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5월, 국립중앙의료원에서
rotating 인턴으로 내과에 근무하고 있을때의 일이다.
한밤중에 간호원의 급한 연락을 받고 병실로 뛰어 가보니
거구의 남자 환자가 숨을 거두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과 실력을 다해서
심폐소생술을 하였으나 (늑골이 부러질 정도로)
48세의 환자는 사망하였고,
그 가족들은 큰소리로 오열을 하였으며,
나는 송구스러운 마음뿐이었다.
고려대 교수이며
시인 조지훈씨와 마지막 임종을 그의 가족과 함께하였다.
< 2007.5.18 경북 영양에서 지훈예술제에 유족으로 참석하신
미망인 김난희 여사와 장남 조광렬 재미 건축가. >
나 또한 고 2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 지셔서 5년간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어머니와 삼남일녀를
뒤로 하고 먼저 가셨으니
장남인 나는 엄청난 고생을 하며 인생을 살아왔다.
이제 칠십이 넘어
조지훈선생의 유가족들은 어떻게 살아오셨나
무척 궁금하던차에
얼마전 일간지를 보니
조지훈씨의 삼남 조태열씨는
외교부 제 2차관으로
국가의 통상업무를 총괄하고 있으며
< 외교부 제 2차관 조태열씨의 고향방문 >
경북 영양군의 한양조씨 종택과 가훈 , 삼불차가 소개되었다.
삼불차 < 三不借 >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고향인 경북 양양군
일월산 자락의 주실 마을은 한양 조씨들이
400년 가깝게 터를 잡고
살아온 집성촌입니다.
이 집안은 영남 식자층 사이에서
" 劍 南 " 집안으로 불리는 강골 집안입니다.
" 칼 같은 남인 집안" 의 가풍속에서
조지훈은 태어나고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조선후기 200년은 경상도 남인들의 수난시대로
노론에 밀려 벼슬다운 벼슬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 머리를 숙이고
가랑이 밑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 劍 南 " 이 택한 노선은 후자였습니다.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가훈이 바로 삼불차였습니다.
( 세가지를 빌리지 않는다)
첫째는 재불차 ( 財不借 ).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재불은 빌리지 않는다.
재불을 빌리지 않기 위한 최후의 마지노선이
종가앞체 위치한 50 마지기 논입니다.
이 50 마지기는 누구도 팔거나 저당 잡힐 수 없는
불가침의 땅이었습니다.
둘째는 문불차 ( 文不借 ) .
문장은 빌리지 않는다.
선비 집안이 글을 못해서 다른 집안으로
글을 빌리러 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벼슬은 못해도 학문이 높으면
선비로 대접 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셋째는 인불차 ( 人不借 ) .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
양자를 들이지 않는 다는 의미입니다.
조선시대 명문가에서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여
대를 잇는 것이 관례였는데
흥미롭게도 이 집안에서는
370년 동안 양자를 들이지 않고
혈손으로 대를 이어왔습니다.
그 비법을 물어보았더니 돌아온 대답은
새벽에 합궁하는 것이었습니다.
< 조지훈 생가 >
< 지훈 문학관 현판 개막식 - 필체는 미망인이신 김난희 여사의 친필과 홍일식 고대 총장님 >
장남 조광렬 ( 재미 건축가 ) 씨의 글
" 승무의 긴 여운에서"
아버지와 사별 전날의 일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지금의 내 아내가 설악산으로 대학 졸업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그녀를 배웅하고 새 양복을 입고
하루 종일 외출을 즐기고 들어오니
( 그 당시에는 물론 휴대폰이 없었다 ) 아버지가 안 보이셨다.
어머니게서 힘없이 말씀하셨다.
" 아버지게서 오늘, 병원
( 메디컬 센터. 현 국립의료원. 당시 최고의 의술기관)에 입원하셨다.
오늘밤은 네 외삼촌이 아버지 병상을 지키기로 했으니
너와 나는 내일 아침에 가서 교대하기로 하자."
그런데 다음 날 5시 40분경
새벽을 깨우는 전화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 속에서 외삼촌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보다 세살 연상인 나의 외삼촌 , 김동웅은
그 당시 우리과 함께 살고 있었다. )
" 누님, 자형께서 운명하셨습니다. "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어젯밤에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지 못했던 것이 애통하고
죄스럽고 후회스러웠다.
또 내가 해 입은 여름양복이 삼베가 많이 섞인 양복이라
마치 상복을 미리 해입은 듯하여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이 전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거울 앞의 그 순간이 아버지와 나의 마지막 순간이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왜 그때 내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까..
워낙 병치레가 잦았기 때문에 함구하셨던 것일까.
나 또한 그러시려니 하고 편하게 생각한끝에 외출했던 것일까.
나는 처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졌다.
이제 더이상 아버지는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
이제 아버지께 내 얘기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첫댓글 effort ? 박화백..자세히 설명 해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박대통령께서 베트남을 방문하여 아오자이 의 무대에서 우아하고 멋있는 한복으로무대에 걸어나오실때 승무 의시귀가 떠 올 랐읍니다.왜 그랬을까요?
9월12일 올린글 과 동영상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