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論', 당장 선거판에서 퇴장하라/'선거의 여왕' 별칭이 그리 좋나?/탄핵된 처지에 선거지원 나서는 무개념/22년 전 국가보안법 개정 불발에도 박근혜가 있었다/국가보안법 개정을 극력 반대하던 때의 냉혹, 흉칙스런 얼굴/'윤어게인', '박어게인' 다 써먹겠다는 시대착오적 정당 국힘]
2026.5.27.
1)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박근혜(朴槿惠, 74)는 그런 사람이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칭이 그리 좋은 건지, 아니면 숨길 수 없는 '관종'(關種, 관심종자, 타인의 이목을 지나치게 끌고자 하는 사람) 본능인지 제18대 대통령 박근혜는 기어코 6.3 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보궐선거판에 국민의힘 치어리더로 뛰어들었다. 그는 지난 23일 보수 쪽에서 '심장'이라고 부르는 대구 북구 칠성시장 유세에 처음 얼굴을 내밀더니, 25일엔 어머니의 고향 충북 옥천(玉川)을 비롯해 충남북 지역을 분주히 다녔다. 옥천의 어머니 생가에서는 국힘 충북지사와 옥천군수 후보를 대동하고, 이들을 잔뜩 치켜세웠다. 그는 27-28일 '부울경'과 강원도까지 훑을 예정이라고 한다. 민주당에서는 "'윤 어게인'도 모자라 '박 어게인'까지 동원하느냐"며 "국민심판에 따른 탄핵으로 파면된 두 사람을 정치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국민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한다. 국힘 쪽에서는 "요청하는 곳만 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건과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상납 등의 혐의로 징역 22년과 벌금 180억원, 추징금 35억 원이 확정돼 복역 중 문재인 전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4년 9개월 간 복역 후 2021년 12월 풀려났다. 그가 유세 현장에 모습을 보인 것은 풀려난 뒤로 4년 6개월 만에 처음이다.
2) 박근혜의 이런 광폭 행보를 보는 순간 21년전인 2004년 9월 말의 그가 생각났다. 당시의 여당인 열린우리당(민주당 전신)과 제1야당인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전신)은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등 이른바 4대 법 (2개 법 외에 과거사 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 개정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대치 중이었다. 특히 사립학교법의 경우 <개방형 이사제> 도입을 골짜로 한 여당의 개정안을 한나라당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나경원 의원 등 사립학교 재단과 관련 있는 의원이 한나라당에 많기 때문이라는 설이 정치권과 언론계에 파다했다. 그러자 김원기 17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은 2004년 9월 16일을 사립학교법 개정안 심사기한으로 지정했고, 여야가 물리적 충돌까지 벌이는 격돌 끝에 이듬 해인 2005년 1월 개정안은 통과됐다.
그런데, 사립학교법 개정안과 달리 더 큰 논란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됐던 '국가보안법 개정'에 관해서는 여야가 비교적 손쉽게 의견 접근을 보았다. 무엇보다 이 법이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독소조항 등 문제점이 뚜렸해 야당도 독소조항 폐지에 반대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다음으로 당시 한나라당의 원내사령탑은 최소한 대화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한나라당의 원내총무(현 원내대표)는 김덕룡 의원, 원내 수석부총무는 남경필 의원이었다. 이들은 열린우리당의 천정배 총무, 이종걸 수석부총무와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경력, 역량, 성품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김덕룡 총무는 당시 5선의 중진으로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측근의 하나였으며,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서 YS, DJ, 김원기 의장 등과 호흡을 맞췄던 전력까지 있는 중량급 정치인이었다. 양당의 협상대표 4명은 김원기 의장을 협상보증인으로 하고, 국가보안법 개정안의 대체입법안을 만들었다. 당시 국회의장 공보수석비서관이던 필자도 협상장에 배석해 대체입법안을 정서(整書), 협상 현장에 내놓고 재가(裁可)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김덕룡, 천정배 대표가 차례로 서명하고 김원기 의장이 부서한 국가보안법 대체입법안(국가안전보장특별법안)이 양 당 원내대표에 의해 재가됐다. 국가보안법에서 가장 큰 독소조항으로 지목됐던 <제7조 찬양, 고무죄>를 비롯해 그동안 정치권에서 꾸준히 지적됐던 독소조항은 대부분 정리되어 사실상 국가보안법 폐지에 가까운 매우 잘 만들어진 대체입법이었다.
