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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합장
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탑골승방(현 보문사)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서 계신 어머니의 뒷모습. 초등학교 5학년짜리는 제법 먼 길을 걸어 기도 중인 엄마를 보러 갔었다. 한복을 입고 간절하게 두 손을 포갠 어머니의 뒷모습은 왠지 낯설고 조금은 거룩해 보였다. 선뜻 다가서지도 못하고 절 마당에서 한참 동안이나 서성거렸다. 그 한낮의 기온이 지금도 기억된다. 고요한 마당에 울려 퍼지는 독경 소리. 그분의 합장 속에 드리워진 비원(悲願)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겨우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의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시왕전(十王殿)에서 쫓기어난 눈물의 왕” 홍사용 시인의 시구가 이해되면서 어느 날 어머니의 비원이 빙산 일부처럼 내 가슴속에서 조금씩 용해되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도 안 되는 어린 왕(3명)들을 데리고 어머니 서 계시던 그 법당에서 49재를 지내야 했던 지난 50여 년의 세월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눈앞을 지나간다.
비원의 눈물, 연꽃처럼 두 손으로 떠받들린 어머니의 합장 속에서 나는 관세음보살을 만났다. 사고무친한 우리 형제가 이만큼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또한 그 때문이었으리라. 절(남별당)에 가면 언제나 맛있는 감자튀각을 얻어먹을 수 있고, 또래의 비구니 스님들과 친구가 되면서 그곳에 가는 일이 무척 즐거워졌다. 책을 빌려와 불교설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특히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인연 설화는 착한 마음을 견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친구 스님이 건네준 관세음보살 사진과 영험담은 평생토록 관음보살을 염송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구덩이에 떨어져도 관세음의 힘을 생각하면 불구덩이가 변하여 연못이 되며 형장에서 죽게 됐을 때라도 염피관음력으로 칼이 조각조각 부러진다’는 실제의 사례가 감동적이었다. 그곳에서 책을 빌려와 독서의 단계를 높이고 동승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희곡 〈산비둘기〉를 써서 이화여대 주최 전국여고 문예 콩쿠르에 입선한 적이 있다. 작품을 모교 무대에 올렸다. 공연을 위해 기꺼이 소품(승복, 염주, 목탁)을 내어준 스님들의 우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고등학교 2학년 무더운 여름날, 원고지에 매달려 있을 때 원인 모를 신열, 그것은 폐결핵으로 밝혀졌는데 마침 학교와 자매결연을 한 미8군의 도움 덕분이었다.
세 살 아래의 남동생이 갑자기 뇌염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을 잊은 어머니, 졸지에 실직한 아버지의 절망과 분노. 나는 그때 파스와 나이드라지드를 한 줌씩 먹으며 방문을 닫고 들어앉아 원고지 칸을 채웠다. 관세음보살님을 불렀다. 이듬해 대학 입시에서 신체검사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정각사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정창범 선생님(문학평론가)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에 대해’ 알아와서 발표하라는 숙제를 내게 맡기셨다. 당시는 도서관도 참고서도 의지하기 어려워 남별당 일조 스님한테로 달려갔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속 시원히 알려 줄 분이 올 테니…….” 나는 무작정 그분을 기다렸다. 늦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 양복 차림의 훤칠한 남자 한 분이 내 앞에 나타났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재학생이던 이광우(李光雨) 스님이었다. 1958년, 그러니까 63년 전의 일이다. 다생의 인연이 지중했음인가, 광우 스님이 정각사(正覺寺)를 짓던 해에 우리 집은 마침 삼선교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남별당 스님은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찾아가 보라고 권했다. 나는 교복을 벗은 대학생이 되었고 그분은 남장 차림의 양복이 아닌 먹물 옷을 입고 계셨다. 삭발로 드러난 둥그스름한 두상과 단아한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1960년, 이것이 광우 스님과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스님의 서가에서 김동화(金東華) 선생님의 저서 《불교학 개론》을 빌려와 읽기 시작했다. 당시는 실존주의 사상이 풍미하던 때라 카뮈(1960년 사망)나 사르트르를 읽어야 행세깨나 하는 줄 알던 때였다. 실험극장 단원이던 나는 우리의 연극 대본 외에도 사르트르의 희곡 《파리 떼》를 끼고 다녔다. 대학교 《교양국어》 책에 실린 ‘실존주의와 공(空) 사상’에 관한 박종홍 교수의 글은 마른 짚단에 불을 긋듯, 내 가슴에 옮겨 붙었다.
