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감사하지 못합니까
출 16: 1-7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제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간구하는 것처럼, 복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은혜를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만큼 받은 은혜에 크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복을 거두실 것입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고 취하시는 자도 여호와이십니다. 감사의 반대는 원망과 시비입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뱀을 보냈습니다. 감사는 축복을 부르지만, 원망은 불뱀을 부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얼마나 건강한지를 알아보려면 얼마나 감사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감사하는 만큼 은혜가 있고, 감사하는 만큼 축복을 받습니다. 별빛만한 감사를 하면 달빛만한 감사를 주고, 달빛만한 감사를 하면 햇빛만한 감사를 주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감사가 넘칩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좋은 미래가 있습니다. 감사는 우리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예수님께 고침 받은 열명의 문둥병자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아홉은 고침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고침 받은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감사할 일이 많지만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90% 이상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돌아와 감사하는 한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혹 감사를 모르고 세상으로 나갔던 아홉 사람 중에도 다시 돌아와 감사하기 바랍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감사합시다. 감사를 잃은 분들은 다시 돌아와 감사하는 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왜 감사하지 못합니까
1절을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1절).”
양식이 떨어지고 주변의 환경이 바뀌었다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1월 15일에 애굽을 떠나서 2월 15일에 신광야에 도착했습니다. 한 달 동안 여행을 하면서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장정만 60만명, 노인과 아이까지 합치면 200만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한 달 동안 먹었습니다. 여기는 신 광야입니다. 풍요로운 애굽의 땅이 아닙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멀고 사막에는 풀 한포기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양식을 구할 것입니까? 앞이 캄캄합니다. 이제 양식이 떨어졌구나! 걱정이 넘쳐서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한 달 전에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애굽을 떠났습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 사람들이 항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목격했습니다. 홍해바다 앞에서 바로왕의 추격을 받습니다. 홍해바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갈 수 없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모세는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홍해바다가 육지처럼 길이 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면서 홍해바다를 걸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애굽의 병거와 군대는 물에 빠져죽었습니다. 마라에 도착했을 때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쓴 물을 달게 해서 먹었습니다. 한 달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보았습니다. 기적을 일상처럼 보고 살았습니다. 남에게 들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신 광야에 도착했을 때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할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한 달을 돌아보고 하나님이 이번에 하실 일을 기대해야 합니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짐승은 본능적으로 행동합니다.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 즉흥적으로 행동합니다. 배부르면 좋고 배고프면 싫습니다. 좋고 싫은 감정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과 다릅니다. 생각이 있습니다. 환경을 극복할 능력이 있습니다. 배고파도 참을 줄 알고, 싫어도 견딥니다. 자신을 다스리고 앞뒤를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변했다고 원망하면 안 됩니다. 항상 건강한 것 아닙니다. 병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항상 부자가 아닙니다. 물질이 떠나서 가난해질 수도 있습니다. 항상 명예가 따라다니는 것 아닙니다. 누명을 쓰고 명예를 잃고 외로운 자리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항상 승승장구 하는 것 아닙니다. 실패의 쓴잔을 마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원망해서 안 됩니다. 주변의 상황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습니다. 나쁘게도 변하지만 좋게도 변할 수 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를 부유케 하고, 실패한 자를 성공케 합니다. 낙심할 것 없습니다. 내일이면 어떻게 역사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합니다. 초등학교 때 영재가 대학갈 때 영재가 아닌 경우도 ㅎ다합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1학년 때 잘하던 아이가 3학년까지 잘하는 것 아닙니다. 3학년 때에도 성적이 뒤바뀝니다. 시험이 쉽게 나오면 점수를 잘 받는 아이들이 있고, 시험이 어렵게 나오면 상대적으로 점수를 잘 받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시험이 쉬우면 열심히 한 아이들이 점수를 잘 받고 시험이 어렵게 나오면 깊이 있게 공부한 아이들이 유리합니다. 사람의 앞날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쉽게 낙심하고 좌절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는 신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일정하게 감사한 마음을 유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 달 만에 마음이 변해서 되겠습니까? 구원의 감격이 원망과 비난으로 바뀌어서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12월 첫 주일이면 창립 10주년을 맞이합니다. 짧은 역사지만 길게 느껴집니다. 10년을 한결같이 견디는 사람이 몇 손가락 꼽을 정도입니다. 감사패라도 줄 생각입니다. 거주의 이동이 심한 세대도 문제이지만,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한 달도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신실성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3절을 봅시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대단히 악의적이고 감정적인 원망입니다. 원망은 합리적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부풀려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있었던 시절이 좋았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당시는 이스라엘 사람이 남자 아이들을 낳으면 죽어야 했습니다. 종일 중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애굽의 노예생활이 뭐가 그렇게 좋았습니까? 간혹 고기와 떡도 먹었습니다. 삶의 질이 높아서 먹은 것이 아닙니다. 노예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유하고 풍요롭게 지낸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고 노동하기 위해서 먹은 떡입니다. 그것을 좋았다고 합니다. 노예근성입니다.
