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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6월에 노르웨이 로포텐으로 다녀온 백패킹 여행은 정말 고됐다. 처음 하는 활동에 시행착오를 겪고, 안 해도 될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힘들었던 만큼 이제껏 했던 여행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백패킹의 매력을 처음 느꼈던 그 날 이후, 국내 여행지로도 떠나보고 싶어졌다. 거의 2년이 시간이 흐른 후, 지난 5월 말 드디어 두 번째 백패킹 여행을 떠났다. 장소는 제주도! 제주도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멋진 자연 풍경이 있고, 해변을 따라 얼마든지 야영을 할 수 있기 때문.
제주도 야영지 1 - 황홀한 노을이 있는 김녕해수욕장
제주도에 도착해서 첫 번째 야영지로 찾아간 곳은 김녕해수욕장이다. 북동쪽의 유명한 함덕 해수욕장을 조금 지나치면 나오는 곳이다. 처음엔 6박 7일로 일정을 잡으면서 서쪽만 돌려고 했다가, 국내 백패킹 성지의 한 곳으로 꼽히는 우도 비양도에 안 가면 후회할 것 같았다. 제주도에 늦은 오후에 도착했으니 바로 이동하진 못하고, 거쳐 가는 곳으로 김녕을 낙점했다.
멀리서 본 김녕해수욕장
김녕해수욕장까지는 제주공항에서 급행 101번을 타면 곧장 갈 수 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공항 앞의 풍경을 담았는데, 그간 찾아왔던 날들 중에서 날씨가 가장 완벽했다. 그동안 공항에 늦은 밤이나 날이 흐릴 때 내린 기억이 많아, 이처럼 깨끗한 하늘에 좋은 기분이 들었다.
좋은 기운을 안고 약 50분을 달려 김녕환승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땐 6시 반쯤이었는데,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보이는 파란 하늘은 어찌나 청명한지, ’좋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김녕환승정류장에서 해변까진 다소 거리가 있었다. 급행 버스는 정류장이 적다 보니 버스에서 내려 10분가량 걸어야 했다. 그러자 해변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먼발치에서 조그맣게 보였던 풍차가 손에 잡힐 듯 큼지막하게 보였다.
해변 입구의 주차장과 편의 시설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넓은 잔디밭과 함께 텐트 몇 동이 보였다, 지도상에는 김녕해변야영장이라고 나와 있었다. 많은 이들이 차를 끌고 와 잔디밭에 주차하고 그 옆에 텐트를 쳐 놓았다. 나도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배낭을 내리고 텐트를 꺼냈다. 정말 오래간만에 하는 거라 조금 버벅댔지만, 이내 집중해서 텐트를 쳤다.
텐트 설치를 끝내자마자 대충 배낭을 안에 던져넣어 두고 카메라를 챙겼다. 해가 떨어질세라 서둘러 바닷가로 갔다. 해는 조금씩 타들어 하늘을 붉게 물들었고, 이 모습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한창 사진을 찍고 있었다. 특히 웨딩 사진을 찍는 커플이 많이 보였다.
장점 및 특징
-넓은 잔디밭, 텐트 치기에 용이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 있음(201번)
-급행 버스는 김녕초등학교 앞 김녕환승정류장에서 이용 가능(약 1km)
-환승정류장 근처에 편의점, 하나로마트 등 편의시설 밀집
단점
-샤워실 및 일부 화장실 이용 제한(정식 개장 전)
-차가 잔디밭까지 들어올 수 있어 소음이 있음
함께 가보면 좋은 곳 - 소박하게 아름다운 진빌레 밭담길
다음 날, 오전 7시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도로 넘어가기 전, 해변 근처에 있는 밭담길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밭담길을 이루는 밭담은 말 그대로 밭에 쌓아놓은 담이다.