실존철학에 관해 물으러 갔더니 《금강경》을 보라는 하이데거의 말에 충격을 받고 돌아와 《금강경》을 공부하였다는 그분의 요지를 간추려, 함께 공부해보지 않겠느냐고 똑같은 걸 손으로 20여 장을 써서 각 대학교로 보냈다. 정각사 다다미방 법당은 대학생들로 꽉 찼다. 마침내 김동화 선생님을 모시고 《금강경》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군더더기 없이 본론에 충실한 선생님의 강의는 한 말씀도 놓칠 것이 없으련만 여름방학이 되자 법당에는 빈자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홍정식 선생님의 《법화경》 강의 이외에도 원의범, 황성기, 이영무, 김용정, 이재창 선생님들께서도 돌아가며 사이사이 특강을 해주셨다.
폭우가 사나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법당 말석에 앉은 내 심사도 그와 같았다. 갑자기 가족을 돌봐야 하는 급박한 상황, 어머니 모르게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돌아와 서울시청 직원(촉탁)으로 들어갔다. 친구들과 가는 길이 달라진 나는 더 이상 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직 어른도 아니었다. 대학 3학년짜리는 이제 막 시작한 인생이라는 한 장의 피륙 한복판을 제 손으로 칼로 긋고는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다. 실험극장의 스케줄도, 문학에 대한 꿈도, 학업도, 친구의 교제도 일시에 중단하고 스스로 외딴섬이 되어갔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타심통으로 관해 보셨던지 칠판에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쓰셨다.
“유구(有求)면 유고(有苦), 무구(無求)면 무고(無苦).”
구하지 마라. 구하는 게 있으면 고통이 있다. 온전히 나를 위해 쓰신 글귀였다. 그것을 본 순간, 벼락 치듯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 가슴속 멍울들이 과녁에 꽂힌 듯 그대로 줄줄이 녹아내렸다. 놓지 못하는 집착 때문에 생긴 괴로움이라는 걸 알았다. 놓자! 아무것도 구하지 말자. 마음을 텅 비우고 나니 안개 걷히듯 눈앞이 훤하게 트여왔다. 이때부터 나는 놓아버리는 습성을 익히게 되었던 것 같다. 억지로 가지려고 하기보다는 쉽게 버리는 쪽을 택해 왔다. 그것이 내 삶과 문학에 중심이 되었고 내 인생에 지족(知足)을 선물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 무렵, 밤새워 읽은 존 스타인벡의 《진주》도 무소유의 자유를 실감 나게 해주었다.
줄이 끊어진 악기처럼 아무것도 소망할 수 없을 때, 내면 깊숙한 곳에 무언가 천천히 차오르는 샘물, 누구의 것도 아닌 서러운 충일이었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때, 나는 버리는 것부터 배웠다. 그 때문인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간다는 토끼처럼 도중에서 아예 목적을 버리고 마는 버릇. 투망(投網)을 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또 ‘어획(漁獲)’ 그 자체를 버리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돌아오는 빈 배에는 달빛만이 가득하거니, 달빛만 가득하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무형(無形)의 그 달빛은 내게 있어 충분히 의미 있는 그 이상의 무엇이 되었으며 언제인가부터 나도 제 혼자서 차오르는 달처럼 내 안에서 만월을 이룩하고 싶었다. 저 무욕대비(無慾大悲)의 만월을.
〈빈 배에 가득한 달빛〉이라는 제목으로 쓴 필자의 졸문이다. 무욕대비의 만월은 비원(悲願)으로 연결되고, 비원은 관세음보살과 어머니의 합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슬픔이 있는 곳에 성지(聖地)가 있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토요일 오후, 퇴근해 돌아오니 오수에 든 듯 어머니가 혼자 딴 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인은 심장마비. 결국은 서모 집에 가 계신 아버지한테 동생들은 들어갔고 나는 형편도 안 되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김동화 선생님의 권유와 광우 스님의 주선으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편입을 하게 되었다. 장학금으로 학비는 면제됐으나 숙식이 문제였다. 가정교사로 들어갔다가 가방을 들고 다시 나와야 했다.
