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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논의 변심
삼하 13:15-22
15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16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17 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18 암논의 하인이 그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19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
20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22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삼하 13:15-22 / 암논은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는 마음이 변하여 다말을 몹시 미워하게 되었다. 그가 전에 그녀를 사랑한 것보다 더 크게 미워하였다. 어쨌든 암논은 사랑할 때도 참을 수 없이 사랑하고, 미워할 때도 참을 수 없이 미워하는 성격의 인간이었다. 그는 이제 미움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서 일어나 이 방에서 빨리 나가라!' 16) 이제 다말은 항의하였다. `이러지 마세요. 어찌 나를 짐승처럼 쫓아내실 작정입니까? 이제 나를 이렇게 무조건 쫓아내 버리는 것은 방금 내게 저지른 죄보다 더 큰 죄입니다.' 그러나 암논의 귀에는 더 이상 이러한 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17) 그는 오히려 하인을 불러 또 한 번 폭력을 행사하였다. `거기 있는 그 계집을 어서 내 집에서 몰아낸 뒤에 대문을 닫고 빗장을 질러라' 18) 이때 다말은 긴소매에 색동으로 수를 놓은 곱고 아름다운 공주의 옷을 입고 있었다. 옛날부터 공주들이 시집 가기 전에는 그렇게 아름답고 고운 옷을 입는 법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다말을 마치 성가시게 구는 창녀처럼 암논의 하인이 대문 밖으로 끌어낸 뒤에 대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19) 그러자 다말은 긴 색동옷을 찢고 머리 위에는 재를 뒤집어쓰고 두 손은 머리 위에 얹은 채 목놓아 울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20)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이 이 모습을 보고 이렇게 누이를 달랬다. `네 오라비 암논이 그 몸을 더럽혔지? 그래도 암논은 네 오라비이니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더 이상 네 마음 속에도 품어 두지 마라.' 이리하여 다말은 그 오라비 압살롬의 집에서 소박 맞은 여인처럼 슬프고 외롭게 평생을 살았다. 한 번도 누구의 아내가 되어 본 일 없이 평생을 홀로 산 다말의 신세는 그녀의 아버지 다윗에게도 일평생 쓰라린 고통으로 느껴졌다. 21) 물론 다윗왕은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몹시 화를 냈으나 그의 자식 사랑은 언제나 맹목적이었다. 더구나 암논은 그의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여전히 그를 무조건 사랑하고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암논의 기분이 상할까봐 그를 꾸짖는 말조차도 하지 않았다. 22) 그러나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은 암논이 다말의 몸을 더럽혔기 때문에 그를 아주 미워하였다. 그래서 압살롬은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더 이상 암논과는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다말은 암논에게서 쫓겨난 후 처녀임을 나타내는 채색옷을 버립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공식적으로 부끄러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암논을 고소한 것입니다. 암논은 아버지처럼 자신의 잘못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덮히기를 바랬을지 모르나 다말은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자신이 당한 일을 적극적으로 알렸습니다.