과거를 미화하고 현재를 불평하는 것도 감정적입니다. 과거는 아무리 좋아도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지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과거를 생각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함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가 좋았다고 하니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입니까? 책임성 있고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예날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자 마음을 바꾸어서 원망을 쏟아냅니다. 죽었으면 좋았다고 합니다. 막말을 합니다. 대통령이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막말을 해서 문제가 되고, 국무총리가 야당을 보수꼴통 차떼기당이라고 국회에서 비난하는 막말을 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막말이 문제입니다. 죽을 사람을 살려 놓으니까, 왜 나를 살렸냐고 합니다. 죽고 싶다는 것이 진실입니까까? 아닙니다. 날마다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냈습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쳤기 때문에 살려준 것입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다면 좋았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감정적이고 기분에 좌우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썩은 사과 하나가 온 상자를 썩게 합니다. 남들이 원망한다고 우리도 원망해서 안 됩니다. 시절이 어수선하고 남들이 원망한다고 우리가 원망할 필요 없습니다. 과연 우리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슨 재벌의 2세였습니까? 병들거나 늙지 않는 불사조의 후손이었습니까?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갈 사람입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고 흙으로 돌아갈 사람입니다. 인생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혹 우리에게 지난날이 좋았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좋은 날이 끝났다고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그 동안에 잘 봐 주신 것으로 감사합니다. 좋은 직장을 주시고, 좋은 부모를 주시고, 좋은 남편과 아내를 주시고, 좋은 교회를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지금까지 은혜 주신 것만도 감사합니다.
우리도 얼마나 간사한지 모릅니다. 일이 잘 된다 싶으면 교만하고 자기 자랑합니다. 일이 안 되면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다 감정입니다. 잘 나갈 때에는 죽음이란 말을 입 밖에 꺼내지도 않습니다. 일이 안 되면 죽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때마다 우리를 죽이셨다면 아마 수십 번도 더 죽었을 것입니다. 혹시 원망할 일이 있으면 원망할 만큼만 원망합시다. 아내에 대한 원망, 자식에 대한 원망, 교회에 대한 원망이 있습니까? 원망할 만큼만 합시다. 하나님 앞에서 “내 탓이요” 라고 할 것이 전부입니다. 사람에게는 “대부분이 내 탓이요”라고 할 것입니다. 세례를 주고, 직분을 맡기고, 가르치고, 믿었습니다. 무슨 돌이 그렇게 돌아옵니까?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것은 대부분이 감정입니다. 나쁜 감정은 사단의 독침입니다. 나쁜 감정은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악한 감정의 불을 끕시다. 시글락이 아멜렉의 공격으로 불탔을 때 다윗의 부하들이 돌을 들어 다윗을 치려고 합니다. 집이 불타고 처자식이 사로잡혔습니다. 가슴이 아프고 무너져 내립니다. 그렇다고 다윗에게 책임을 물어서 돌을 들어 쳐서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과 고기 가마 곁에서 생활을 동급으로 취급합니다.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3절).” 하나님의 구원을 굶어죽게 하는 것으로 비유해서 되겠습니까? 구원보다 고기가마 곁에서 앉았던 시절이 좋다고 해서 되겠습니까? 애굽에서 우상숭배 하면서 고기를 먹는 생활보다 광야에서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사는 것이 복입니다. 세상에서 천 날보다 성전에서 문지기로 하루가 복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나사로는 구원받아서 천국에 가서 복락을 누렸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가서 물 한 방울을 그리워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의 모든 삶을 뒤바꿀 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들게 살아도 세상에서 제일 편하게 살다가 지옥 가는 사람보다 낫습니다. 구원받은 생활이 거지 나사로처럼 피곤하고 비참하지도 않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사람의 제일가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구원하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야 기뻐하리로다(하박국3:17).” 없는 가운데도 하나님의 구원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돈도 명예도 있어야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고의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에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해야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영생복락에 참여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구원이 최고의 선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즐거워하는 것이 최고의 선입니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고 영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잘 살기 위하여 땀 흘려 노력하는 것도 가치가 있다면, 영원한 세계에서 복락을 누리는 것을 위해서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천국과 영생에 참여하는 방법도 그렇습니다. 내 노력으로 영생복락에 참여해도 보람이 있지만,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로 영생복락에 참여한다면 더욱 황홀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값없이 구원 얻는 것을 생각할 때 감사와 찬송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사요 저 사망 권세 이기니 큰 기쁨 넘치네.”