남의 집 뒷방, 사납게 창문을 두드리는 칼바람, 점점 더 맑게 깨어나는 의식, 수유리 자취방에서 헤세의 《싯다르타》를 중심으로 〈서구 작가와 불교적 경향〉이란 글을 써서 학교로 갔다. 수업이 끝난 뒤 찻집에서 어울린 고익진 씨가 탄성을 올리며 〈동대신문〉에 전문을 실어주었다. 불교문학회 총무이던 송영섭 시인이 모임에 참석하라는 엽서를 몇 차례 보내왔지만, 무직의 학생에겐 호구가 먼저였다. 원의범 교수가 찾아와 여러 방안을 제시했으나 역시 학업도 사치인가.
그때 경봉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해 학기가 시작되기 전, 여행 겸 경봉 스님을 뵙고 싶어 통도사 극락암을 찾았다. 우연히 같은 버스에서 동행이 된 스님과 소달구지를 타고 짙푸른 녹음 속으로 들어갔다. 전생에 와본 듯 낯설지 않았다. 극락암의 노스님은 글씨를 쓰고 계셨다.
극락암
묵향이 확 끼쳐왔다. 삼배를 드리고 나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셨다. 서울에서 왔으며 정각사의 광우 스님, 그리고 김동화 선생님을 모시고 《금강경》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스님은 넌지시 안경 너머 나를 건너다보시더니 “자네 방석을 뒤집어 깔고 앉았군!” 하셨다. 그건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에 발심을 낸 것을 지적한 말씀이다.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내게 결혼 운이 보였던지 “마아, 결혼해도 부처님 일을 하게 될끼다”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생전 처음 보는 짙푸른 녹차(말차였음) 한 사발을 건네주셨다. 몹시 떫고 썼다. 옆에는 아직 덜 마른 글씨가 놓여 있었다. 한번 새겨보라고 하셨다. 지금 우리 집 거실에 있는 족자이다.
觀音菩薩大醫王 甘露甁中法水香
灑濯魔雲生瑞氣 消除熱惱獲淸凉
관세음보살은 대의왕이시니, 감로 병에 든 법수의 향기가
마운을 쇄탁하자 서기가 생하고, 열뇌를 소제하니 청량을 얻는도다.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물러 나오는데 바쁘게 쫓아와 “보살님, 노장님께서 하룻밤 묵어가시래요.” 그때의 스님은 석정 스님의 상좌 무용(전각가) 스님이었다.
8월의 녹음 속에 등나무 의자를 마당에 내놓고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을 읽고 계신 분은 철웅 스님이었다. 경남 일대에 파다한 소문을 들었던 터라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무슨 호기심일까? 스님은 나를 처소로 안내하더니 시자에게 다짜고짜 “회초리를 꺾어오라”고 하고는 내게 《반야심경》을 외워보라고 했다. 졸지에 벌어진 긴박한 상황, 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외쳤다. 스님은 껄껄 웃더니 “공(空)이냐, 색(色)이냐?” 하고 회초리로 땅바닥을 내리쳤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공야(空耶) 유야(有耶) 오미지기소이(吾未知其所以)로다.” 불쑥 튀어나온 말이다. 공인가 유인가. 나는 아직 그 소이를 알지 못함이로다. 야부 스님의 게송으로 얼마 전 홍정식 선생님의 부채에서 읽었던 글귀였다.