어리석은 암논(15-19) 욕정을 배설한 암논은 다말에 대한 관심을 거둡니다. 그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율법상 강간범에게는 자신이 강간한 처녀와 결혼할 것인지 아니면 결혼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없습니다. 다만 강간을 당한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강간한 자에게 주는 것을 거절할 수는 있었습니다(출 22:17). 그러나 암논은 다말을 길거리로 쫓아냄으로써 악행에 악행을 더합니다. 암논은 다말을 집 밖으로 쫓아냄으로써 다말만이 아니라 압살롬까지도 모욕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었습니다. 자신의 힘이 더 세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암논이 다말을 내쫓은 것은 다말이 강간범에게조차 시집갈 수 없는 여자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행위입니다. 암논의 악행은 결혼을 함으로써 부분적으로나마 보상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다말을 부끄럽게 쫓아냄으로써 회복될 수 없는 수치를 주었습니다. 다말은 마치 과부가 된 양 애곡하는 자와 같이 행동합니다(참조. 20:3). “손을 머리 위에 얹은 것”은 참담한 슬픔의 표현입니다(참조. 렘 2:37)
어리석은 다윗(20-22) 압살롬은 다말에게 지금은 잠잠히 있자고 말합니다. 압살롬은 당시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처녀를 강간한 경우에 처녀의 아버지에게 보상금 은 50세겔을 지불하고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합니다(신 22:29). 암논의 행위를 보아서는 이후의 일이 그렇게 진행될 것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압살롬은 율법의 규정 때문에(출 22:16-17) 다윗이 나선다 하더라도 암논에게는 아무런 처벌도 내려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결국 압살롬은 시므온이나 레위(창 34:30-31)같이 자신의 손으로 죄를 물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의 입장도 난처했습니다. 그는 피해자인 다말의 아버지이면서 가해자인 암논의 아버지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암논만이 아니라 다말에 대해서도 화가 났을 것입니다. 다말의 행동은 집안의 부끄러움을 밖으로까지 알리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그는 피해자 편에 섰어야 합니다. 피해자 편에서 일을 해결했어야 합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적 용 : 죄의 시작은 달콤하지만 그 과정과 결말은 허무함과 파괴입니다. 죄로 인해서 파괴된 관계나 외로움이 있습니까?
영국의 청교도 존 번연이 국왕의 영을 어긴 죄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어느 날 간수장이 몰래 문을 열어주며 집에 가서 가족을 만나고 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번연은 나간 지 얼마 안돼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간수장이 이유를 묻자 “당신의 호의는 고마우나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 돌아왔소.” 그리고 한 시간 후 국왕이 직접 존 번연이 감옥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간수장이 번연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행동하셔서 제가 살았습니다. 이제 성령님이 인도하실 때 언제든지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치유와 회복이 있는 곳
삼하 13:20-22
어떤 아파트 단지는 아파트 평수가 크면 차 2대의 주차공간이 주어지고, 평수가 작으면 1대의 주차공간이 하나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어떤 변호사는 2대의 주차공간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항상 주차선 가운데에 주차하는데 경비가 말려도 자기 것인데 왜 그러냐고 하니까 주민들이 그 변호사를 비웃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집 아들이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하고 한참 돌다가 씩씩거리며 들어와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지금 변호사 차를 칼로 긁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입으로는 "그러면 되겠니?"라고 했지만 마음속에는 10년 묵은 체증이 풀리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원하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저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옛날 혈기를 아들이 그대로 가진 모습을 보고 등골이 오싹했다고 합니다.
대개 보면 부모의 것이 그대로 아들에게 물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것도 물려지고, 나쁜 것도 물려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넉넉하면 자녀도 넉넉한 마음을 가진 자녀로 자랄 것이고, 부모가 상처가 많으면 자녀도 상처가 많은 자녀로 자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본을 보이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마피아들은 인상도 아주 험악하고 매너도 매우 거칠 것으로 상상되는데 사실 마피아들은 가족을 참 아낀다고 합니다. 그들이 비록 밖에서는 총을 쏘고, 무섭게 싸워도 그들의 자식 사랑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피아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일은 자식을 해치는 일이라고 합니다. 마피아지만 가족의 연대 의식이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합니다. 그처럼 마피아도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데 우리는 더욱 가족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가끔 가족끼리 서로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생기지만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격려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름답게 이뤄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은 우리의 각종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한 보금자리이지 서로 상처는 입히는 전쟁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3장에는 엉망진창인 집안이 나옵니다. 형제 사이에 강간도 벌어지고, 살인도 벌어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집안의 가장이 바로 다윗인데 이 가정이 풍비박산이 됩니다. 첫 아들 암논이 자신의 이복 여동생인 다말을 강간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다윗이 심히 분노했지만(21절),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인데 어떻게 제대로 벌을 내리겠습니까? 그러니까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한을 품고, 이년 후에 계략을 꾸며 그의 이복 형 암논을 죽였습니다. 가족들이 서로를 혐오하고 죽이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왜 가정이 깨집니까? 통제는 너무 많이 하고 영향력은 너무 적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려면 통제는 가급적 적게 하고, 영향력은 많이 끼쳐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해야 합니다. 부부도 서로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서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들을 살펴보면 압살롬처럼 한을 품은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가정에서의 상처 치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과 유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정직한 자백과 잘못에서 돌아서는 회개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가정 내에서의 상처 치유를 위해서도 이와 같은 세 가지와 함께 기도가 필요합니다.