“주 하나님 독생자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보내주셨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 내 모든 죄를 구속하셨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감사하는 비결
하나님을 믿으면 문제를 척척 해결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걱정과 근심이 생기고, 그것이 커지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에 듭니다. 신 광야에서 양식이 떨어지고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4절).” 하나님이 만나를 주십니다. 하늘에서 비같이 내립니다. 200만이나 되는 백성이라도 넉넉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져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저녁에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6절).” 메추라기를 주십니다. 메추라기가 바람에 날아와서 광야에 내려앉습니다.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양식입니다.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옵니다. 사람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땅의 원리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양식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일도 하나님을 할 수 있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경쟁은 갈수록 치열합니다. 사람마다 문제가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믿어서는 오래 믿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합시다.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면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전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만나와 메추라기가 공급됩니다. 전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기도 응답을 체험할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곳에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맹목적인 감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곳에 감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만큼이나 귀한 신앙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함을 믿는 것입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4절).” 여기서 때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면 진노를 내리셔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악한 원망에 대한 대답은 은혜와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을 지키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인도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죽게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삯군이 아닙니다. 이리나 늑대를 보고 도망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변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이 좁아지고 우리의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한결같이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돌아올 때 소를 잡아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깊은 기도와 찬송을 통해 우리의 심령을 열어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쉽게 변하는 우리의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때로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해도 받아들였습니다.
감사는 일용할 양식에서 시작됩니다. 일용할 양식이 무엇입니까? 작은 일이고 작은 행복입니다. 일상생활입니다. 작은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큰일에 감사합니다. 일상적인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기대밖에 일에도 감사할 줄 압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 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도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8-9).”
전 세계적으로 보면 자기 집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자동차를 타고 사는 사람이 불과 20%도 안 됩니다. 영양실조와 기근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20% 정도입니다. 우리 정도면 잘사는 것입니다. 북한의 실상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북한 사람 보다 잘나서 잘사는 것 아닙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런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이 이릅니다. 작은 것으로 만족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안 됩니다. 나에게 부족함이 없으면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남의 것은 왜 간섭합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까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원망합니다. 로또 대박이 안 터진다고 불행한 것 아닙니다. 세상에는 기가 막히게 불행한 사람도 많습니다. 신혼부부가 함께 수영장에 갔다가 신랑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다이빙을 하다가 머리를 바닥에 부딪쳐서 뇌수술을 했는데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신랑을 기다립니다. 승합차를 타고 결혼식에 가던 집안 식구가 사고를 당해서 크게 다치고 죽었습니다.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직접 보았습니다. 작은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작은 일에도 자주 감사합시다.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느끼고 행동으로 표현합시다. “감사합니다!” 이 말이 큰 힘이 있습니다. 병무청에서 근무하는데 직원에게 전화 친절하게 받으라고 야단입니다. “감사합니다. 누구입니다.” 이 말이 잘 안 나옵니다. 저는 잘 했습니다. 늘 교회에서 하는 말이 감사이고, 기도하면서 하는 말이 감사입니다.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간단하지만 이 말이 안 되면 신자로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나 안식일에는 만나를 주시 않습니다. 안식일 전에 두 배를 거두게 하십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안식일에는 예배드리고 거룩한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감사생활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대로 살면 언제나 감사합니다. 경계선을 넘어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일성수 합시다. 하나님의 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생활합니다. 시간이 내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내가 살고 싶다고 천년만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언제라도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지만 천국을 바라봅니다. 십일조로 섬깁니다. 물질의 청지기입니다. 주시는 대로 감사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몸으로 봉사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최선을 다해 섬깁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지 않습니다.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우리 맘대로 살면 감사할 일이 없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일반섭리를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따라야 합니다. 씨를 뿌리고 땀 흘려 가꾸어야 열매를 거둡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형통합니다. 성령 충만해야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면 슬퍼하고 눈물 흘릴 일만 생깁니다.
