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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편 / 시편 103편 1-14절
찬송 / 467장 · 내게로 와서 쉬어라
성서 / 역대기하 36장 17-21절, 마가복음 3장 1-6절
말씀 /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그리하여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시켜서 “땅이 칠십 년 동안 황폐하게 되어, 그동안 누리지 못한 안식을 다 누리게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역대기하 36장 21절)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마가복음 3장 3절)
요즘 농촌에서 우렁이가 아주 골칫거리가 되었답니다. 벼가 자라는 논에 우렁이가, 그것도 아주 큰 왕우렁이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입니다. 논에 우렁이가 많다면, 그건 좋은 일 아니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쌀도 수확하고 덤으로 우렁이까지 잡는다면, 그건 꿩 잡고 매 잡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말 그대로 一石二鳥가 아니냐는 것이지요. 우렁이 된장찌개는 정말 구수하고 맛깔나지요. 그러나 이 왕우렁이는 토종이 아니라 외래종인데 맛이 없어서 식용으로 쓸 수 없습니다. 왕우렁이는 번식력이 왕성해서 몇 마리만 넣어도 금방 논이 우렁이 천지가 되지요. 이놈들이 로봇 청소기처럼 풀을 먹어치워서 논을 정말 깨끗하게 만듭니다. 예전에 우렁이로 논농사를 짓는 목사님 집에 갔었는데, 목사님이 풀을 베어다가 논에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그 풀은 거름이 아니라 우렁이 먹이였습니다. 농사일 중에서도 한여름 뙤약볕 아래 하는 김매기는 정말 고되지요. 그런데 우렁이가 풀을 싹쓸이해 주니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이 오면, 추위에 약한 왕우렁이는 모두 죽어서, 생태계를 교란할 우려도 없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겨울이 따뜻해지고, 또 이 왕우렁이들이 차츰 추위에 적응하게 되어서, 우렁이들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입니다. 본래 친환경 농법을 쓰는 논에만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 논에 왕우렁이가 득시글하게 된 것이지요. 이 우렁이들이 논에 먹을 잡초가 없으니까 뭘 먹을까요? 논에 자라는 벼에까지 달라붙어 먹어댑니다. 그뿐 아니라 왕우렁이가 시내와 호수까지 넘어가서 생태계 교란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친환경 농사를 좀 편하게 지으려고 우렁이를 써먹었는데, 이제는 우렁이가 애물단지가 되었습니다. 왕우렁이 사태를 보면,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게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인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성서의 말씀으로 ‘역대지하’를 마무리 짓는 말씀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역대기 역사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통찰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대기상 1장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지요. 그리고 역대기하의 마지막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끝납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명령입니다. 그렇게 역대기는 아담에서 시작해서 포로 귀환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성찰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받은 말씀은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통찰하면서 내리는 결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별히 ‘역대기 역사가’는 ‘바빌론 포로’라는 아픈 역사를 깊이 성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며, 하나님이 택하신 선조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뽑아 세우신 왕 ‘다윗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선민이요, 영광스러운 나라입니다. 그런데 왜,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망했을까요? 어찌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천덕꾸러기가 되었고, 하나님의 선민이 치욕을 당해야 했으며, 다윗의 나라가 참담하게 무너졌다는 말입니까? 자랑스러운 예루살렘 성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거룩한 성전이 이방인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끼끗한 백성과 왕자들이 짐승처럼 노예로 끌려간 그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무엇 때문일까요?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역대기 역사가는 그 어떤 누구 때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그렇게 만드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 왕을 불러다가, 자신의 백성을 치게 하셨다.” 역대지하 36장 17절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지독한 자기성찰 아닙니까? 역사 비판의 서슬 퍼런 칼로 다만, 오직, 자기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엄정한 자기성찰이요, 뼈아픈 반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셨다, 이것이 역대기 역사가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면, 이스라엘이 겪는 그 비참한 역사가 다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치신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그 대답이 바로 오늘 우리가 받은 본문 21절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시켜서 ‘땅이 칠십 년 동안 황폐하게 되어,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안식을 다 누리게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먼저 주목할 것은 이 일이 그냥 갑작스레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시켜서 미리 경고하셨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로 외치다가 안 되니까, 멍에를 목에 메고 온몸이 눈물주머니가 된 듯 울면서, 간곡하게 호소했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시켜서 말씀하신 일입니다. 어찌 예레미야뿐이겠습니까? 예언자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주 중요한 물음이 생깁니다. 역대기 역사가는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고 했지요. 그건 또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면서까지 이루어야 하셨던 일이라면 참으로 정말 중요한 일이겠지요. 도대체 그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바로 ‘땅의 안식’입니다. “땅이 칠십 년 동안 황폐하게 되어,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땅을 황폐하게 하셨는데, 예루살렘을 무너뜨려서 들짐승이 드나드는 황무지가 되게 하셨는데, 그것도 칠십 년 동안이나 그렇게 내버려 두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땅의 안식’을 이루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너무도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 ‘땅의 안식’은 무엇입니까? 땅도 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도 ‘안식’을 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걸 지키지 않으면, 인간이 땅이 쉬지 못하게 착취하고 파괴하면, 하나님께서 기어이 그 땅의 안식을 이루고야 마신다, 그 얘기입니다. 땅도 안식할 권리가 있습니다. ‘땅의 안식’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땅의 안식’은, 돌이켜보면, 새삼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는 히브리 사람들을 해방하셨지요. 그리고 시내 산에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핵심이 십계명이지요. 그런데 이 십계명은 무엇일까요? 노예에서 해방된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지침입니다. 그런데 노예로 고통당했던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게 무엇일까요?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야근까지 시달리는 직장 노예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안식’입니다. 쉬는 것이지요. 십계명은 무엇이냐? 한마디로 안식의 계명입니다. 아니지요. 안식의 복음입니다. 