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에는 오렌지족이라는
‘신기한 옷을 입고 괴상한 행동을 하는
젊은 집단’이 있었는데요.
일제 식민지인 1930년대,
경성을 무대로 오렌지족처럼 활동한
사람들이 있다면 믿어지시나요?
오늘은 바로 이 모던걸, 모던보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일제 식민 시대에 서구 자본주의와
근대 문화가
일본을 거쳐 조선에까지 상륙했습니다.
도시로 변신한 조선의 경성은
화려한 불빛으로 시골뜨기를 유혹했고,
새로운 문명과 소비 문화를 즐기는
모던 커플들은
기성세대와는 다른 그들만의
근대 문화를 향유하게 됩니다.
지금의 강남과 강북처럼
30년대 경성은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었어요.
그 결과 전근대적인 북촌과 달리
남촌에는 화려한 고층 건물과 백화점,
네온 사인으로 뒤덮인 근대 도시가
발전하게 됩니다.
당시 모던걸의 패션과 흐름을 주도한 것은
경성의 여학생들이었어요.
여학생들은 학교 연합 바자회를 통해
자연스럽게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지방까지 포함 모두
10여 개의 학교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학생들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고 하네요.
통학하는 전철 안에는
손잡이를 잡고 선 여학생들의 손목에
모던과 부를 과시하는
금 손목시계와 보석반지가 번쩍였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전차 좌석이 텅 비어 있는데도
앉지 않고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어
손목시계를 자랑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당시에는 흔한 풍경이었다고 해요!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일차적 특징은 패션이었어요.
패션을 통해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은
전근대적 가치들과
분명한 선을 그었던 셈이죠.
그들의 패션은 전근대적 관습과 규범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기성세대로부터 많은 비난과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요즘에도 젊은 세대들에 패션에 대한
기성 세대들은 불만은 여전하지만요.
초기에는 보이시 스타일이,
중반 이후부터는 상 하의가 하나로 된
점퍼 스커트가 유행했습니다.
원피스 드레스는 대부분 벨트로 마무리되었고
부드럽고 입체적인 카울 네크라인이 인기였고요.
모던걸들의 짧은 퍼머머리와 크로슈 착용은
대중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보석 반지와 금팔뚝시계를 선호했던
모던걸 패션에서 주목을 끈 것은
짧은 치마와 작은 양산이었습니다.
60년대 미니 스커트가 난리였다고 하지만
이미 30년대에 짧은 치마가 유행한 것이죠.
‘쓸모 있는 것은 점점 작아지고
쓸데없는 것은 점점 커진다’는
당시 패션에 대한 정의는
여성의 사치에 또 다른 표현은 아니었을까요?
핸드백과 가방은 엄청나게 큰 반면
머리와 양산, 치마 길이는
무척이나 짧고 작았습니다.
햇빛을 가리거나 비를 막는 우산은
작아지고
손에 들고 다니기 위해선 작아져야 할
핸드백이 커지는 경향에 대해
사회는 비판적이었다고 해요.
지금 당장 필요 없는,
그렇다고 실용적이지도 않은
금시계나 보석반지,
작은 양산과 짧은 치마로
치장한 모던걸 패션은
당시 계급간 위화감을 조성하는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철 안에서나 모임에서도
거울과 분첩을 넣고 다니면서
아무데서나 회장을 하는 모습도
모던걸들이 시초였어요.
이런 모던걸들을
기성 세대는
뻔뻔하고 정숙하지 못한,
여자답지 못하다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화장을 하는 모던보이들에 대해서도
남자답지 못하다고 비판을 했고요.
아마도 이런 비판의 밑바탕에는
여성은 늘 정숙해야 하며,
남자는 강하고 거칠어야 한다는
전근대적 남성중심적 사고가
강력하게 깔려 있었겠죠?
여름이 되면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은
자신의 육체미를 과시했습니다.
모던보이는 가슴팍을 다 열어 젖히고,
하체도 거의 드러낸 채
게다를 신은 모습이었고,
모던걸도 가슴이 거의 드러난 상의에
치마 길이 또한 아슬아슬했어요.
여성교육자 김활란은
인습을 타파하겠다며
1928년 단발머리를 단행합니다.
그녀의 상고머리식 단발이
신여성 사이에 유행하자 사회와 언론은
‘모던걸은 못된 걸’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며 비판을 했고요.
여성의 짧은 머리 하나에도
고난이 있었던 셈이죠.
당시 조선일보는
종로를 활보하는 모던걸들을
잡종 스타일을 연출하는
천박한 부류로 치부하며
이 정숙하지 못한 요괴들이
늘어난다며 한탄했으며
‘꽃보다 다리 구경’이라는 기사를 통해
모던걸들의 노출패션을 비꼬기도 했답니다.
그늘도 있었습니다.
당시 모던걸들은
별다른 생활 수단 없이
남에게 기대에 살아가는 기생성으로 인해
사회적 눈총을 받기도 했어요.
거리로 나선 인텔리 모던걸들은
화장을 하고 광화문으로 나와
사내에 이끌려
전차를 바꿔 타고
한끼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식민지 도시의 빈곤이
여학생 출신 모던걸들을
유녀의 세계로 내몰았던 것이죠.
모던보이들은 보통 자본가의 아들이자
부르주아의 후예들이었어요.
하지만 일찍부터 근대문화의
세례를 받은 가난한 인텔리들도
모던보이 행렬에 합류하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당시 유행하는 중절모자나 백 바지,
뿔테 안경은 걸치지 못해도
양복만큼은 걸쳐야 했기에
그들은 고물상 양장점을 찾게 됩니다.
머리 속으로는 어여쁜 모던걸과
왈츠와 탱고를 생각하지만 실상은
고물상 양복점에서 구입한 양복에
배고 밴 나프탈렌 냄새가 코를 찔렀다고 해요.
인텔리 실업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모던보이 행세는
찻집에 들러 커피 한잔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고요.
1930년대 모던걸과 모던보이 패션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은
영화와 유성기였어요.
그들은 영화를 보고
주인공의 패션을 따라 하고
유성기를 통해 유행가를 배웠습니다.
미국 서부 영화에 나오는
카우보이 가죽 바지 덕분에
조선 모던보이들은
세계 패션보다 빨리
나팔 바지를 입기도 했고요.
영화는
라이프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서구식 결혼 문화였어요.
지나가는 목사를 끌어다가
전광석화 같은 결혼식을 올리는
서구 결혼 문화를 흉내내어
영화론 모던보이들은 지나가는 여인을 따라가
결혼 신청을 해
결국 정신 병자로 몰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서구 문화 따라 하기는
계속되었답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패션의 속성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럭셔리 만능주의나 물신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193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이 남겨 놓은
아픈 흔적이 아닐까요?
주체적인 패션이 아닌
서구의 패션을 따라 하는
사대주의 패션의 뿌리가
지금도 고질적인 ‘명품병’으로
남아 있으니까요.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조선의 오렌지족 ‘모던보이, 모던걸’의 패션,
어떻게 보셨나요?
현대의 패션은 후대에 어떻게 회자될 지
벌써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