제주도는 화산이 폭발하여 생겨난 섬이다 보니, 토지의 77%가 화산회토이다(화산재 등 화산이 분출하면서 나온 물질들이 날려 땅이나 물속에 퇴적해서 생긴 토양을 말한다). 이는 물을 스며들게 하는 투수성이 높아 논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산성이 강해 다른 농작물을 경작하기에도 힘들다. 그렇다고 비화산회토에 해당하는 나머지 23%도 결코 농사를 짓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다. 땅속에 자갈과 돌이 많고, 경작할 만한 토양이라고 해도 깊이가 얕은 지역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 속에서 제주도 사람들은 땅을 기어코 일구었는데, 이 과정에서 발달한 게 밭담이다.
땅에 널린 돌을 활용해 만든 밭담은 제주도의 매서운 바람을 막고 분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블록처럼 쌓인 돌들의 메꿔지지 않은 틈 사이로 바람이 힘을 잃고 빠져나가 농작물이 보호되는 것이다. 비가 많이 내릴 땐 빗물 때문에 토양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초기엔 단순히 경작을 원만히 하기 위한 역할이 컸지만, 이후 그 범위가 사회까지 확장되었다. 농경지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고 분쟁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현재의 담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한 셈이다.
제주도엔 이런 밭담이 정말 많은데, 길이를 모두 합하면 지구 반 바퀴를 돌릴 정도라고 한다. 그만큼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자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광경이다. 그 가치를 세계에서 인정받아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월정리의 진빌레 밭담길은 제주 밭담의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핵심으로 꼽힌다.
김녕해수욕장에서 진빌레 밭담길을 가려면 월정리 방면으로 약 2.5km 이동해야 한다. 걸어가기엔 썩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큰 부담이 없었다. 그리고 도중에 지질이 독특한 곳들이 있어서 지루하지 않았다.
해안을 둘러싼 담, '환해장성'. 고려 시대에는 고려군과 몽골군을 막았고, 조선 시대에는 왜구와 이양선들을 막았다.
제주도 말로 '빌레'라고 하는 용암언덕(투믈러스). 뜨거운 용암이 식으며 부피가 줄어들어 표면이 다각형 형태로 갈라진 것이 특징이다.
시원하게 뻗은 해안가를 따라 얼마간 걸어가자 제주밭담테마공원과 함께 밭담길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밭담길 입구에는 제주밭담테마공원이 야외에 조성되어 있는데, 다양한 형태의 밭담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사진 속 캐릭터는 밭담을 대표하는 '머들이네 가족'이다. 머들은 제주말로 돌무더기를 뜻한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진빌레정이 나온다. 밭담길을 한 바퀴 돌면 반대편 도로로 나오게 된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가자 야트막한 오르막이 나왔다. 그 끝에는 ’진빌레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하나 보였다. 정자에 오르자 밭담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꽃이 흐드러지거나 작물을 재배하는 시기가 아니라 기대하던 풍경은 아니었다. 밭담 축제가 열리는 가을에 가면 가장 풍성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진빌레정에서 내려와 밭담길을 따라 슬금슬금 걸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일하시는 어르신 몇 분을 빼고는 길을 걷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밭담길의 공기를 오롯이 느꼈다. 밭담길을 걷고 있자니, 아담한 돌담길을 걷는 기분이 났다. 자연 그대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온 밭담에 소박한 매력이 느껴졌다. 북적거리는 관광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지극히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반환점을 돌아 밭담길의 마지막 구간에 접어들자,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밭에 한 무리의 보리가 보였다. 못내 아쉬웠던 감정이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보리는 금빛으로 잘 익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 모습이 파도 같았다. 밭담은 마치 그 파도에 떠 있는 모양새였다. 다시 돌아 나오는 지점엔 큰 하수처리장이 있는데, 그곳엔 유채꽃이 여전히 예쁘게 피어 있었다.
진빌레 밭담길
http://www.jejubatdam.com/m/trail01
주소 : 제주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1400-14(제주밭담테마공원)
제주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1400-111(진빌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