철웅 스님은 큰 소리로 웃고 나는 웃음소리에 안도가 되었지만 사실 공이나 유를 말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1966년 여름의 일이다. 일 년 뒤 똑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화계사로 숭산 스님을 찾아뵈었는데 마침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동석해 있었다. 스님은 찻상에 놓인 잘 익은 사과 한 알을 불쑥 내 앞에 들이대며 “색(色)이냐, 공(空)이냐?” 답하라는 것이다. 기습적인 그날의 강타는 내 안에 똬리를 틀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서 먹을 것을… 그러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경봉 스님은 고소원이나 불감청이던 화두를 내려주셨다. ‘이 뭣꼬?(시심마)’였다. 그리고 친필 석 장을 선물로 주셨다. 그곳에서의 감격을 〈극락지일야(極樂之一夜)〉라는 글로 썼더니 〈불교신문〉의 박경훈 선생께서 전문을 실어주셨다.
스님의 예견대로 학업을 못 마치고 안착할 둥지가 필요한 나는 일상 속으로 돌아와 가정주부가 되었다. 열 식구의 대가족에 손님까지 고달픈 나날, 첫 아이를 조산하였는데 인큐베이터에서 한 달을 남겨놓고 퇴원한 아이는 밤새 고열로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펄펄 끓는 아이를 안고 나도 모르게 부처님께 약속드렸다. “부처님, 10년 동안 부처님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라는 대로 종질이라도 하겠습니다. 아이를 살려주십시오.”라고 간구하였다.
병원에 가니 의사는 고개를 젓고 간호사가 귀에 맨소래담 연고를 발라주었다. 아이를 안고 돌아오는데 옆에 영구차가 스쳐 지나갔다.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이틀이 지나 아이는 점점 나아졌고 며칠 뒤 정각사 광우 스님께서 우리 집으로 건너오셨다. 청년법회를 지도하는 서윤길 선생이 학생들과 ‘소식지’를 만들어 왔는데 그것이 끊어지게 되었으니 해보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그 자리에서 약속을 드렸다.
신행불교
‘바로 믿고[正信] 바로 행해[正行] 참사람 되자’는 근본이념으로 ‘신행회’를 설립하고 《신행회보》를 펴내기에 이르렀다. 1969년 2월의 일이다. 등사판으로 시작된 《신행회보》가 광우 스님의 원력으로 《신행불교》로 제호를 바꾸면서 문서포교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그 시대에 작은 등불의 역할이나마 감당해왔다고 자부한다.
김동화 선생님의 권두언, 김대은 스님의 설화 연재, 석정 스님의 선시 해석, 광우 스님의 경전 해석 등과 박선영, 이원명, 원의범, 목정배 등 동국대 소장파 교수들의 원고와 ‘노수인(盧樹仁)’이라는 필명으로 쓴 나의 원고와 편집실 제공의 ‘여여석(如如席)’ 등으로 꾸려나갔다.
김동화 선생님의 원고를 받으러 수유리의 쌍문동 자택으로 찾아뵈면 언제나 한복 차림으로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계셨다. 《묘법연화경》에서 따와 ‘실상(實相)’이라는 불명을 내려주셨다. 동국대 불교대학장으로 계시던 선생님 방에는 김인덕 선생이 조교로 근무했는데, 내가 불쑥 찾아가면 도시락을 나눠주시는 바람에 딴 데서 시간을 보내야 했고, 퇴근 무렵 지프차에 태워주셔서 좋아라 했더니 을지로4가 전차 정거장에서 내리라고 하셨다. 전차표 한 장을 건네주면서. 선생님 댁은 돈암동이라 삼선교에서 나를 내려주면 될 것인데……. 서운했으나 선생님의 기준에 승복할 따름이었다. 1980년 이른 봄, 국립의료원으로 문병 갔을 때의 선생님 모습이 요즘 부쩍 더 생각난다.
누워 계신 선생님은 손으로 당신 몸을 가리키며 “이게 많이 아파.”라고 하셨다. 내가 아픈 게 아니라 이 몸뚱이가 아프다는 말씀이겠다. 몸에서 마음을 떼어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도 마음만은 아프지 않은 평정에 들도록 나 자신도 노력하는 중이다.
《유마경》 강의 외에도 선생님께서 손수 가려 뽑은 《신행법요집》의 《반야심경》 《화엄경》 〈야마천궁보살설게품〉 《묘법연화경》 〈방편품〉 등의 강의는 잊을 수 없다.
