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룡의 ‘매화서옥도’ 검토
발표자 ; 석사4학기 이동민
글의 순서
1) 들어가는 말
2) 매화서옥도
3) 매화서옥도와 山居圖
4) 매화서옥도와 다른 화가와 관계
5) 결론
1) 들어가는 말
조희룡은 중인 신분으로 시, 서, 화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많은 글도 남겼다. 그의 글 중에는 특히 畵論에 해당되는 내용들이 많다. 조선시대에는 화론이랄 수 있는 글이 극히 미미하므로 조선 회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조희룡의 글에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조희룡이 회화를 언급한 글은 자신의 생각을 단편적으로 기술한 것이거나, 에세이류의 글들이 대부분이다. 자기의 주장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꼭히 화론이라고 하기에는 문제점도 많다. 그의 글들 중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도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이 과연 그의 논지와 부합되게 그려졌는가에도 의문이 생긴다.
발표자는 그의 매화서옥도를 검토함으로 그의 주장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기존의 회화사에서 그를 단순히 ‘김정희류파’로 분류하는 것에 의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의문의 근거로 김정희가 ‘조희룡배’라고 한 말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검토해보고자 한다.
2) 매화서옥도
매화서옥도를 그린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김기홍은 적어도 장년기 이전에 그린 것이라고 하였다.그렇다면 조희룡의 그림 중에는 早期의 작품에 해당한다. 중국에는 한 번도 들린 일이 없는 조희룡은 김정희를 통해서 중국의 회화를 접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중국의 회화와 화본이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 있었다. 이런 이유로 ‘매화서옥도’는 중국의 그림을 모본으로 그렸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전기가 그린 ‘매화초옥도’도 양식상 유사점이 많으므로 조선 후기의 화가들이 이런 양식의 그림을 모본으로 많이 그렸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조희룡이 김정희를 언급한 글의 대부분은 중국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다. 김정희를 통해서 중국 예술과 예술론을 전해 들었거나, 직접 보았음을 뜻한다. 이런 것이 김정희류파로 분류되는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김정희류파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에는 중인들이 많다. 단적인 예로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중국을 드나들던 역관이다. 조희룡은 중국을 드나들던 중인들을 통해서도 중국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매화서옥도의 회화 작법을 보자. 농묵을 사용하여 거칠고, 강한 붓질을 함으로 逸筆的 경향을 보인다. 서예적 기법도 사용하였지만 장식성을 강조한 것이 두드러진다. 用筆法에서 峻法的 표현을 함으로 書法的이기 보다는 畵法的인 요소가 많다고 보아야 한다. 매화 송이는 석채를 사용하여 농묵 위에서도 꽃이 돋보이게 함으로 환상적이고, 장식적인 정취가 강하다. 화면은 여백을 남기지 않고 潑墨에 의한 짙은 음영으로 매우고 있다.
이러한 표현을 감안하면 은거하여 사는 선비를 추위 속에 고고히 피어나는 매화로 상징하여 표현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매화에 관하여는 조희룡이 수도 없이 언급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나부산에 수만 송이가 피어 있는 매화의 정경’에 관한 것이 있다. 이 말은 은일의 분위기라기보다는 화려함의 느낌을 준다. 매화서옥도는 나부산의 정경을 연상하게 한다.
그가 추종한 중국의 화가로는 나빙과 동옥이 있다. 왕사신과 김농의 영향도 나타난다.이들의 특징은 수많은 매화송이를 그리므로 화려함을 나타낸 것이다. 조희룡은 매화가 가득하게 피어 있는 나부산의 정경을 말하면서 나빙의 매화도를 언급한 이유가 화려함의 표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매화서옥도’에서 흐드러지게 핀 매화가 서옥을 둘러싸고 있는 정경은 그의 주장과 어울린다.
조희룡을 위시한 중인들의 그림을 두고 김정희는 ‘조희룡배’라고 매도하였다. ‘문자기가 없는 무리’라는 말에는 사대부의 자존심을 표현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조희룡을 자신의 계보로 인정할 수 없다는 표현이다. ‘내 난초를 배워 난을 치지만 끝내 畵法이라는 한 가지의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들의 가슴에 文字氣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더욱이 전기의 그림 평에 ‘갈필’을 쓴 용필법을 두고 원대의 문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껍데기만 흉내 낸다,라는 모욕적인 말도 하였다.
발표자는 김정희의 말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매화서옥도’를 검토해 보겠다. 매화서옥도의 회화 기법이 서법적이지 않고 화법적이라는 데는 앞에서 검토해 본 바대로 수긍이 간다. 조희룡은 자신의 매화도를 다른 화가가 그린 매화도와 차이가 난다고 하였다. ‘꿈틀거리는 용처럼 가지가 기괴하게 구부러지게 그렸다, 라고 하였다. 이유로서 그림을 구매하는 사람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유희‘로 그린다는 그의 글의 내용과는 다르다.
조선 후기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면서 자본가들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여 상류 사회로 편입한다. 이들의 취향이 미술의 새로운 경향을 유도하였다. 김정희가 말한 ‘조희룡배’들이 신흥 세력의 취향에 맞추어서 그림을 그렸다.
조희룡은 미술의 사조가 변하고 있는 과도기를 살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그 와중에서 문인화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새로운 시도를 한 화가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문인화적인 정신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껍데기만 흉내를 낸다는 김정희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라는 시대를 살았던 화가의 그림이 그 시대의 배경을 반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첫댓글 조희룡의 매화서옥도-매화서옥도를 그린 시기는 조희룡의 早期 작품에 해당한다.중국에 한번도 들린 일이 없는 조희룡은 김정희를 통해서중국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그래서 김정희류파가 되는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매화서옥도의 작법을 보자. 농묵을 사용하여 거칠고 강한 붓질을 함으로써 일필적 경향을 보인다.장식성을 강조한다.용필법에서 준법적 표현을 하므로 서법적이기보다 화법적인요소가 많다.
화면은 발묵에 의한 짙은 음영으로 메우고 있다.은거하여 사는 선비를 추위속에 고고히 피어나는매화로상징한다는 해석에 무리가따른다.그가 추종한 화가로는 나빙과 동옥이 있다.조희룡의 그림을 위시한 중인들 그림을 보고 김정희는'조희룡배'라고 매도하였다'내 난초를 배워 난을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가지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슴에 '문자기'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조희룡은 미술사조가 변하고 있는 과도기를 살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그 와중에 문인화적그림을 그리면서 새로운 시도를 한 화가로 보아야 한다.
조선후기라는 싣를 살았던 그림이 그 시대의 배경을 반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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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