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마음의 행로> ]
세월이 지날수록 구식냄새 폴폴 나고 촌스럽게만 느껴지는 영화가 있습니다. 반면에 세월의흐름 속에서도 더욱 견고해지는 영화도 있습니다. 이 영화 <마음의 행로>는 당연히 후자에 속하는 영화라 하고 싶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보다는 일회적이고 즉흥적인 로맨스가 판치는 요즘입니다.(사진,폴라와 찰스)
최근 나오는 영화들은 폭력, 섹스, 배신, 음모, 오락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자극적인 판타지가 없는 영화는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런 영화를 반기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행로>는 여전히 유치한 영화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각박한 시대에 이처럼 훈훈한 작품을 감상할 기회마저 없다면 우리는 너무나 삭막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아닐까 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쓸쓸해질 때 당신의 잃어버린 추억을소환해줄 동화 같은 한 편의 영화가 곁에 있다는 것은 더없는 위안입니다. 바로 그런 영화, 이름도 멋진 <마음의 행로(行路)> 입니다.
이 영화는 <애수>, <작은 아씨들> 등의 주옥같은 영화를 만든 멜로드라마의 거장 마빈 르로이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원제인 는 ‘뜻하지 않은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마음의 행로>라는 멋진 제목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영화 스토리를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전쟁 중 부상을 입고 기억 상실증에 언어장애까지 겹친 찰스(로널드 콜맨 분)는 전쟁이 끝나고 어느 날 안개 자욱한 새벽에 전쟁 부상자들을 위한 정신 요양원을 몰래 빠져 나옵니다. 그 뒤 찰스는 폴라(그리어 가슨 분)라는 여자를 만나 건강도 되찾고 결혼도 하면서 아들도 낳고 안정적인 삶에 안착합니다.(사진,행복했던 두 사람)
그는 작가로도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리버풀에 잡지에 연재할 소설을 계약하러 가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사고로 잃어버린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자신이 명문가에 대재벌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자신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그만 폴라와의 결혼생활이 기억 속에서 지워져 버립니다. 자신의 원래 고향집으로 돌아가 억만장자의 가업을 물려받은 찰스는 삶이 성공해갈수록 마음 한구석에 텅 빈 무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어느 날 잡지에서 남편의 기억이 돌아와 이제는 대기업의 회장이 되었다는 기사를 본 폴라는 조용히 그의 개인 비서로 취직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한없이 기다리며 보필하면서 폴라는 그의 기억이 돌아오는 그 기약없는 나날을 기다립니다. 과연 남편의 기억은 돌아올까요?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는 1954년과 1967년 두 번이나 수입 상영될 정도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촬영이 끝나던 날 로널드 콜먼은 촬영장에서 "촬영이 영원히 지속되길 이토록 원했던 영화는 없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기억상실증의 찰스에게 푹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명 촬영감독 조셉 로텐버그는 그리어
가슨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카메라 렌즈에 여자 스타킹을 덮어 쉬어 그녀를 최대한 미스테리하게 처리했는데 그리어 가슨은 두고 두고 이 촬영기법에 무한한 감사와 존경의 뜻을 보내었다고 합니다.(사진,극진히 찰스를 간호하는 폴라)
로널드 콜만은 1차 세계대전 때 참전한 경험이 있으며 1914년 프랑스 동북부 이프레스(Ypres) 전투 당시 실제로 몇 달 간의 기억 상실증을 경험한 적 있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뉴욕의 ‘라디오 시티 뮤직 홀’에서 12주 연속 연속으로 상영되면서 전회 매진하는 진기록을 이어나갔습니다. 극장 측은 몰려드는 관객 때문에 아침 7시 45분에 첫 회를 상영해야 했습니다.이 영화는 여 주인공 그리어 가슨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였습니다.
찰스를 사모하는 역으로 나온 수잔 피터슨은 이 영화를 찍고 3년 뒤 사냥터에서 허리를 다쳐 반신불구로 지내다 1951년에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굿 바이 미스터 칩스>의 작가 제임스 힐튼의 원작은 복잡한 구성으로 유명해서 과연 이 영화가 성공할 수 있을지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지만 르로이 감독은 각색을 최대한 심플하게 하면서 흥행에 성공을 가져왔습니다.