“내가 만약 칼산을 향하면 칼날이 저절로 부러지고, 내가 만약 화탕을 향하면 불꽃들이 저절로 소멸되며…… 내가 만약 아귀를 향하면 아귀들이 저절로 배가 불러지고……”
관세음보살의 10대원문은 나를 성스러운 대비심으로 이끌었다. 불연(佛緣)은 불연이었다. 극락암에서 내가 머무른 방은 출타 중이신 석정 스님 방이었는데 그로부터 5년 뒤 법련사 현호 스님이 주관한 서울신문회관 전시회에서 석정 스님을 직접 뵐 수 있었다. 선구를 곁들인 달마도는 친근했다. 그 후 남편의 직장을 따라 부산에 가게 되었는데 온천장 길거리에서 스님을 만났다. 우리는 부산대학교 뒷마을에 살았고 스님은 금어암에 계셨는데 같은 동네(장전동)라서 자주 찾아뵙게 되었다. 석정 스님께서는 1973년부터 《신행불교》에 연재를 시작하여 1995년 겨울호로 막을 내리면서 〈신행불교회향송〉을 지어 보내셨는데 광우 스님과 맹 보살의 이름을 넣었다면서 이렇게 적었다.
“천우감로지기윤(天雨甘露地己潤) 난무직장향부진(蘭茂直場香不盡)”
풀기 빳빳한 두루마기를 입고 어느 날 스님은 낙산사 관세음보살을 조성한 권정학 씨와 함께 우거를 방문해주셨다. 주방 도구가 불비한 터라 손쉬운 카레라이스를 대접했던 게 생각난다. 부산에 사는 3년 동안은 《신행불교》 일과 불서를 읽으며 청빈하게 지냈다. 〈불교신문〉에 공지(1974)된 ‘성자 이차돈 추모선양회’에서 추모시를 현상모집한다기에 졸작을 보냈는데 그것이 자유시에 당선되었다(심사위원 서정주). 서울 대방동 공군사관학교에 시비로 건립되었다.
미운(迷雲) 가득한 하늘에
일부러 골라 나시어
종(鐘) 울리고 쓰러진 까치모냥
스스로 몸 던져
불일(佛日)을 밝게 하시다.
반야(般若)의 칼날
신라의 빈 허공을 내리칠 적에
떨어진 건 환화(幻花)요
법신(法身)만이 남았다네.
한번 죽어 영원히 사시니
영광(靈光)은 도리어 하늘에 닿았고
정혜수(定慧水) 젖피로
마도(魔徒)를 항복 받으시다
장하다 님의 넋이여
마른나무
꽃 피워 보여주시니
이 소식 모르는 이
천대(千代)에 없어라.
청천(靑天), 불일(佛日)이여.
만고광명(萬古光明) 되시었네.
진흙 속의 연(蓮) 한 가지
님의 뜻으로 받드오리.
(丹心을 삼가 靈前에 기울이며 1974.2.26. 孟蘭子 合掌)
윤일선 스님께서 고승대덕 스님들의 추모시(한시)와 자유시를 묶어 《이차돈의 순교사상》이라는 책으로 출간하셨다.
경봉 스님의 “절 마당까지 택시가 들어오니 한번 다녀가라”는 서신을 받고 아이들을 데리고 극락암을 찾았다. 다섯 살, 세 살짜리 꼬마를 스님은 양 무릎에 앉히시고 “마아, 이게 니 사리(舍利)다.”라고 하셨다. 어느새 47년이나 지난 지금 돌아보니 그건 사리가 아니라 ‘업장’이었음을 깨닫는다. 그 뒤 스님께서는 시자에게 받아 적게 해서 쓴 장장 다섯 쪽짜리의 글월을 보내 다시 한번 나를 일깨워주셨다.