두 대표가 힘차게 악수를 나눈 뒤 김덕룡 원내대표는 "박근혜 당대표에게 보고하러 가겠다"며 김원기 국회의장에게 목례했고, 천정배 대표도 일어섰다. 그러자 김원기 의장은 필자에게 "김덕룡 대표를 따라가서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라"고 말씀하셨다. 한나라당은 의원총회 중이었다. 김덕룡 원내대표가 국가보안법 개정안에 대해 귀속말을 하듯이 설명하자 잠시 듣고있던 박근혜는 김 원내대표 쪽으로 고개를 확 돌리더니 "그건 안돼요, 한 줄도 못고칩니다"라고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안돼요"라고 말할 때의 그 냉혹한 눈빛과 데드마스크(죽은 사람의 얼굴 본) 같은 기괴한 표정, 그리고 말을 마치고 난 후의 굳게 다문 입을 잊을 수 없다. 김덕룡 대표는 몇 마디 더 했지만 박근혜가 아예 쳐다보지도 않자 별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당시 박근혜는 3선, 김덕룡은 5선 의원이었으며 김덕룡은 63살로 52살의 박근혜보다 11살 많았다. 결국 국가보안법 대체입법안은 폐기되고 말았다. 물론 열린우리당도 2024년 9월 30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국가보안법 전면 폐기 아닌 부분 개정은 안된다"며 대체입법안을 부결했다. 이른바 '탄돌이'(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대한 반사이익으로 당선된 의원들을 지칭)와 특히 '108 번뇌'(탄돌이 의원 등 초선이 108명이라는 데서 나온 별칭)로 불렸던 당내 강경파가 주도해, 잘 만들어진 대체입법안을 걷어차 무용지물로 만들고 말았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그 때로부터 22년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 국가보안법은 단 한 줄도 고치지 못했다. 정치는 가능성 및 대화와 타협의 예술이다. 당시 의석을 보면 열린우리당 152석, 한나라당 121석, 민주노동당 10석, 새천년민주당 9석, 기타 7석으로 열린우리당이 노동당, 민주당과 연합하면 어떤 법안도 안정적으로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정치인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한나라당, 특히 박근혜가 가장 문제였지만, 여야 대표가 합의한 대체입법안을 끝까지 끌고가지 못하고 의원총회에 올렸다가 부결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천정배 의원의 정치력과 리더십 부재를 두고두고 아쉬워한다. 여야 대표가 그 정도로 어렵게 합의했으면 너무 민주적 절차를 따져 의원총회에 회부할 게 아니라, 대표가 주도해 당론으로 결론짓고 밀고나갔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박근혜는 2004년 12월 15일 "4대 개혁 입법은 국론분열법"이라고 규정하면서, '전면 반대투쟁'을 선언한다. 김원기 의장이 2005년 1월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직권상정해 통과시키자 그 뒤 강력한 투쟁을 계속해오던 한나라당은 2005년 3월 '국회 등원 거부'와 '장외 투쟁' 시작을 선언했다. 정치판은 더 얼어붙었고, 결국 열린우리당의 4대 개혁법은 누더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3) 박근혜는 한국의 현대정치사에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기여를 했을까. 그는 15-19대까지 5선 의원이었으며 그 중 앞의 4선은 대구 달성구, 19대는 비례대표였다. 44살이던 1996년 15대 보궐선거에서 처음 국회의원이 될 때부터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을 크게 입었다. 물론 아시아권에서는 그 말고도 아버지를 이어 대통령이나 총리가 된 경우가 여럿 있었다.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는 자와할랄 네루 총리의 딸이었다.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대통령 겸 총리는 줄피카르 부토 대통령 겸 총리의 딸이었다. 필리핀의 글로리아 마카파칼 아로요 대통령은 디오다도 마카파칼 대통령의 딸이었다. 딸이 정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정치를 시작하고, 훌륭한 정치가(statesman)가 된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정치를 시작해 선정(善政)을 베풀고 국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은퇴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디라 간디, 베나지르 부토, 마카파갈 아로요는 그래도 자국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 지도자들이었다. 박근혜가 과연 그러한가? 쿠데타를 했고 군사독재철혈정권으로 일관했던 부친과 뭐라도 크게 달랐던가 말이다.
박근혜가 '선거의 여왕'으로 불린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