정직한 자백이 필요하다
가정 내의 갈등이 일어날 때 한 사람만 일방적으로 잘못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 말은 자기 잘못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태도가 바로 용기이고 성숙함입니다.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정말 낫고자 하고,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면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르게 될 희망은 없습니다. 몸에 이상 신호가 와도 "괜찮다!"고 하면 병은 더 커지게 됩니다. 병원에 가서 "제가 여기가 아픕니다"고 인정해야 그때부터 치료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가정 내의 상처가 치유되려면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자백이 없으면 용서도 없고, 치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자기 약점을 보는데 자기만 그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문제가 없다!"고 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치료의 길은 없습니다. 정직한 자백은 인 관계의 치유를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상처 입히는 행동을 그쳐야 한다.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입니다. 가정 내에 상처가 생겼으면 먼저 자신이 고칠 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서서히 변화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배우자의 잘못을 꼭 고쳐보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잘못이 고쳐지기는커녕 배우자에게 더 상처만 입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이 낫습니다. 남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막는다고 "내 맘대로 할 거야!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폭발해!"하고 소리치면 남편이 겁나서 물러섭니까? 더 반발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나가면 서로 상처만 입히게 되고, 아무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 문제는 더 꼬이고 악화됩니다.
아이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하게 하면 부러지고, 상처만 입습니다. 부드러운 것이 아이들 교육에 훨씬 효과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엄한 아버지로부터 많이 맞고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이 때리면 매의 효과도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어머니는 한 번도 때린 일이 없었습니다. 그냥 손을 붙들고,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는데 그러느냐?"고 하면 꼼짝 못하고 어머니 말은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강하게 우격다짐으로 남을 바꾸려고 하면 상처가 생기고, 상처는 또 상처를 부르고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에 최선을 다하고 상처를 주는 행동을 멀리해야 합니다. 특히 사소한 행동으로 인한 상처를 잘 요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소한 일이 커져서 가정이 깨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때로 아주 사소한 일에서 큰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잘못이라도 생각나면 그 잘못에서 과감히 돌아서고, 특히 잘못된 언어를 주의해야 합니다. 옛말에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곱지 않은 말을 들어도 곱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을 그 애쓴 만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상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가정 내의 갈등은 하루 속히 털어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위해 먼저 화해를 손을 내미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화해를 잘 받아들이는 너그러움도 있어야 합니다. 남이 화해를 요청할 때 마음을 닫고 있는 것은 화해의 싹을 자르는 것이고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잘못을 많이 저질렀다고 해도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은 더 잘못된 마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 기꺼이 용서하고, 기꺼이 용서받아야 합니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갈등을 풀려고 애써야 합니다. 갈등이 풀어지면 친밀성은 더 깊어지지만 갈등을 풀지 않으면 더 비참하게 되고, 언젠가는 그 갈등이 인생 전체를 불태울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 불이 붙는 화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감춘다고 감추지만 대개 그 열기가 느껴집니다. 