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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
한국사 |
세계사 | |
1924년 |
6월 |
남만주 독립적인청년조직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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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1차 국공합작. 레닌 사망. 앙드레 브루통 <초현실주의 선언>. 이탈리아 총선 파시스트당 승리. 영국 첫 노동당 내각 등장. |
1925년 |
6월11일 |
미쓰야 협정 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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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실용적 TV 발명 소련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 채택 & 트로츠키 실각. 아문젠 북극탐험. |
11월 |
북만주 독립적인청년조직 결성. | |||
1926년 |
1월 |
동만주 독립적인청년조직 결성 |
6 .10 만세운동 |
중국 장개석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취임 -북벌 시작(국민당 대혁명). 영국 광부들 메이데이 총파업.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당 이외 모든 정당 해산령. |
4월 |
만주총국 조직명령. | |||
10월28일 |
동만구역국 조직 회의 | |||
1927년 |
5월1일 |
메이데이 데모. |
신간회 조직 |
린드버그 대서양 횡단 비행성공. 소련 7시간 노동제. 모택동 정강산 혁명근거지 건설. 수카르노 국민당 결성. |
10월 |
2차당 사건의 동지들의 재판이 서울에서 열리는데 항의하는 데모 | |||
11월 |
한상목의 만주총국 설치 | |||
1928년 |
5월1일 |
소규모 메이데이 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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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총선 사회민주당 승리. 영국 남녀 평등 선거법 제정. 중국 은허 유적지 발견. 소련 토지사유금지법안 발표. TV방송 개시. |
8월1일 |
김철산 지도하의 데모 | |||
19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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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 항일 운동 |
세계 경제 대공황 발생. 트로츠키 국외 망명. 플레밍 페니실린 발견 |
1930년 |
3월 1일 |
반제국주의 동맹 데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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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총선거(나찌당 107석 획득). 간디 무저항 운동 시작. 호치민 베트남 공산당 결성. |
4월17일 |
시위참가자 대량 검거 | |||
5월20일 |
M. L파의 통일전선 | |||
6월6일 |
각 파벌의 해산 선언 | |||
19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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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모라토리엄 선언. 스페인 혁명(부르봉 왕조 멸망). 만주사변. 영연방 성립. |
수정하였습니다.
이 때, M.L파가 중국 공산당과의 통일전선 지지를 발표합니다. M.L파는 왜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요? 민족주의자와 다른 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중국 공산당과의 연합을 꾀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정말로 그들의 이념성에 따르고,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이들이 내세운 통일 전선의 주된 이유가 조선 공산당의 존재와 활동에 대한 이념상의 오류를 인지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일국일당 원칙 때문도 아닌 것 같습니다. M.L파는 현실의 궁핍함을 벗어나고, 자신들의 운동에 대한 패배와 불안을 완화시키기 위해 중국 공산당을 택한 것 같습니다.
이들은 민족주의자와 다른 파들 모두에게 비난을 받고 있었고, 앞이 보이지 않는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 회의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점은 이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들의 현실이 너무나 열악했음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국 공산당과의 합작은 많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지지를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화요회 같은 경우는 당을 해산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M.L파가 중국 공산당과 힘을 합치면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살펴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 문영선 : 2) 살펴보아야할 ->
수정하였습니다.
이런 선택을 함으로써, 이들은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긴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어쩌면 현실적으로는 더 힘든 길을 선택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주에서의 한국공산주의운동은 다른 해외에서의 운동에 비해서 적극적이고 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한국공산주의운동은 한국의 각 파벌이 주도권을 구할 만한 중앙총국이 없었고 전략 ?전술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국공산주의사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되죠. 그러나 만주에서 한국공산주의운동이 실패로 끝났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간도협정에서 기인한 미쓰야협정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질문, 미쓰야협정이 간도협정에서 기인한 것인가요?? 간도협정은 한국인을 중국의 사법권 아래 놓는 것이고, 미쓰야협정은 일본이 한국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중국경찰의 태만함에 항의로 만들어진 협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 심민규 : 1) 주도권을 구할 만한 -> 주도권을 쥘 만한 2) 한국공산주의사에 -> 한국공산주의운동에
미쓰야 협정은 일본이 간도지역의 일본 신민의 심리권을 넘겨받은 후에도 중국경찰의 태만함과 무관심을 지적하며 중국에 항의하여 합의한 협정으로 중국내에서 일본의 압박을 더욱 강화하게 하여 한국공산주의운동에 큰 어려움을 준 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재 속에서도 활발히 공산주의운동을 펼친 한국공산주의자들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쓰야 협정으로 인해 만주에서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큰 제약을 받게 되었죠. 안타깝지만 당시 날로 강성해 갔던 일본 제국주의를 생각하면 중국의 입장에서도 불가피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늦게 댓글을 달게되니 여러분들의 의견을 먼저 살필 수 있어 좋군요. 저는 해외총국의 해산이 결국엔 독자적 노선의 포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 결과에 아쉬움을 표명하셨는데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만 당시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볼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입니다.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운동여건과 전망이 보이지 않는 당재건 사업에서 물러나 중국공산당을 통해 더 나은 물질적 조건을 택한 것입니다. 내셔널리즘과 인터내셔널리즘의 복잡한 함수관계는 중국공산당뿐 아니라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죠. 중국이 그들을 이용하려한 것처럼 그들도 중국의 조직과 자금을 이용하려 한게 아닐까요? 물론 이런
1) 택하려한 ->
* 황재근 : 2) 달게되니 -> 달게 되니 3) 한게 아닐까요? -> 한 게 아닐까요?