…… 보살의 이름이 蘭子라 하였으니…… 어떤 난초인지 모르겠소. 난초에는 山蘭, 野蘭, 石蘭, 風蘭, 春蘭 등 수십 가지가 있는데 어떤 난초인지 이름을 蘭子라고만 하였으니 명백한 난초가 아니고 이름 하니 내가 한번 물어보는 것이니 내 이 묻는 답을 잘하면 도인의 생활과 다름이 없으니 도는 진리요, 진리는 우리 인생의 생명이니 도를 찾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찾는 것이니 부디 도에 합치하여 진리적으로 살면 세상에 있더라도 출격대장부가 되는 법이니 멋지게 한 세상사라는 말이요……(하략)
무슨 난(蘭)인가? 이름을 ‘난자’라고 말하였으니 본질은 명백한 난자가 아닐 터. 그냥 이름이 난자일 뿐이라는 답까지 묻어둔 노사의 친절에 다만 감읍할 따름이다.
이름 이전에 나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도를 찾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찾는 것’이라는 노사의 말씀이 뒤늦게 간절하다. 이 밤, 오롯하게 깨어 있는 본질, 바로 이것[生命] 아닌가. 현존(現存)과 마주하는 순수의식, 여기에 어찌 이름이 붙고 모양이 붙을 수 있겠는가.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의 법성게 한 구절이 떠올랐다.
‘유명론(唯名論)’을 확립한 영국의 철학자 오컴(1280~1349)은 이름[보편자]이란 발생의 결과가 아니라 추상의 결과로서 단지 일종의 정신적 상상이라고 했다, 사고(思考)가 문자 그대로 언어라며 언어는 생각을 실어 나르기 위한 도구로서 존재할 뿐, 우리 정신이 만들어낸 허구로서 실체가 없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그것들은 단지 개념적 명칭에 지나지 않고 명칭은 비실재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의해서 지시되는 사물도 비실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는 분별이 지은 것으로 공, 무소유, 허망, 부실(不實)”이라고 한 《대반야경》의 말씀과 다르지 않았다.
‘이름이란 실질의 나그네(名者實之賓也)요’(장자), “언어에 ‘본질’ 같은 것은 없다”던 비트겐슈타인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본질은 명백한 난자가 아닐 터’ 그렇다면 본질은 무엇인가? ‘이 뭣꼬’ 경봉 스님의 음성과 극락암에서 화두를 받던 그날의 감격이 여기에 겹쳐온다.
삼일암
남편의 전근으로 1976년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 법련사에서 구산 스님을 뵈었는데 송광사에 같이 가자고 하시어 다음날 친구 두 명과 아이들을 데리고 터미널로 나갔다. 동행인 법정 스님은 김정숙(당시 《현대문학》 근무) 씨와 그분의 조카를 대동하여 함께 시외버스를 타고 송광사로 향했다. 광주에서 점심 식사할 때 먹던 달고 시원한 무등산 수박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불일암에 계신 법정 스님은 아침이면 커피 타임에 건너오셨다. 노장님이 자꾸 불러올린다고 하니 “구산(9산)이 허물어지려면 한참 멀었다”고 하셔서 크게 웃었던 일이 떠오른다.
삼일암에서 구산 스님께 수계를 받고 연비를 하였다. 업장을 태우듯 촛불 심지가 팔뚝을 태울 때, 까닭 모를 눈물이 많이도 흘렀다. 그날 계첩과 함께 ‘석란향(石蘭香)’이라는 불명을 받았다. 시정(詩情)이 넘치는 스님께서는 산책 중에도 입만 여시면 시가 흘러나왔다. 삼일암 마당의 배롱나무 밑에서 읊어주시던 시구는 잊었지만, 인자한 모습과 웃으시면 눈이 더 작아지는 스님 모습이 그립다.
2000년 5월, 파리에 머물 때였다. 법정 스님께서 부처님오신날 기념법회 차 파리 길상사에 오셨다는 소문이 들렸다. 우중을 무릅쓰고 낯선 곳을 찾아 남편과 법당에 가 앉았다. 스님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불명을 지어주고 연비를 시작했다. 맨 뒷줄에서 왼팔을 들고 선 나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반가워하시던 모습도 추억이 되었다.
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69년 조계사 근처 지하다방이었다. 홍정식 선생님이 내 취직을 부탁하신 자리였다. 명동 입구에 있는 〈대한불교〉(불교신문 전신)에 출근했으나 한상범 교수가 가끔 나오고 신문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 졸저를 보내드리면 스님께서도 서명해서 보내주셨다.
