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는 목표란 뜻이 아니다
화두(話頭)라는 말을 자주 듣기도 하고 또 쓰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화두가 어떤 개념을 가진 말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화두는 불교 선종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마음속에 들고 있는 하나의 ‘문제’로서 공안(公案) 또는 고칙(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의 ‘화(話)’는 말이라는 뜻이고, ‘두(頭)’는 머리, 즉 앞서 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 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다. 공안의 ‘공(公)’은 ‘공중(公衆), 누구든지’라는 뜻이고, ‘안(案)’은 방안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누구든지 이 공안을 붙들고 있으면 그것이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화두는 우리가 흔히 듣고 있는 ‘이 뭣고?’와 같이 생각을 집중시키는 말머리로서, 하나의 답이 나오는 수학 문제 같은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하나의 아포리아(aporia)다. 처음부터 답이 없는 문제다.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놓지 않고 일심으로 의심하며 그저 참구(參究 참선하여 진리를 찾음)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물음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이를 선문답(禪問答)이라고 한다.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는 어떤 승려가 조주스님에게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답한 것이고, ‘삼 서 근[麻三斤]’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는 제자의 물음에 운문종(雲門宗)의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답한 것이다. 또 ‘마른 똥막대기’는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문언선사(文偃禪師)가 던진 화두다.
달마가 불법을 전하기 위하여 서쪽에서 온 이유가 어찌 ‘뜰 앞의 잣나무’가 될 수 있으며, 무엇이 부처냐고 하는 물음의 답이 어찌 ‘삼[蔴] 서[三] 근(斤)’이나 ‘마른 똥막대기’가 될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와 같이 화두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고 있는 문답에 대하여 의문을 일으켜 그 해답을 구하는 것이다.
이 화두를 가지고 간절히 참구하면 마침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들 때는 갈 때나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항상 화두에 몰두하여야 한다. 심지어 성철은 꿈속에서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화두를 들 때는 닭이 알을 품은 것과 같이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며,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듯 해야 한다고 일러 왔다. 이렇듯 간절한 마음이 없이 깨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듯 간절한 마음을 강조하는 경지를 나타내는 선문답에 ‘구지(俱胝) 선사가 손가락을 세우다[俱胝豎指]’란 것이 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 구지(俱胝)화상은 누가 불법을 물으면 말없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그래서 ‘구지일지선(俱胝一指禪)’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런데 구지 화상과 함께 살던 동자승이 있었는데, 스승이 없을 때 사람들이 법을 물으러 오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스승을 흉내 내어 얼른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이곤 했다. 이 소문을 들은 어느 날, 구지 선사는 동자승을 불러 “어떤 것이 부처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역시 동자는 얼른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순간 구지 선사는 칼로 그 손가락을 싹둑 잘라 버렸다. 동자승이 고통스러워 울면서 산문으로 도망을 갔다. 그때 선사는 달아나는 동자를 불렀다. 그러자 선사는 뒤를 돌아보는 동자에게 손가락을 세워보라고 하였다. 동자승은 손가락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잊은 채 손가락을 세우려고 하였다. 바로 그때 동자승은 홀연히 깨달았다고 한다.
부처 되는 법이 ‘왜 손가락 하나일까?’라는 것이 구지일지선이 주는 화두다. 일반 상식으로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수행자는 ‘불법이 왜 손가락 하나일까?’라는 이 물음을 들고 밤이나 낮이나 의심에 몰두한다. 언젠가 이 화두를 뚫으면 마침내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끝머리에 나오는 동자승의 깨달음도 모든 번뇌를 물리치고 화두에 몰두하는 것과 같이, 손가락이 없어졌다는 것을 잊은 채 손가락을 세우려고 한, 몰입무아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선가에서는 보통 1700여 가지의 공안이 있다고 하는데, 그 공안을 모아 소개하고 있는 대표적인 선어록으로 무문(無門) 혜개(慧開)선사의 무문관(無門關)과 원오 극근(克勤)선사의 벽암록(碧巖錄)이 있다. 그렇다고 하여 공안이 꼭 1700여 개뿐이라는 말은 아니다. 유명한 선승들의 어록에 담긴 공안을 합치면 수없이 많다.