* 출연배우 그리고 감독 이야기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 남자 주인공 찰스를 연기한 로널드 콜맨은 1920년대 초반부터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까지 활발히 활동한 배우였습니다. 영국신사 특유의 신사적 매너와 귀족적 풍모를 지닌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콧수염. 일명 ‘콜맨 수염’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을 만큼 그의 콧수염은 큰 인기였습니다.
그의 외모가 자주 클라크 케이블과 비교되는 것도 아마 콧수염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그는 폭탄가스에 노출되어 전투신경증을 앓았고 몇 달 후 훈장을 받고 제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영화 출연 당시 그의 나이는 오십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젊은 극 중 두 여배우와 로맨스를 펼치는 그가 좀 늙어 보였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무난하게 배역을 소화했습니다.(사진,기억상실증에 걸려 고국으로 돌아온 찰스)
자상함, 온화함, 우아함, 고귀함과 정숙, 공작부인. 이런 말들은 여주인공으로 나온 그리어 가슨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녀는 런던대학과 프랑스 그로노블대학에서 수학한 재원이기도 합니다. 지적이며 정제된 연기스타일로 많은 영화에서 고귀한 여성상, 구원의 여성상, 이상적인 어머니상을 제시한 배우로 기억됩니다. 1942년 작 <미니버 부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이밖에 <굿바이 미스터 칩스>, <오만과 편견>, <퀴리부인> 등에 출연했으며 생애 통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일곱 차례 노미네이트된 실력파입니다.
그리스 여신을 떠올리게 하는 조각 같은 미모의 그녀는 두 번의 이혼 뒤에 텍사스 석유재벌바디 포겔슨과 재혼했으며 1999년 92세의 나이로 영면했습니다.
이 영화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또 한 명 있습니다. 극 중에서 찰스를 연모하는 키티 역할을 맡은 수잔 피터스입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그리 긴 분량을 출연하지 않았음에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19세의 나이에 할리우드에 입성해 불과 2년 뒤 주연배우로 발돋움할 만큼(사진, 마지막 퍼즐을 맞추는 두 사람)
연기자로서 타고난 소질을 보였지만 그녀는 매우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인물이기도 합니다.
앞날이 창창했던 그녀는 1945년 영화배우였던 남편 리처드 퀸, 가족들과 샌디에이고 인근 쿠야마카산에서 오리사냥을 즐기던 중 총기오발 사고를 겪습니다. 척추에 총알을 맞은 그녀는 다리가 마비되어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해 살게 됩니다. 그녀 나이 불과 스물넷에 당한 이 사고로 이후 그녀의 삶은 휠체어 전문 배우로 제한됩니다. 비운의 운명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탓일까요. 그녀는 서른 살이 되던 1952년 신경성 식욕부진(거식증)과 신장질환 및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이 영화를 연출했던 멜로 드라마의 거장 마빈 르로이 감독은 극히 통속적인 소재를 가지고 뜻밖의 감동을 이끌어 내는데 독보적 재능을 지닌 인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1940년 발표한<애수(비비안 리, 로버트 테일러 주연)>는 올드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만큼 큰 사랑을 받은 그의 대표작입니다.
이 영화는 후대 싸구려 멜로영화들의 교본이 될 정도로 뻔한 소재를다뤘지만 르로이는 이 영화를 그저 그런 멜로드라마의 한계를 넘어 선 불멸의 흑백 고전으로 남겨놓았습니다.(사진,찰스를 짝사랑하는 키티)
베스트셀러 작가 제임스 힐튼의 소설 ‘랜덤 하베스트’를 각색한 <마음의 행로> 또한 그의 연출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눈물 콧물 짜내는 삼류드라마에 머물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애수>와 <마음의 행로>의 흥행에 연거푸 성공함으로써 순수 멜로의 거장으로 불리게 되지만 1951년에는 <벤허>에 필적할 만한 대작 시대극 <쿼바디스>를 연출하여 또 한 번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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