만약 그것을 끄지 않으면 그것은 전 가정을 태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뿌리에 붙은 불을 하루빨리 꺼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마음 문을 열고 상대방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겉으로는 가장 성숙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가장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정의감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사랑으로 덮을 수 있어야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로 성령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통해서 이론적인 무장을 잘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가족들에게 잘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가족을 매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도해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제일 먼저 성품이 부드럽게 되고 거기에서 문제 해결이 시작되고, 거기에서 상처 치유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한때 전투적이 되고, 표정이 근엄하게 되고, 목소리가 쉰 소리가 되고, 눈빛이 날카롭게 되는 것을 성령 충만의 표시로 오해한 때가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야 하는데, 비정상을 성령 충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에는 쉰 소리가 더 성령 충만한 소리라고 여겨서 하나님이 주신 목소리를 일부터 망가뜨리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허영심이 충만한 것이지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열심히 전도는 하는데 자주 사람들과 소리 지르며 싸움과 다툼을 일삼고, 식당에 15명이 와서 10인분만 시키고 악을 쓰고 기도한 후에 계속 밑반찬을 달라고 해서 원가보다 더 먹어치우는 성령 충만한 교인들을 보면서, 그분은 고등학교 때에 "주님! 저는 성령을 주셔도 충만하게는 주지 마세요." 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나오는 말마다 "예수!"라는 단어가 안 들어간 말이 없을 정도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에 상처를 입는지 모릅니다. 남에게 말로 상처를 입혀 놓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야! 그래서 뒤끝이 없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야 상처를 입혔으니까 뒤끝이 없지만 상처를 입은 사람은 얼마나 뒤끝이 많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분들을 보면 친구들이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이웃들이 혀를 내두르고, 심지어는 가족조차 외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성령 충만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관계가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부부관계가 좋고, 상하관계를 잘 하고, 고부관계, 친구관계, 교회 내의 성도관계를 잘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가장 큰 증거입니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내게 어떤 은사가 있느냐?"가 아니라 "나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우냐?"에 있습니다.
자동차에는 2만개의 부속품이 있는데 대부분 무쇠 덩어리들인데도 아무 마찰 없이 굴러가는 이유는 윤활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성령 충만하면 아름다운 관계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성령 충만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그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때 우리의 각종 상처는 급속히 치유될 것입니다. 이기주의와 욕심 그 두 가지만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말씀을 통해 사랑과 헌신을 다짐하고, 이번 기회가 각종 상처가 치유되는 뜻 깊은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내와 남편
부부란 두 개의 반쪽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결혼서약은 두 개의 물방울이 모여 한 개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는 가위이다. 두 개의 날이 똑같이 움직여야 가위질이 됩니다. 날 한 쪽만으로는 아무리 좋은 쇠라도 가위는 못 됩니다. 날이 두 개가 있어도 간격이 있어서는 가위질이 안 됩니다. 바짝 붙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부부란 피차의 실수를 한없이 흡수하는 호수입니다. 이 호수는 무척 깊어 실수의 크기는 그다지 문제가 안 되는 곳입니다. 좋은 남편은 귀머거리고 좋은 아내는 소경이 됩니다. 좋은 남편은 골라서 듣기에 안 들어도 좋을 만한 것에는 귀머거리가 됩니다. 좋은 아내는 골라서 보기에 안 보아도 좋을 만한 것에는 소경이 됩니다. 좋은 남편은 고개로 사랑하기에 끄덕끄덕하는 약간의 고개 운동이 아내를 안심시키며 좋은 아내는 눈으로 사랑하기에 미소를 띠고 눈으로만 살짝 흘기는 다소의 근육운동이 남편을 안심시킵니다.
