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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화론
사건의 파아란 피부, 우발적 선택의 연쇄
- 들뢰즈의 사건의 존재론으로 읽는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로그인
- 체험의 회고에서 사건의 발생으로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사건은 사물 안에 있지 않고, 사물의 표면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 명제는 체험을 서사의 중심에 두어온 전통적 수필 미학을 근본에서부터 흔든다. 사건은 개인의 내면 깊숙이 저장된 기억이 아니라, 신체와 사물, 언어와 감각이 맞닿는 표면에서 발생하는 어떤 일어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송명화 수필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은 파독간호사 김우자 여사의 삶을 ‘이야기’하거나 ‘회고’하는 글이 아니다. 이 작품은 한 개인의 역사적 체험을 재현하는 대신, 그 체험이 독자의 현재 속에서 다시 발생하도록 배치된 장(場)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 이 수필은 과거의 경험을 설명하지 않고, 경험이 생성되던 조건을 호출함으로써 사건의 현재형을 만들어낸다.
이 지점에서 이 글의 중심은 더 이상 ‘파독간호사의 삶’이라는 주제에 있지 않다. 중심은 파란 조약돌이라는 사물, 그 색과 질감, 반복과 배열이 만들어내는 사건의 장치에 있다. 조약돌은 기억의 상징이 아니라, 기억이 의미로 고정되기 이전의 감각을 불러오는 표면이다. 독자는 김우자 여사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파란 돌을 바라보고 만지며 그 삶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정동의 강도를 직접 통과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명화의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은 체험수필의 범주를 벗어나, 경험을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사건을 발생시키는 본격수필로 진입한다. 이 서론은 그러한 전환의 문턱, 다시 말해 체험의 회고에서 사건의 생성으로 넘어가는 로그인 화면에 해당한다.
들뢰즈의 사건의 존재론에서 사건은 단순한 사실(fact)이 아니다. 그것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남 자체의 방식, 다시 말해 의미가 발생하는 비물질적 차원이다. 들뢰즈는 이를 “순수사건”이라 부른다. 이 순수사건은 언제나 신체와 사물의 표면(surface)에서, 언어와 감각의 접면에서 발생한다. 이 수필에서 파란 조약돌은 기억의 기념물이 아니라, 사건을 발생시키는 특이성의 응축체다. 질 들뢰즈가 “예술은 체험을 전달하지 않는다. 체험이 다시 일어나도록 배치한다.”고 한 것처럼, 이 수필에서 조약돌은 설명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으며, 독자의 감각을 직접 흔든다. 이 글은 독자에게 “이 여인의 삶은 이러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파란 돌을 ‘보게’ 하고, ‘만지게’ 하며, ‘문지르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본격수필의 미학이 작동한다.
Ⅱ. 파란 조약돌이라는 사건의 표면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에서 “사건은 깊이에 있지 않고, 표면에 있다.”고 했다. 송명화의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건의 표면성이다. 파란 조약돌은 역사적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징 이전에 감각의 표면으로 존재한다. “사파이어보다 토파즈보다 영롱한 추억이 깃든 파란 조약돌들이 이 집의 중앙에서 파수를 본다.” 여기서 ‘파수’는 은유적 장식이 아니다. 조약돌은 집의 중심을 점유하는 배치물이며, 삶의 흐름을 지탱하는 사건의 매개다.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은 어떤 ‘의미’를 담지하기 이전에 강도(intensity)로 작용한다. 파란 돌의 색채, 질감, 반복적 수집은 독자의 감각을 먼저 호출한다.화이트헤드가 『과정과 실재』에서 “사건은 실체가 아니라 과정이다.”라고 말한 대로 이 수필에서 조약돌은 고정된 상징이 아니라, 계속해서 생성되는 과정적 사건이다. 마인츠에서, 스페인에서, 중국에서, 거제에서 수집된 돌들은 하나의 서사를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이질적인 시간들이 한 표면에 공존하는 사건의 장을 이룬다.
1. 특수성
- 하나의 돌, 하나의 우주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특수성(singularity)을 개별적 주체나 경험의 속성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게 특수성이란 어떤 사물이 “이것이다”라고 규정되는 정체성이 아니라, 사건이 발생할 수 있도록 차이가 응축되는 지점, 다시 말해 생성의 조건이 되는 임계점이다. 특수성은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의미가 태동하기 직전의 상태이며, 언제나 열려 있는 잠재성의 자리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송명화의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에 등장하는 파란 돌들은 각기 고유한 개체이면서도,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다. 조약돌은 ‘기념품’이나 ‘상징물’로 기능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서사를 완성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각각의 돌은 서사가 발생할 수 있는 조건, 즉 사건의 가능성을 품은 특수한 지점으로 존재한다. 파란 조약돌들은 서로 닮아 있으면서도 동일하지 않고, 모여 있으되 하나의 총체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돌들의 집합은 완결된 의미의 구조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잠재된 작은 우주들의 배열이며, 바로 이 배열 속에서 특수성은 고요하지만 강하게 작동한다.