졸저 《라데팡스의 불빛》을 ‘내가 사랑하는 책’ 목록에 넣어주고 ‘맑고 향기롭게’의 독서토론 책으로 추천해 성북동 길상사에서 독서토론회에 참석하는 기쁨을 누렸다. 마음을 다루는 ‘수필’은 불교적 성찰을 통해 자기 발견으로 나아가는 구도의 여정임을 깨닫는다. 불교철학과 인문적 글쓰기에는 수필이 최적의 장르라고 생각된다. 2004년 흑석동 달마사에서 문을 연 ‘달마문예대학’에서 수필반 학생들과 공부할 수 있었던 일도 보람으로 여긴다.
무문회(無門會)
1976년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장 이후락(月波居士) 씨의 부인 정보현행 보살이 봉선사 신도회장(無門會)이 되어, 필자를 총무로 명해 함께 많은 일을 했다. 이운허 스님을 모시고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일요일 아침 《능엄경》 법회를 열었다. 스님의 노환으로 월운 스님이 속강을 해 마쳤다. 금촌 나환자촌에 주택지를 구입해주고, 반영규 씨의 도움으로 《찬불가》를 찍어 필요한 곳에 책을 널리 보급하였다. ‘무문회’의 지원으로 안청정행 보살과 서대문교도소의 교화위원으로 법회에 참여했다. 언행에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기에 얼마나 긴장했던지 담 밖으로 나오면 하늘은 너무나도 파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방향감각을 잃곤 했다.
정수직업훈련원(현 정수기능대학) 국어교사로 재직했을 때라 외출증을 끊고 택시로 바쁘게 오가야 했다. 《신행불교》 10년을 채우고 나니 정수직업훈련원에 발령을 받게 된 것이다. 교사자격증을 취득하여 국어교사로 6년간 봉직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 년 동안 기술을 배워 취직해야 하는 기능 청소년들의 의지처가 되어주라고 부처님께서 이곳에 보낸 게 아닌가 생각이 된다고 말씀드리니 홍정식 선생님께서는 “이 또한 불은(佛恩)이렸다”라고 하셨다. 국어 수업 외에 예술제, 도서실 운영, 개인 상담 등으로 아이들의 고충과 마주하며 정서순화에 도움이 되도록 애썼다. 내 일생 중 가장 보람 있는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늦은 어느 가을날 수업 도중에 걸려온 전화는 ‘시부모님의 연탄가스 중독, 의식불명. ○○병원 응급실’이라는 전갈이었다. 어머님은 의식 없는 상태에서 3년 뒤에 돌아가시고 시아버님은 우리 집에서 모시게 되었는데 당뇨가 심해지고 거동이 어려우셨다. 어떤 날은 빠진 생이빨이 식판에 놓여 있어 한동안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인가? 하루하루 달라져 가는 모습, 책에서 읽은 백골관 수행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의 최후 모습은 어땠을까? 그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장례를 치른 뒤 도서관에 가서 죽음에 관련된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죽음 탐구
그것이 1998년 《남산이 북산을 보고 웃네》로 묶여 나왔다. 동서고금의 인물 100여 명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 있다. 6개월 뒤 개정판에서 이차돈과 바울, 칸트와 키르케고르 등 몇 사람을 추가하고 제9장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에 누락되었던 원고 〈불교의 죽음관〉을 찾아 넣었다. 어떻게 자신을 버려야 할지를 아는 자만이 어떻게 있어야 할지를 알게 된다는 라즈니쉬의 말을 실존을 위한 죽음의 근거로 삼고 싶었다. 사실 어떻게 하면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를 위해 이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제9장에 비중을 두었던 셈이다.
중국의 경통(景通) 선사는 촛불을 켜들고 장작더미로 올랐다. 제자들의 염불하는 모습과 흐느낌을 내려다보면서 고요히 입적(入寂)에 들었다.