평안히 쉬라는 것, 그것이 십계명의 알짬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는 대로, 십계명을 지키자면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하셨으니, 안 섬기면 되지요. 그 무슨 신의 형상/우상도 도무지 만들지 말라 하셨으니까, 안 만들면 됩니다. 하나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말라 하셨으니, 삼가면 되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꼭 실행하라는 계명이 있지요. 반드시, 결코 가벼이 여기지 말고 거룩하고 엄중하게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렛날에는 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안식’의 권리는 내 권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나뿐 아니라 내 식솔은 물론 종들과 나그네와 가축까지도 누려야 하는 권리입니다. 그뿐 아니지요. 땅도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모든 생명의 터전인 땅도 안식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안식’은 그저 누리면 좋고 누리지 않아도 별 탈 없는 그런 물렁물렁한 권리가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권리입니다. 인간이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야 마는 거룩한 권리요, 신성한 의무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파 율법학자들과 충돌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언제 충돌하지요? 주로 안식일입니다. 회당에서 사건이 벌어지지요.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과 율법학자들이 충돌했다는 것은 그냥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 바빌론 포로 이후 안식일은 아주 중요해졌습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이 없으니 제사/예배를 드릴 수 없었지요. 그 대신에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서 율법을 읽었습니다. 포로 귀환 후에 헤롯 때까지 성전이 재건되면서 제사가 실행되었지만, 다시 로마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무너뜨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명운은 참 기구합니다. 또다시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못하고 무너졌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율법학자들은 다시 회당에서 율법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재건했습니다. 성전이 없으니 또다시 안식일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이 상황은 아주 긴장감이 팽팽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손이 오그라들었는데, 아마 그 마음은 더 오그라들었을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질병과 장애를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니 거룩한 날에 거룩한 장소에 죄인이 있는 셈입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 장애인을 지켜보고/노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이 말, 대단히 도발적인 말 아닙니까? 무슨 말이니까? 그저 죄인이라서 손보다 마음이 주눅 들고 오그라들어 한편 구석에 쭈그리고 있는데, 일어나랍니다. 가뜩이나 지켜보는 눈총이 바늘처럼 따가운데 ‘가운데’로 나오라네요. 무슨 말입니까? 회당의 중심에 당당히 서라는 말입니다. 거룩한 날, 거룩한 장소의 중심이, 그 주인이 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 손 오그라든 사람이 바로 제일 가운데 서야 할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 말입니다. 그 사람, 자신의 오그라든 손처럼 몸도 마음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죄인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부드럽고 다정한 분입니까?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축복해 주시고, 고통당하는 병자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시고, 같이 눈물을 흘리시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이 사람의 안식을 위해서는 차돌처럼 단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지요.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좀 과격한 언사 같지 않습니까? 뭐 손 마른 사람을 두고, 목숨을 살리냐 죽이냐 하실까요? 예수님이 너무 세게 나오셔서 그랬는지, 그 말을 듣고 모두 잠잠했습니다.
예수님은 잠잠한 그들에게 노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굳은 것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안식일 법은 그렇게 잘 외우면서도 정작 고통당하는 한 사람의 아픔은 도무지 보지 못하는 그들을 보시며 분노하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지요.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오그라든 마음도 활짝 펴져서,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했습니다. 헤롯 당을 가장 경멸한다는 바리새파 율법학자, 아니 율법기술자들이 헤롯 당원들과 배를 맞춘 것입니다. 가장 탐욕스러운 정치와 가장 위선적인 종교가 추악한 야합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빼앗긴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하셔서 안식을 되찾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며, 또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모든 생명과 더불어 평안히 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도 쉬게 하라 하셨습니다. ‘땅의 안식’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역대기 역사가는 이스라엘이 겪었던 그 혹독한 고난의 역사에서 땅의 안식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았고, 침히 빼앗긴 ‘땅의 안식’을 이루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급변하는 기후변화와 엄청난 자연재해를 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요? 바울이 고백했듯이 지금 하나님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진통하면서 ‘안식’을 갈구하며 신음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라도 우리는 땅을 그저 탐욕과 투기의 대상으로 학대하고 파괴하는 죄악을 마음을 찢으며 아프게 자성하고 돌이켜야 하지 않을까요? 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다만, 오직 하나님의 것이라는, 성서의 가장 기본적인 믿음을 다시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땅의 안식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땅의 안식을 이루실 것이다, 참 두렵고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안식을 이루시는 역사가 재앙과 황폐화가 아니기를, 심판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안식을 빼앗긴 사람들을 보며 슬퍼하셨습니다. 안식을 빼앗긴 사람을 안식일과 회당의 중심에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만든 안식일 법조문이 아니라 그 법의 정신을 가르쳐주셨고, 그 법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오그라진 손과 마음을 활짝 펴주셔서, 잃어버렸던 안식을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진정한 안식일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주일이, 우리의 안식일이 그런 평안히 쉬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의 오그라진 몸과 마음을 활짝 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 자신이 평안한 안식을 누리고, 또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더불어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우리 어른들부터 우리 아기들까지 모두 맘껏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우리의 이웃과 함께 나누고,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과도 나누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땅의 안식’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욕심을 채우고 나만 누리는 기름진 쾌락이 아니라 내 욕망을 비우고 함께 더불어 나누는 가난한 마음의 기쁨을 우리가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안식과 평안을 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