파란 돌을 오랜 세월 동안 하나씩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돌 하나에 사랑과 돌 하나에 그리움, 돌 하나에 낭만과 돌 하나에 바람…. 손길 닿은 작은 것 하나도 소중히 여기는 여인의 마음이 파란 정기를 머금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진실로 기억한다는 것은 온 세상, 온 우주를 보듬는 것이지 않을까. 그녀의 돌에는 그녀만의 작은 우주가 담겨 있다. 가만가만 돌을 닦으며 연전에 세상 떠난 남편의 다정한 목소리도 들으셨을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 파란 조약돌 하나를 열심히 문질렀다. 단단하다. 이런 정도의 결심이 아니고서야 생의 파란을 어찌 견디랴. 푸른 멍 빛깔 상처로 딱딱하게 굳어갈 뻔한 돌들, 그것을 저리 환한 파란빛으로 바꾸어가는 것이 그분의 선택이었다.
-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 중에서
“돌 하나에 사랑과 돌 하나에 그리움, 돌 하나에 낭만과 돌 하나에 바람….” 이 문장은 상징의 나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미의 미완성 상태를 유지한다. 돌 하나하나에 붙은 정서들은 확정되지 않고, 열린 채로 배열된다. 이것이 특수성의 작동 방식이다. 알랭 바디우는 『존재와 사건』에서 “사건은 하나의 진리를 개시하지만, 그 진리는 언제나 미완이다.”라고 말한다. 파란 조약돌은 완결된 의미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는 돌을 바라보는 순간마다 다른 사건에 접속한다. 이 수필의 윤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독자에게 감정을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감응하도록 내버려 둔다.
2. 우발성
- 파독의 삶과 선택의 사건성
질 들뢰즈는 사건을 언제나 필연의 결과가 아니라, 우발성의 형식으로 사유한다. 필연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설명의 언어이며, 사건은 그 설명이 도착하기 이전에 벌어지는 균열이다. 김우자 여사의 삶 역시 흔히는 ‘역사적 필연’이라는 도식 속에 배치될 수 있다. 가난했던 조국, 외화를 벌기 위해 해외로 나간 간호사, 희생과 헌신의 서사. 그러나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은 이러한 인과적 서술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이 수필에서 독일행은 시대가 요구한 사명도, 집단적 운명의 발현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로 환원되지 않는 우발적인 선택들의 연쇄, 다시 말해 사건의 흐름 속에서 방향을 틀어버린 삶의 한 분기점으로 제시된다. 이 글은 “왜 독일로 갔는가”를 설명하지 않고, 그 선택이 만들어낸 감각의 잔향을 호출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파독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사건의 가능성으로 다시 열린다.
왜 유독 파란 색일까. 파랑은 바다의 색이다. 그분에겐 고향의 색이며 그리움의 심연에 가라앉은 무의식의 바탕색이지 않을까. 난생 처음 타 본 비행기 창으로 내려다 본 고국의 바다는 기억 속에 꽁꽁 숨어서도 타국에서 사는 내내 파란 숨을 쉬었으리라. 휴일에는 라인 강에 나가 하늘을 보았겠지. 파랑은 하늘의 색이기도 하다. 맑은 하늘에 길게 흰 자국을 남기고 날아간 비행기를 오래오래 눈으로 좇기도 했을까. 그 끝에 두고 온 부모님과 형제를 가만히 불러보기도 했으리라. 그분이 파란 돌에 새긴 것은 그리움인 것 같다. 어쨌거나 낭만과 희망의 색상이 이 집에 중심을 잡고 있어 다행이지 뭔가. 내 상상의 가지를 자르고 그분이 곡절 많던 삶을 풀어놓았다.
