쌍끌이어선의 선장으로 어장(漁場)을 누비고 있다. 제주도 앞바다에서 조업 중이던 그는 지난 4월 11일 여수에 입항해 4박5일간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바다로 나갔다. 그가 잠시 여수에 들렀을 때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은 그와 일문일답이다.
―아직도 대평11호를 타고 계시나요.
“대평호가 소속된 회사(대평수산)는 2년 전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1년 정도 쉬다가 최근 다른 회사의 쌍끌이배 선장을 맡고 있습니다. 요즘은 주로 제주 인근에서 조업을 합니다. 한번 조업을 나가면 열흘 정도 바다에 있다가 육지에 들어와 4박5일 정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조업을 합니다.”
평시보다 2배의 강도로 투망 "지쳤지만 어쩔 수 없어"
―당시 악조건 속에서 하루 7~8회 정도 투망을 했다고 하셨는데요.
“일반 조업을 할 때는 하루에 주야로 4번 정도 투망을 합니다. 하지만 천안함 수색 때는 하루 8번까지 투망을 했는데 고기잡이보다 몇 배 힘든 중노동이었습니다. 수도 없이 그물을 던지고 올리는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바윗덩어리에 걸려 그물이 자꾸 찢어져 매일 새벽 1~2시까지 배 위에서 그물을 손질해야 했습니다. 선원들이 지쳐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작업을 독려해야 할 때는 마음이 안됐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백령도 해저 지형이 보통 어장 지형과는 많이 달랐다면서요.
“사전에 해저를 조사해보니 그곳은 쌍끌이어선이 작업할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수심의 기복이 심하고, 주변이 전부 암반지대였습니다. 조류는 빠르고, 바닥은 바위처럼 단단한 돌밭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작업할 특수그물을 제작하는 데만 1주일이 걸렸습니다. 해저 지형이 암반지대라 그물이 찢어지지 않도록 코가 촘촘한 그물을 한 겹 더 덧댔습니다. 조류도 너무 심해서 그물이 안정적으로 펼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왔다갔다 하는 왕복 작업은 애당초 불가능했습니다. 투망작업은 항상 조류의 반대방향으로만 진행해야 했습니다.”
고가의 그물을 잘라내는 침선과 가스터빈을 피해 어뢰를 건져 올려
―작업 중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수색해야 할 지점이 가로세로 500m 정도 되는 구역인데, 화구 바로 옆에 천안함에서 떨어져나온 가스터빈과 오래된 침선(沈船)이 한 척 있었습니다. 이 가스터빈과 침선에 그물이 걸리면 3000만~4000만원짜리 그물을 그대로 잃어버립니다. 실제로 작업 중 그물을 연결하는 밧줄(52㎜ 와이어)이 침선에 걸린 적이 있는데 바로 절단되었습니다. 터빈과 침선을 피해서 투망을 해야 하니까 수색할 구역의 50% 정도를 잃은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어뢰를 건져 올린 것은 천운(天運)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권영대 대령이 최근 발간한 책에서 김 선장을 카리스마 넘치는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표현했더군요.
“권영대 대령과 호흡이 맞지 않았으면 작업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없었을 겁니다. 권 대령은 막중한 책임을 혼자 떠안은 상태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지만, 열악한 조건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는 권 대령과 군인들의 모습에 무척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래서 군인은 명예를 먹고 사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장들이 원래 고집이 센 편인데, 군인이라고 선장의 의견을 무시하고 ‘이래라 저래라’ 명령만 했으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을 겁니다.”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는 주장을 접할 때마다 어떤 기분이 드는지요.
“제가 현장을 수색한 당사자인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납니다. 대한민국 군대가 뭐가 할 일이 없어서 우리 같은 사람을 불러 거짓 쇼를 벌이겠으며, 자작극을 꾸미는 바보짓을 하겠습니까. 더구나 당시 현장에는 수많은 외국의 전문가들이 있었는데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속일 수가 있습니까.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런 음모론에 휘둘리는 것을 보면 참 한심한 생각밖에 안 들죠.”
1번어뢰 건져올린 김남식 선장 "수십명이 함께 올렸는데 가짜라니...". /Chosun Media 유튜브 채널
대통령이 눈물흘리며 약속한 사항이 연평도 포격에도 침묵했던게 아쉬워
―작업 성공에 따른 별도의 성과급 같은 것은요.
“선사가 국방부와 계약을 맺고 현장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선장이나 우리 선원들은 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천안함 사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천안함 사건이 나자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 도발의 증거가 발견되면 용납하지 않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막상 연평도에서 적의 공격을 받았는데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가만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 무척 아쉬웠습니다. 천안함 만행을 되갚아 줄 명분이 생긴 것인데 이때 분명히 뭔가를 보여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날 당하고만 있으니 북한이 우리를 더욱 얕잡아보고 핵무기까지 만들어 협박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김 선장은 “2년 전 천안함 용사들이 잠들어 있는 대전 현충원에 혼자 다녀왔다”고 한다.
“가서 보니 마음이 참 안됐습니다. 젊은 나이에 전시(戰時)도 아닌 평시에 북한의 기습으로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제가 어뢰 잔해를 찾아서 천안함 전사자 유가족들에게 작은 위로가 됐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살면서 나같이 작은 사람도 국가에 필요한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뿌듯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