은혜로 사는 가정
은혜는 주는 자 입장에서는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값없이 거저 주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는 자 입장에서는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값없이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은혜의 개념은 세상의 개념이 아니라 천국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천국의 개념인 은혜를 맛보아 알 수 있도록 가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정은 은혜의 통로입니다. 가정에서 은혜를 맛보아 아는 자들이, 세상에 나아가 천국의 개념을 가르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름다운 가정, 그곳은 바로 은혜의 원천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부부가 서로 한 몸임을 고백하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돕는 배필의 역할을 감당했던 바로 은혜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원죄 이후, 가정은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은혜를 상실하고, 율법이 그들을 묶기 시작하였습니다. 서로 정죄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수치와 열등감, 두려움이 지배하는 곳으로 전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은혜를 상실한 가정은 지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상실한 인간들에게 다시 은혜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정의 회복은 바로 상실한 은혜의 회복
은혜로 사는 가정이 늘어 날 때에, 이 땅에 교회의 진정한 부흥이 있고, 은혜로 사는 가정이 늘어 날 때에 이 땅에서 천국이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종류의 안경을 끼고 살아갑니다. 하나는 은혜의 안경이요, 또 다른 하나는 율법의 안경입니다. 파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이 파랗게 보이듯, 은혜의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은 온통 은혜로 가득 차보입니다. 율법의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은 온통 율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은혜로 사는 가정은,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하고 들어 온 남편을 위로하면서, “여보 괜찮아요, 전 당신만 내 옆에 있으면 되요. 여보, 우리 힘내요” 라고 위로하는 아내가 있는 가정입니다. 은혜의 가정은, 터무니없는 실수를 한 아내에게 “여보, 괜찮아, 우리는 늘 실수하는 거야. 여보! 힘들지, 그렇지만 내가 당신 곁을 지켜 줄게. 내가 책임질게. 아무런 염려하지 마”하고 달래 주는 남편이 있는 가정입니다. 병든 배우자를 위하여 끝까지 돌보며, 돕는 배필의 자리를 지켜 주는 배우자가 있는 가정입니다. 은혜의 가정은 시험 성적이 떨어져 고민하는 자녀에게, “그래 괜찮아, 너는 사람을 섬기는 은사를 받았으니, 공부 대신에 사람을 섬기는 일로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을 거야. 아빠는 너를 믿는다. 너를 위해 기도하마”라고 격려하는 아빠, 엄마가 있는 가정입니다.
은혜를 깨달아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고 은혜를 베풀며 나누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은혜는 감격이며, 감동입니다. 은혜로 사는 가정은 지옥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풍성한 은혜를 체험해야만 우리의 인격도 성숙합니다.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살 소망을 갖고 인생의 꿈을 갖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들이 맺는 관계, 그것이 친밀함입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고, 차이는 있지만 갈등은 없습니다. 그곳에 진실한 하나 됨이 있고, ‘우리’라는 새로운 관계가 시작됩니다. 이 친밀함은 우리에게 새로운 언약, 보다 성숙한 언약의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은혜를 처음 체험하는 곳도, 완성하는 곳도 가정입니다. 가정은 은혜의 통로입니다.
상처받은 기억의 치유
우리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기억입니다. 좋은 기억은 사람에게 놀라운 활력을 제공해 줍니다. 고난의 겨울과 같은 인생의 순간에도 장미꽃을 피게 하는 것이 좋은 기억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기억이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풍성해지는지 모릅니다. 좋은 기억은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모릅니다. 반대로 나쁜 기억은 우리들의 삶에 큰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그 상처가 있기에 조금마한 어려움이 있으면 그 상처가 도집니다. 본인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다 잊었다고 하지만 그의 무의식 층 깊은 곳에서는 그 상처의 흔적이 남아서 현재의 삶을 좀먹고 고통스럽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스런 기억을 치유하는 것은 우리 영혼과 마음과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기억 치유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상처가 치유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깊은 상처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상처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흔적 없이 지워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상처가 시간에 따라 아물 수는 있어도 그 상처가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경우에는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워진 것이 아니라 무의식으로 내려가 잠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팠던 기억을 치유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아팠던 기억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선천적으로 잘 잊어버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분들은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아픔을 잘 잊어버리는 것은 정말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정도 과거의 아픔을 잊어버리게 하는 장치를 만드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교통사고를 당해서 기절한 경우의 예가 그렇습니다.