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서원 글 읽는 소리
김 선 구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무슨 뜻인지 몰라도 목탁에 맞춰 읊조리는 소리의 리듬이 마음 한구석에 파장을 가져왔다. 서당에서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도 좋았다. 떠들썩했지만 멀리서 들으면 여러 개의 음정이 어울려 한 소리를 내었다. 종성이 진동을 아우르며 닥아 오는 것 같은 감흥.
초등학생 때 서당에서 학동들의 글 읽는 모습을 본 일이 있다. 이웃마을에 한문서당이 있어서, 당시에는 월사금을 낼 능력이 없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학교 대신 서당에 다녔다. 무릎을 꿇고 상체를 앞뒤로 흔들며 글을 읽는 모습이 신기 했다. 그 곳 학동으로부터 글 한 구절을 배웠다.
“하늘 천 따지 검은 솥에 누룽밥. 박박 긁어서 선생님은 한 사발 나는 두 사발.
선생님 반찬은 구렁이 토막. 나 반찬은 생선토막.“
공부에 질력이 난 학동이 장난삼아 지어낸 글인 것 같다. 그렇지만 재치 있는 글 솜씨임에는 틀림없었다. 개구쟁이들이 모여 떠들썩한 사태를 연출하는 것 같았지만 서당의 진풍경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이러한 운율에 마음이 끌리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이웃에 살았던 할아버지 덕이 아닌가 한다. 그 댁에 놀러 가면 나를 앉혀놓고 몇 개 글귀를 가르쳐주었다.
“자시에 생천 하니 호호탕탕 하늘 천. 축시에 생지 하니 만물장생 따 지.
춘풍세우 호시절 현조남남 검을 현. 금목수화토 오행 지 중 중앙 토 생 누를 황.“
나는 뜻도 모르고 그저 노래처럼 되 뇌이기를 좋아했다.
지금에 와서 들으니 천자문뒤풀이라 했다. 천자문 한권을 떼고 난 다음에 하는 글짓기대회로 천간지지 중 12지를 천자문에 결합시켜 해설해 놓았다. 서당문화 중 1번지가 글 읽는 소리가 아닐까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 유학이 발전되지 않았을까! 요새 유학강좌를 들으면서 과거 선비들이 추구했던 생활상을 더듬어 보며 그 시절을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새삼스럽게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근래 대구에서 연경서원의 복원을 논의한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어서다. 연경서원이 복원된다면 대구의 옛 선현들이 남긴 문화유산과 그들이 밟았던 서원의 풍경을 재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앞선다.
연경서원은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대구 최초의 서원이다. 중종 37년(1542년) 주세붕이 경북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설립하자, 경주 서악서원, 해주 문헌서원, 영천 임고서원 등이 뒤를 이었다. 이에 퇴계의 제자 매암 이숙량과 계동 전경창이 중심이 되어 대구지역에 서원 건립을 추진했고, 명종20년(1565년) 금호강의 지류 동화천변에 서원을 설립하였다. 이것이 연경서원이다.
연경(硏經)이란 유교의 경전을 공부한다는 의미이다. 왕 건이 견 훤과 대적하여 벌일 공산전투를 준비하던 중 지형정찰과 민심을 다독일 요량으로 동화천 산골마을에 이르렀다. 이 때 선비들이 글 읽는 소리가 낭낭하게 들렸다. 왕 건이 감복하여 “열심히 연경(硏經) 하는구나!”하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마을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여기가 현재 대구 북구 연경동이다. 그 후 600년 뒤 연경서원이 세워졌으니 듯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서원의 설립에는 지방 수령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연경서원만은 지방유림에서 자발적으로 설립한 민간학교라는 점이 특이했다. 따라서 제향보다는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대구 1세대 유학자라 할 전경창, 채응린, 정사철 등이 강학을 맡았다. 이들은 대구가 배출한 대표적 인재들로 대구지역 유학의 르네상스를 연 선구자들이다. 서사원, 손처눌, 곽재겸, 정광천, 이주, 류요신 등이 배움을 얻었고, 이들 2세대 유학자들이 스승을 이어 강학에 나섰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 제자들이 137명에 이르렀다. 이 시기가 대구 유학의 황금기였고, 연경서원이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허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서원이 소실되고 3세대를 배출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선조 35년(1602년) 서원을 다시 준공하고, 그 후 사당을 지어 이황을 위시하여 선현들의 위폐를 배향했었으나, 고종8년(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재건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또한 그 위치마저 명확치 않다고 한다.
연경서원은 설립 후 처음에는 화암서원이라 불렀다. 서원 인근에 화암(畵巖)이라는 절경의 바위절벽이 있어서다. 이숙량의 표현을 빌리면 “화암은 연경의 서쪽 끝을 지켜준다. 붉고 푸른 절벽이 우뚝 솟아 기이한 형상이 그림같이 아름다워 화암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연경서원의 위치를 짐작 할 수 있다고 하여 다행이다.
고려 말 안향이 몽골로부터 전래한 성리학은 야은 길재가 고향 선산에 머물며 도학을 폄으로써 그 기운이 낙동강을 따라 펼쳐졌다. 그 이후 충의와 절의 정신을 높이고 효를 실천하는 실천궁행(實踐躬行)의 도를 펼쳐나가는 학파가 생겼으니 이를 일러 사림파라 했다. 사림파의 계보는 길재에 이어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퇴계로 이어졌고, 낙동강 상류 안동에서 퇴계학으로 뿌리를 내렸다. 퇴계학이 대구로 뻗어 내려 또 한줄기 기운을 형성했던 곳이 연경서원이다. 그럼에도 그 자취마저 모호한 현실에 암담함을 금 할 수 없다.
연경서원이 서는 날 선비들이 글 읽는 소리가 동화천을 거쳐 금호강으로 파문을 일으키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렇게 되면 임진왜란과 서원철폐령으로 상처받은 한이 풀리지 않을까! 이어서 글 읽는 소리가 낙동강을 벗어나 장강에 이르고, 주희의 고향으로 전달되기를 기대해 본다. 주희의 성리학이 퇴계학의 모습으로 단장하여 본고장을 방문 하는 모습도 상정해 본다. 그 때 금호강의 르네상스가 다시 재현하게 되지 않을까. 연경서원에 글 읽는 소리가 들릴 날을 고대한다.
첫댓글 연경동에 연경서원이 있었군요. 복원하면 좋은 관광 명소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 달구벌수필 연간집 발간에 특집으로 "대구 톺아보기"란 과제가 주어져 고심 끝에 적어 본 글입니다. 여러 해 전 차를 끌고 연경을 지나 본 일이 있습니다만 그 때만 해도 허허벌판, 문화재가 있으리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연경이 금호강 선유의 마지막지점이라는 최해량 국장의 강의를 듣고 힌트를 얻어 자료를 조사 정리 해 보았습니다. 화암절벽의 모습이라던가 연경서원의 위치 등을 더 탐색해 봤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