그 중 가장 많은 공안을 남긴 고승은 중국의 조주(趙州) 선사라 할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무(無)’ 자 화두는 조주 선사와 한 학인의 문답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생긴 배경담은 이러하다.
어느 때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에 조주선사가 대답했다.
“없다(無).”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십니까?”
부처님은 ‘일체중생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一切衆生皆有佛性] 즉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든 중생은 닦으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에 나오는 수행승도 이 말을 떠올리고 조주에게 질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조주는 ‘없다(無)’고 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조주의 말을 따르면 분명 부처님은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개에게는 왜 불성이 없다 했을까?’라는 문제를 들고 왜 그럴까 하는 의심에 빠지게 될 것인바, 이것이 곧 ‘무(無)’자 화두다.
이처럼 화두는 마음을 한데 모으는 하나의 수행방법이다. 원래부터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풀리지 않는 ‘의심 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면 ‘남전이 고양이 목을 치다’[南泉斬猫]라는 화두 하나를 더 보자.
대선사 남전(南泉) 아래에서 조주(趙州)가 공부 할 때의 일이다. 이 절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여느 고양이가 다 그렇듯이, 이 고양이도 이 건물 저 건물, 이 방 저 방을 오가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쪽 선원 승려들과 서쪽 선원 승려들 간에, 고양이를 놓고 시비가 붙었다. 그 내용인즉, 고양이가 서로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다툼이었다. 이를 보던 남전이 고양이를 움켜잡고는, “누구든지 이 고양이가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 말해 보라. 그러면 살려주고 그렇지 못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칼을 들었다.
대중 가운데 그 누구도 대답을 못했다. 대답을 못 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이 방 저 방을 왔다 갔다 하는 고양이를, 꼭 집어 누구의 고양이라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남전은 들고 있던 칼로 고양이를 베어 죽여 버렸다. 살생을 금하고 있는 불가에서 고양이를 죽였으니, 이를 본 대중은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마침 외출했던 조주가 돌아와 스승 남전에게 인사를 드리니, 남전이 조주를 보고 “너 같으면 어떻게 답하겠느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발을 거꾸로 해서 머리에 이고 나가 버렸다. 그러자 남전이 “조주가 그때 있었다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주가 왜 신발을 거꾸로 해서 머리에 이고 갔을까’라는 질문을 계속하여 참구하는 것이 바로 남전참묘(南泉斬猫)의 화두다.
*남전(南泉): 이 분을 가리킬 때는, 통상적으로 ‘남천’이라 읽지 않고 ‘남전’이라 읽음.
이와 같이 화두는 의문을 지닐 뿐, 정해진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답이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답이 없는 문제를 들고 의문을 갖고 분심(憤心)을 내어 참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루어야 할 목표나 수치를 화두에 비의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금년의 화두는 사법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다’, ‘올해 경제 정책의 화두는 물가를 잡는 데 있다.’와 같이, 화두란 말을 목표란 뜻으로 쓰고 있다. 물론 그런 말을 쓰는 이는 화두처럼 늘 그것에 생각을 쏟는다는 확대된 의미로 쓰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화두는 목표처럼 정해진 결과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물가처럼 측정할 수 있는 사상(事象)도 아니거니와, 목표처럼 달성할 수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개념도 아니다. 화두는 강한 의심을 수반하는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그런 예에서는 그런 뜻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화두를 목표란 말의 대용으로 쓰는 것은 엄밀히 말해 적절하지 못하다. ‘화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데서 나온 소치다. 화두는 정신을 집중시키기 위한 하나의 문제이지 목표가 아니므로, 화두를 목표와 같은 뜻으로 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굳이 화두란 말을 다른 데에 비의해서 쓰려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나 ‘고민해야 할 난제’ 또는 ‘이슈’라는 뜻으로 써야 한다. ‘낮은 출산율 문제는 해결해야 할 중요한 화두다.’, ‘남북통일은 우리가 안고 있는 하나의 화두다.’와 같이 쓰면 되겠다.
어느 신문의 기자가 쓴 글에, “이번 게티즈버그 방문은 지난 3년간 워싱턴에서 매달렸던 ‘미국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정리하는 데 나름대로 도움이 됐다.”라는 문장이 있었는데, 이 경우의 화두는 맞게 쓰였다.
첫댓글 저도 원심 스님으로부터 여기 말씀하신 많은 이야기들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강조하시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