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대개 그 순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마지막 순간의 격렬한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고통스런 사건을 오래 기억하고 있으면 얼마나 삶이 어려워지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는 회로가 과중한 충격을 받을 때 그것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정신적이며 정서적인 퓨우즈 장치를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픈 기억을 잊어버리도록 도와주어야지 아픈 기억을 다시 되살려서 치유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일리가 있는 질문입니다. 그 말이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무의식층 속으로 들어간 아픈 기억은 그냥은 잘 잊혀 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목사나 정신과 의사들은 정서불안의 증상을 보이는 분들과 상담을 할 때 대개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반복하여 떠오르는 어떤 영상 같은 것이 있습니까?" "꿈속에 반복하여 나타나는 형상이 있습니까?" "마음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영상이 강렬하여 생활이 방해받는 것이 있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의 반복적인 영상은 무의식 층에 자리 잡은 마음의 상처로 말미암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 마음의 상처의 원인을 발견하고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불로 그 상처를 치유해야 그 상처가 곪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장 흔하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관계는 바로 가족관계입니다. 특히 부부관계로부터 비롯된 마음의 상처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서로가 매력이 넘친다고 생각하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가 감정적인 것에만 치우치지도 않고 지성적인 결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분명히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결혼합니다. 이상적인 부부일지라도 그들은 결혼 초부터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 사랑하는 부부가 마음의 상처의 가장 큰 원인이 될까?" 혹은 "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마음의 상처의 가장 큰 원인이 될까?" 그런 의식을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은 분들은 없을 것이지만 이것 때문에 너무 고뇌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마음의 상처에는 그 중심부에 배신감이 자리 잡고 있는데 특히 배신한 그 사람이 나에게 있어 더욱 의미 있고 중요한 인물일수록 그로부터 받는 배신감은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이 지내고 가장 의미 있는 대상인 배우자로부터 상처를 당할 확률이 큽니다. 이 사실을 냉철하게 바라보시고 부부간에 혹은 다른 가족관계에서 받는 상처로 인해 너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관계란 한 몸의 관계이므로 내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면 상대방도 틀림없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시고 먼저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배우고, 자라고, 가정을 위해 일할 때 보람을 느끼고 가정에서 죽도록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출생, 성장, 죽음에 이를 때까지 가정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또한 가정은 위로의 처소요, 소생케 하는 병원이요, 안식처요, 사랑의 요양소요, 지상의 낙원이어야 합니다. 가정은 우리에게 세 가지 면에서 안식을 주는 곳인데 마음의 평안, 정신적인 안정, 육체적인 피로회복 등입니다. 가정이 안정과 쉼을 제공해주지 못하면 남편, 아내 혹은 자녀들은 밖으로 돌게 됩니다. 집에 오면 쉴 수 있어야 합니다. 집이 전쟁터가 되면 안 됩니다.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세계의 절정은 바로 가정인데 이 가정은 바로 천부적으로 하나님께서 창조질서 중에 주신 축복의 은총들이 있는 곳입니다. 가정에 주어진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부모, 자식 같은 이름들은 하나님께서 가정을 위하여 직접 주신 축복의 이름들이지 결코 사람이 배우거나 노력하거나 연구해서 얻은 인적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은총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신, 사실상 사랑의 대명사이기에 그 이름 안에는 이해와 용서를 나타내는 힘이 있고 서로를 축복하는 기원의 마음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에는 사랑이 있고, 이해와 용서와 축복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 방바닥의 보일러 배관이 터져서 온통 물바다가 되어서 며칠 고생고생을 하여 고친 뒤 방바닥이 회복되었을 때에 그 평안과 따듯함이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뱃속이 불편하여 계속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나고, 그래서 음식 먹는 것이 겁이 나고 걱정부터 되고, 얼굴은 수척해지고 기력은 점점 떨어져 생활의 의욕조차 없어져가다가 다시 속이 편해지고 건강이 회복이 되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여 서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계속 합니다. 집에 들어오면 싸늘한 냉기가 돌다 못해 원수같이 느껴지던 부부사이가, 화해와 용서로 다시 회복이 되었을 때의 가정의 화목과 평화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깨어진 것을 다시 붙이고, 병든 것이 건강해지고, 멀어진 것이 가까워지고, 불안과 두려움과 노예처럼 살아가던 삶이 평안과 자유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고, 사랑이 회복되는 것이며,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런 회복의 사건들을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진리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에 회복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 사랑을 나누고 축복하는 가정에 예배가 있고, 기도가 있고, 찬송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넘치는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약속한 사랑이 변하지 않으며, 머리가 있는 가정, 대화가 있는 가정,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가정, 온 가족이 구원받은 확신이 있는 가정, 어떤 아픔이나 상처나 상실을 경험했을 지라도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있는 곳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