이해타산 이전에 전부터 관계를 가져온 중국공산당과의 신뢰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주라는 위치를 보면 아쉬운 점이 많이 남습니다. 공산주의 운동의 조건이 대중과의 밀접한 관계라고 생각할 때 일본이나 상해에 비해 만주는 조선인 밀집지역이 많았으니 더욱 포기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게다가 조선과 육지로 연결되어 무장항쟁에도 좋은 여건입니다. 그런데 왜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독자적 군사력을 키우지 않았을까요? 민족주의자들처럼 군관학교를 세우거나 당차원의 전략으로 군사력 건설을 세울만했는데요. 제가 아는 선에서 짐작해보자면 민족주의자들의 군사력을 얻으려했거나 중국의 군사력을 얻으려했던건 아닌가 생
2) 세울만 했는데요. ->
수정했습니다.^^
각합니다. 만주에는 이미 여러 무장세력이 있기때문에 새로운 세력을 키울 조건도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민족주의자들의 무장세력에도 공산주의자들이나 동조세력이 많았고요. ML파가 만주에서 통일전선에 집중한 것에도 이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그저 짐작해볼 따름입니다.
저 또한 황재근 학우님과 같이 만주 총국의 해산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한국 공산주의의 시초였으며 본거지였다는 의의도 있고, 지적하신 바와 같이 한국인 이주자들이 많아 공산주의 활동의 가장 큰 요지였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중국전선과의 통합이 실질적인 한계를 자각하고 보다 나은 물질적 조건과 군사력을 얻기 위함이었다는 것이군요. 곧 어쩔 수 없는 선택과 자포자기가 아니라, 전략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이었다는 새로운 의의를 생각해 볼 수 있겠네요. 특히 군사력의 확보를 위해서는 외국의 공산당 세력을 이용하는 것만큼 현실적인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공산주의자들의 의도대로 일이 풀렸을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인 것 같네요^^
미쓰야 협정을 통해서 중국 경찰과 일본 경찰의 합동으로 인한 압박감이 더 컸으리라 생각됩니다. 당이 없는 상태에서 그토록 노력을 했던 것들이 참으로 아쉬울 뿐 입니다. 만주에서의 활동은 공산주의 운동사에 있어서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많은 환경적요건들과 인적요건이 충분했으며 그에 따른 활동도 잘 되어가나 싶었지만 결국 압박 통제에 대한 무릎을 꿇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도 공산주의에 대한 의의는 있었다고 봅니다.
* 김화원 : 1) 뿐 입니다. -> 2) 있었다고 -> 있다고 3) 환경적요건들과 인적요건이 ->
김유라 학우님 발표 잘 들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한국 내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와해된 이후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은 만주에 뿌리를 내리고 활동을 벌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만주는 우리 민족의 요람과 같은 장소인 동시에 극동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거점이 되는 중요한 전략적 장소였습니다. 미쓰야 협정으로 만주마저 일본의 영향력을 받게 되었지만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열의는 꺾이지 않았고 3차에 걸친 간도공산당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와 검열 속에서 연속으로 시위를 벌인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시도를 그치지 않았던 무모함 속에 담긴 공산주의자들의 열망과 꿈을 잃
지 않는 자세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일제 치하의 한 치 앞 미래도 내다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들의 안위보다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자세는 그들의 의지와 신념이 얼마나 확고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시위는 대중의 단결된 힘을 일제에게 보여줄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으며 대중의 봉기,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만주에서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도 실패로 끝이 나고 중국공산당 만주총국은 해체를 맞았고 중국공산당에 흡수되고 마는 결과를 맞이했으나 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투쟁의식은 중국공산당 내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활발한 운동을 벌여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해외로 눈을 돌려 만주와 일본에서 공산당의 재건을 이룩할려했지만 1930년에 만주 총국은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수십만의 조선인들이 거주하며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후방기지의 역할을 담당해온 만주지역 내 공산주의의 역량을 상실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이는 조공재건이 난조를 거듭하게 되는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파괴된 국내운동역량을 보완할 수 있는 근거지가 사라졌다는 점이 너무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이정민 : 1) 이룩할려했지만 ->> 이룩하려 했지만 2) 너무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