“내가 갈 곳이 있다”면서 지팡이를 짚고 신발을 신는 순간 입적에 든 단하천연(丹霞天然) 선사. 그런가 하면 청활(淸豁) 스님은 “내가 죽거든 시체는 숲에다 갖다 버려라. 마지막으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새나 짐승들에게 보시하라”는 말을 마치자 호두산으로 들어가 반석 위에 앉아 열반에 들었다. 깨달은 이는 적멸상을 통해 이미 죽음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죽음관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따로 없다는 것이며, 그것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다.
책의 개정판까지 절판되자 무구 스님께서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기억하라》로 다시 인쇄해주셨다. 이 책으로 2009년 5월, 불교여성개발원에서 웰다잉 특강과 북 사인회(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공연장)를 할 수 있었다. 일 년 뒤 불교여성개발원 웰다잉 운동본부(김애주 원장)에서는 이근후 박사, 월호 스님을 비롯한 10명의 필진을 구성하여 《아름다운 마침표》를 발간하였다. 필자는 〈죽음의 무도회-그 빛나는 최후〉라는 글로 참여하였다. 나중에는 작가들의 죽음에 대한 자의식과 그것이 문학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작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음의 장소인 자살 현장과 묘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인생은 아름다워라》와 《그들 앞에 서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Ⅰ·Ⅱ로 출간되었다.
쇼펜하우어,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 데리다, 오컴,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와 문필가 대부분은 불교적 성찰로 사유했으며 그것이 또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사유의 정점인 것도 알게 되었다.
“인생 그 자체는 하나의 환상적이고 한바탕 꿈일 뿐이야.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모든 것은 꿈이지…….”
마크 트웨인이 설파한 ‘인생’,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거기에 막이 오르면 사무엘 베케트는 “아무도 이곳에 온 일이 없고, 아무도 여기를 떠나지 않았으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현상과 달리 본질에서는 와도 온 바가 없고, 간다고 해도 갈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일찍이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다는 것을 예이츠는 그의 시집 《탑》에서 “죽음과 삶은 본래 존재하지 않았다”고 언급한다. 그런가 하면 불생불멸의 도리를 소동파는 〈적벽부〉에서 좀 더 쉽고 간명한 언어로 풀어냈다. 이들의 무덤 앞에 서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 듯 눈앞이 환해져 왔다. 몽테뉴, 토마스 만, 카잔차키스, 말라르메, 도연명, 카뮈, 헤세, 보르헤스의 작품에서도 불교적 사유의 근간을 발견하고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현대불교신문〉에 연재된 19명 작가들의 글을 모아 《불교로 읽는 고전문학》을 펴낸 바 있다(2018년). 이보다 좋은 포교가 있을까.
정각사 법당은 한국불교의 산실이며 불교문학의 요람이었다. 1971년 유정동, 강두식 박사와 소설가 유주현, 최남백, 오정희, 시인 어효선, 김후란, 허영자, 석지현 등 문인들을 중심으로 펼쳐진 김구용 선생의 《벽암록》 강의는 우리를 환희심 넘치는 개안(開眼)으로 이끌었다.
1999년부터 지하철 게시판 〈풍경소리〉(한국불교종단협의회 부설)에서 김원각 시인과 호흡을 맞춰 법음을 전하고자 애썼던 시간들도 소중하다. 샘터사에서 몇 권의 책으로 《풍경소리》를 묶어주기도 했다.
부처님 말씀으로 이 사회가 청정한 불국토가 되기를 염원하며 굽은 손으로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 “니 결혼해도 마아 불교 할끼다.”라던 경봉 스님의 말씀대로 내 일생은 불은(佛恩) 속에서 동동거렸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불교로 문학 하기, 문학으로 불교 하기를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
맹난자
수필가. 이화여대 국문과, 동국대 불교학과 수학. 월간 《신행불교》 편집장, 《에세이문학》 발행인,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 지하철 게시판 〈풍경소리〉 편집위원장 등 역임. 저서로 수상록 《본래 그 자리》 수필집 《빈 배에 가득한 달빛》 《사유의 뜰》 《만목의 가을》 등과, 묘지 기행 《인생은 아름다워라》 《주역에게 길을 묻다》 등 다수. 현대수필문학상, 남촌문학상, 정경문학상, 조경희수필문학 대상, 현대수필문학 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