은혜는 만나처럼
출 16: 1-12
‘필립 얀시’라는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작가가 있습니다. 세계가 인정하는 대표적인 지성인입니다. 그의 저서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있습니다. 1998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한국에서도 많이 읽혀지는 책입니다.
그는 ‘은혜’라는 단어가 이 시대 최고의 단어라고 강조합니다. 은혜의 소중한 메시지를 성경과 현실을 대비시키면서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는 책의 말미에서 이런 예화로 끝을 맺습니다.
오래전 영국에서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당시 공연은 남아공의 변화를 축하하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대부분 록밴드인 음악으로 진행된 공연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제작진은 오페라 가수 제시 노만을 마지막 순서로 짜 놓았습니다. 광란의 음악이 절정에 달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제시 노만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물결치는 아프리카 전통 옷을 입은 흑인 여인 노만이 무대 위를 걸어 나갑니다.
악단도 없고, 악기도 없었습니다. 분위기가 가라앉아 누군가가 다른 음악을 듣자고 외쳐 대고 있었습니다. 노만은 아카펠라로 천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잔잔히 흐르는 그의 노래가 울려 펴지자 그날 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목이 터져라 외치던 관중들이 노만이 부르는 은혜의 아리아 앞에 돌연 침묵에 잠긴 것입니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노래가 2절에 이르자 군중들은 완전히 노만의 손안에 들어
와 있었습니다. 3절을 부를 때 팬들은 기억속에서 거의 잊혀진 가사를 더듬으며 따라 불렀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그리고 4절에 이르자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그렇게 감동적인 공연은 끝났습니다. 나중에 노만은 그날, 그순간 무슨 권능이 임했는지 모르겠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하지만 필립 얀시는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세상은 은혜에 목말라 있다, 은혜
가 임할 때 세상은 그 앞에서 침묵에 잠긴다’
세상은 은혜에 목말라 있습니다. 은혜가 임할 때 세상은 모두 잠잠해 집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믿는 자도 은혜에 목말라 있습니다. 은혜가 임할 때 우리 모두는 개인과 공동체에 새 시대를 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그 은혜를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로 나왔습니다. 오늘도 은혜가 임하기를 기대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 은혜는 강물처럼 촉촉하고, 불길처럼 뜨거우며, 은혜는 바람처럼 강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만나처럼 임합니다. 출애굽이후 광야여정에 빼놓을 수 없던 것이 만나입니다. 그렇다면 만나처럼 임하는 은혜는 과연 무엇일까요? 만나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첫째는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출애굽기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이 탈출한 뒤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야곱과 가족들이 기근을 피해 애급으로 내려간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자 이스라엘은 고역과 노동으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애급을 빠져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 가나안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신 광야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신 광야는 당시 광야의 어느 곳보다도 불모의 땅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지치고 힘든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자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또한 12절에서 이렇게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필요한 양식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저녁에는 고기를 주고, 아침에는 떡으로 먹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바로 ‘만나’
입니다.
만나는 그들이 생전 처음 본 양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뭐야’라고 물었는데, 바로 그 말에서 만나가 되었습니다. 만나는 ‘이것이 무엇이냐’는 뜻으로 꿀 섞은 과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3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이렇게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만나와 같고, 만나는 먹는 것이요, 우리 삶에 필요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각 나라마다 독특한 음식문화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우리만큼 음식에 민감한 민족이 없고, 우리보다 음식이 풍성한 나라가 없습니다. 아마도 너무도 못 먹고 굶주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보릿고개를 넘어간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사할 때도 ‘진지 드셨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많이 드세요’가 가장 정겨운 인사입니다. 배탈이 나든지 말든지 일단 많이 먹으라고 권하고, 많이 먹어야 기분이 좋습니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고, 급기야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
도 좋다’는 말까지도 나왔습니다.
한번 상을 차리면 상다리가 부서지도록, 상위에 그릇이 많이 숟가락 놓을 자리도 없도록 차려야 합니다. 그러고도 차린 거 없으니 많이 드시라고 말하는 민족입니다. 이처럼 잘 먹는 민족, 많이 먹는 민족이기에, 음식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는 관심이 많고, 눈이 번쩍 떠지는 법입니다.