-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 중에서
이 장면은 회고의 문장이 아니다. 여기서 비행기는 이동 수단이 아니라, 사건의 절단면이다. 우발적으로 열려버린 시야, 창밖으로 갑작스레 펼쳐진 파란 바다는 삶 전체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강도로 작용한다.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의 분기’가 바로 이런 순간에서 발생한다. 삶은 계획된 선택의 연속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감각의 침입으로 인해 방향이 달라지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 수필에서 바다는 상실의 대상이 아니라,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감각의 근원이며, 하늘은 떠나온 것을 반복해서 호출하는 열린 표면이다. 파란색은 기억의 상징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각인된 감각이 시간 속에서 변형되며 살아남은 정동의 흔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란 조약돌은 파독의 삶을 설명하는 표지가 아니라, 그 삶이 우발적으로 방향을 틀었던 순간들을 응축한 사건의 매개체다. 파랑은 고향이었고, 동시에 타국의 하늘이었으며, 떠남과 머묾이 겹쳐지는 색이었다. 이 수필은 파독이라는 삶을 회고하지 않는다. 대신 그 선택이 남긴 감각의 잔여, 즉 아직 의미로 굳지 않은 정동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불러온다. 우발성은 여기서 불행이나 비극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다시 배치하고, 새로운 관계와 감각을 생성하는 사건의 원동력이다. 파란 조약돌이 오늘도 빛나는 이유는, 그 돌들이 필연의 결과물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축적된 삶의 분기점들이기 때문이다.
3. 순수사건
- 파란색의 비인칭적 정동
질 들뢰즈는 순수사건을 주체의 체험이나 의식의 소유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게 사건은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어떤 일어남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순수사건은 기억의 소유주를 갖지 않으며, 감정의 원인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의미화 이전의 차원에서, 신체와 색채, 리듬과 감각의 배열을 통해 정동으로서 스스로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의 핵심은 김우자 여사라는 개인의 삶의 서사가 아니라, 파란색이 만들어내는 비인칭적 감응의 장에 있다. 파랑은 상징도, 비유도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대표하지 않으며, 감정을 대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파랑은 주체의 내면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동의 흐름, 다시 말해 ‘누구의 것도 아닌 감각’으로서 텍스트 전면을 점유한다. 이 수필에서 파란색은 설명되기보다는 반복되고, 해석되기보다는 중첩된다. 그 반복 속에서 파랑은 점차 의미를 벗고, 감각의 강도로 전이되며, 독자와 세계 사이에서 순수사건으로 일어난다.
왜 유독 파란 색일까. 파랑은 바다의 색이다. 그분에겐 고향의 색이며 그리움의 심연에 가라앉은 무의식의 바탕색이지 않을까. 난생 처음 타 본 비행기 창으로 내려다 본 고국의 바다는 기억 속에 꽁꽁 숨어서도 타국에서 사는 내내 파란 숨을 쉬었으리라. 휴일에는 라인 강에 나가 하늘을 보았겠지. 파랑은 하늘의 색이기도 하다. 맑은 하늘에 길게 흰 자국을 남기고 날아간 비행기를 오래오래 눈으로 좇기도 했을까. 그 끝에 두고 온 부모님과 형제를 가만히 불러보기도 했으리라. 그분이 파란 돌에 새긴 것은 그리움인 것 같다. 어쨌거나 낭만과 희망의 색상이 이 집에 중심을 잡고 있어 다행이지 뭔가. 내 상상의 가지를 자르고 그분이 곡절 많던 삶을 풀어놓았다.
-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 중에서
“파랑은 바다의 색이다. 그분에겐 고향의 색이며 그리움의 심연에 가라앉은 무의식의 바탕색이지 않을까. 난생 처음 타 본 비행기 창으로 내려다 본 고국의 바다는 기억 속에 꽁꽁 숨어서도 타국에서 사는 내내 파란 숨을 쉬었으리라. 휴일에는 라인 강에 나가 하늘을 보았겠지. 파랑은 하늘의 색이기도 하다.”라는 반복은 정보를 전달하거나 의미를 해설하기 위한 문장이 아니다. 이 반복은 설명의 언어를 벗어나 강도를 축적하는 언어의 운동이다. 독자는 이 문장을 통해 파랑을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점차 파랑의 리듬과 호흡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파랑은 더 이상 고향이나 이별을 상징하지 않으며, 특정한 기억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파랑은 신체의 감각을 직접 흔드는 정동으로 작동하며, 독자의 인식 이전에서 순수사건으로 일어난다. 이때 사건은 “누가 무엇을 느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과 언어가 만나는 표면에서 발생하는 비인칭적 일어남으로 존재한다.
모리스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에서 “문학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어난다.”고 한 말은 바로 이러한 문학의 작동 방식을 가리킨다. 이 수필에서 파란 조약돌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가 아니다. 그것은 고통을 상징하지도, 희망을 은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파란 돌은 고통이 서사로 고정되기 이전, 의미로 환원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정동으로 변환되는 사건의 표면이다. 파독의 삶에서 비롯된 상처와 결핍은 설명되지 않음으로써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파랑이라는 감각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지속된다. 고통은 여기서 극복되거나 승화되지 않는다. 다만 고통이 고통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감각의 강도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생성한다.
이러한 정동의 전환 속에서 파란 조약돌은 기억의 저장고가 아니라,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장치가 된다. 독자가 조약돌을 바라보는 순간, 파랑은 다시 바다로, 다시 하늘로, 다시 떠남의 감각으로 열리며 매번 다른 사건을 낳는다. 이 수필이 성취하는 것은 삶의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 아니라, 삶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감각이 지금-여기에서 다시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 반복되는 발생성 속에서, 파란 조약돌은 하나의 색채가 아니라 문학적 사건으로 존재하게 된다.
4. 윤리적 사건
- 기억을 다루는 방식
질 들뢰즈가 말하는 윤리는 선악의 판단이나 도덕적 규범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옳은가를 결정하는 체계가 아니라, 타자와 맺는 관계의 양식, 다시 말해 고통과 기억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이 선택한 서술 전략은 명백히 윤리적이다. 이 수필은 파독간호사들이 겪은 차별과 상처를 나열하지 않는다. 눈물의 장면도, 억울함의 고백도 끝내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회피나 미화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을 소비 가능한 이야기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식적인 거리두기, 즉 윤리적 결단에 가깝다. 고통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이 수필은 고통을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영역으로 남겨 둔다.
‘코리아 엔젤’이 그분들에게 주어진 찬사였다. 독일인들은 파독간호사들의 헌신에 감사했지만 인종적인 다름을 인정하기까지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생김새 하나로 차별을 받는 상황은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의 산업역군으로 해외에서 지낸 시간은 과거로 흘러갔지만 아픈 기억은 아직도 진행형일까. 질문을 했지만 간호사로서 겪은 업무상의 어려움은 그대로 묻고자 하셨다. 죄송하여 마음에 아릿한 파장이 일었다. 행복한 생각만 하고 살아도 짧은 시간이다. 좋은 추억만 되새기려는 지혜라 생각하면서도 그 아픔의 깊이를 느끼게 됨은 기우일까. 보람과 긍정으로 조약돌은 저리 빛난다.
-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 중에서
“질문을 했지만 간호사로서 겪은 업무상의 어려움은 그대로 묻고자 하셨다.”라는 문장은 이 윤리적 태도가 가장 응축된 지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겪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말하지 않기로 한 선택이다. 들뢰즈적 의미에서 이 선택은 하나의 사건이다. 침묵은 결핍이 아니라, 고통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식이며, 기억을 보존하는 비폭력적인 형식이다. 수필은 이 침묵을 해명하지 않고, 대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미세한 파장, “죄송하여 마음에 아릿한 파장이 일었다”를 독자의 감각 위에 남긴다. 이때 윤리는 서술자의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독자에게 전이되는 정동의 책임으로 작동한다.
본격수필은 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의 체험수필과 구별된다. 체험수필이 고통을 ‘말함으로써’ 의미화하려 한다면, 본격수필은 고통을 어떻게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사유한다. 이 작품에서 조약돌이 보람과 긍정의 빛으로 남아 있는 것은 고통이 부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이 정동의 차원에서 재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독자는 연민이나 동정을 강요받지 않는다. 대신 말해지지 않은 기억 앞에 서서, 판단을 보류한 채 응답해야 할 위치에 놓인다. 바로 그 순간, 이 수필은 기억을 서사화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기억을 둘러싼 윤리적 관계 자체를 사건으로 발생시킨다.
Ⅲ,로그아웃
- 본격수필로서의 사건의 완성
질 들뢰즈는 “사건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해서 다시 발생한다.”라고 했다. <마인츠하우스의 파란 조약돌>은 체험수필이 아니다. 또한 역사증언문도 아니다. 이 작품은 사건을 배치하는 본격수필이다. 파란 조약돌은 삶을 설명하지 않고, 삶이 계속해서 발생하도록 만든다. 이 수필을 읽은 후, 독자는 김우자 여사의 삶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다. 대신 파란 돌 하나를 문지르는 손의 감각을 기억하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사건은 독자의 삶으로 이행한다. 질 들뢰즈는 “문학의 진실은 이해가 아니라, 변형이다.”라고 했다. 파란 조약돌은 아직도 빛난다. 그리고 그 빛은 지금, 이 글을 읽는 우리의 감각 위에서 다시 사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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