믿는 자에게 은혜가 이런 것입니다. 은혜가 중심이요 관심이고, 은혜하면 눈이 떠지고, 은혜를 말하면 먹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번 식사를 통해 우리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도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가 양식이기에 은혜를 먹어야 하고, 배불리 먹고, 풍족히 먹고, 넉넉히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은혜에 굶주리고, 목마르고,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가 임하는 곳을 찾아야 하고, 은혜를 풍족히 먹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기억나는 한 자매가 있습니다. 그 자매는 한국에서 아주 착실히 믿음생활하면서 교회를 다니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온 청년입니다. 주변에 한인교회가 많지 않던 마을에서 자매는 한인교회를 어렵게 찾다가 제가 섬기는 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가 저와 통화하면서 처음 언급한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예배가 고파요’
여러분, 우리는 은혜에 고파야 합니다. 예배가 고파야 하고, 기도에 목말라야 합니다.
교회에 가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먹지 않으면 우리는 한순간도 살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합니다. 은혜는 양식이기에 먹어야 합니다. 먹어도, 먹어도 또 고프고 고파야 합니다. 그렇게 풍족한 은혜를 받아야 우리 육신과 영혼이 살고, 건강하게 우리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은혜는 양식입니다. 풍성하게 은혜를 먹고, 마시면서 영혼이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매일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만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기에 보면 만나를 양식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일용할 양식, 날마다의 양식으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만나를 설명하는 16장의 내용에서 많이 강조하는 말이 ‘날마다, 매일, 일용할 양식’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은 매일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날마다 필요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에 보면 모세는 만나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혹 양식이 모자랄까 염려하여 남은 것을 더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게 거둔 것은 반드시 다음날 아침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만나의 의미입니다. 만나는 양식이요, 특히 일용할 양식입니다. 은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은혜는 매일 필요하고, 매순간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아무리 많이 미리 받아도 그것으로 평생 은혜 없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순간 받아야 하는 은혜가 있고, 오늘이 아니면 받지 못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로 현재와 미래를 지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지금, 매일 받아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로 날마다 나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 여기에서 성령 충만을 말씀합니다. 성령 충만이 바로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성령 충만은 술 취하는 것과 비교됩니다. 술에 취하듯, 성령에도 취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 충만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선포합니다. 성령 충만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여기 성령 충만을 문법적으로 현재형을 쓰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성령 충만을 매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날그날, 그때그때 받으라는 것입니다. 매순간 성령 충만이 필요하고, 매일 은혜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양식이고, 또한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날, 매일, 매순간, 날마다의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내일이 아니고, 어제도 아닙니다. 바로 오늘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매일 우리 육체의 필요한 양식을 구하듯이, 매일 영혼에 필요한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지금 나에게 필요한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은혜로 하루를 살고,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양식이고, 특히 매일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은혜를 받고, 오늘 필요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은혜를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로 날마다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광야는 인간이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현장입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도, 기술력 있는 인간도, 힘 있고 건강한 사람도 소용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한사람도 굶어죽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는 바로 이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삭막한 현장에서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광야요, 만나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유독 강조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서, 하나님께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주도하고, 하나님이 섭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현현, 임재,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많이 나타났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광야에서는 어떤 유능하거나 실력 있는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이끄심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그것이 나타납니다.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나도, 메추라기도, 물도, 거처도, 모든 것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사실 은혜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물론 내가 수고하고 땀흘려 얻었다고 말하겠지만, 믿는 자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은혜이고, 선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것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간섭하시고, 도우신 결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달라집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고,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나의 힘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임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참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만나였습니다. 그것이 곧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가 유독 만나이겠습니까? 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생활이 마칠 즈음에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8장 2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나였습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만나라는 것은 결국 우리는 무엇보다도 말씀으로 사는 인생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도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면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이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이후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2-35)
말씀이 양식이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한 은혜가 없습니다. 우리는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믿는 것은 결국 그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시고,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 중에 그분의 말씀이 가장 큰 은혜요, 선물이요, 축복임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은혜는 만나처럼 임합니다. 은혜는 먹는 것이고, 매일 먹어야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한주간도, 한 해 동안 은혜로 승리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