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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세르
Michel Serres, 1930.9.1~2019.6.1
프랑스 아장에서 태어났다. 미셸 세르는 철학과 과학을 넘나들며 많은 책들을 썼다.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프랑스 인식론계의 거두로 꼽히
는데, 그의 철학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헤르메스다. 그리스신화에서 신들의 사자(使者) 노릇을 하는 헤르메스는 부업으로 지식과 교역을 관장한다. 세르는 다섯 권의 '헤르메스' 시리즈를 냈는데, 출간순으로 《의사소통》(1969), 《간섭》(1972), 《번역》(1974), 《배분》(1977), 《북서 항해》(1980)가 그것이다. '헤르메스'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북서항해》는 그가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기 전 잠시 해군학교에 다녔고 사범학교 졸업 뒤에는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북서 항해》는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세르가 철학과 자연과학 사이에 난 뱃길을 따라가며 두 학문의 지적회통을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라이프니츠 체계와 수학모델들>(1968)이었는데, 그가 학자로 출발하는 지점에서부터 자연과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분과학문으로 갈라져 있는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에서 서로를 잇는 헤르메스 노릇을하고자 했다. 고종석은 세르를 소개하는 짧은 글에서 세르의 학문이 필연적이고 폐쇄적인 체계가 아니라 '불가역적이고 우연적이고 개방적인 열역학 체계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적는다. *철학자의 사물들(장석주)
https://naver.me/GVWvQhIr
≠미셸 세르, 박동찬 역 <<해명>> 솔, 1994.
브뤼노 라투르가 질문하고, 미셸 세르가 답한다. 세르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지침서. 두 사람의 갑론을박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차례
첫번째 대담 : 교육과정
두번째 대담 : 방법
세번째 대담: 증명
네번째 대담: 비판의 종말
다섯번째 대담 : 지혜
미셸 세르 연보
1930년 프랑스 남서부 아장 출생. 이공계에 속하는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 학교를 중퇴하고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한 뒤 고등사범학교 문과시험 준비반을 거쳐 1952년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세르는 과학과 문학의 소양을 쌓고, 이 이중의 교육은 고독하고 독창적인 철학적 여정으로 그를 인도한다. 1955년 철학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한 후 군에 입대 해군장교로 대서양, 지중해 함대에서 복무한다. 196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클레르몽-페랑에서 과학사 교수로 강단에 섰고 파리 8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는 파리 1대학의 역사학과에서 과학사를 가르친다. 1984년 이후 미국 스탠포드 대학 교수로도 일했다.
그는 자신을 "스승도 제자도 없는" 사람이라 칭한다. 그는 어떤 학파에도 속하지 않으며 어떤 기준으로 분류할 수 없는 특이한 철학자다. 20세기 들어 학문영역이 전문화되고 세분화됨에 따라 이 영역에서 저 영역으로 날개가 달린 듯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는 국외자로 비쳤다. 그러나 1990년 3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과학, 철학, 문학, 법학, 인류학, 종교 등을 서로 연결하려는 그의 노력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고, 그의 철학은 학문 간 상호 연관성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는 이 시대의 새로운 정신으로 등장하게 된다.
초기의 5부작 <헤르메스>(1968~1980)시리즈에서 그는 과학과 문학, 이성과 꿈을 구분하는 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의 과학 중심의 실증적 이성관에 대하여 라이프니츠적 영감으로 넘치는 통합적인 새로운 '새로운 과학정신'을 창조해낸다. <헤르메스> 시대 이후 그는 과학과 철학의 한계를 넘어 미슐레, 졸라, 쥘르, 포크너 등 문학가들의 세계, 푸생, 라투르, 터너, 카르바지오 같은 화가들의 세계를 넘나들고, 80년대에는 인문과학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거치고, 90년대 자연과 새로이 만나면서 독창적이고 풍부한 사유의 결실들을 남기고 있다.
역자서문
미셸 세르, 평화의 철학자
헤르메스의 두가지 특징, 첫째 민첩한 안내자, 둘째 유창한 말솜씨와 뛰어난 해석능력을 지닌 메신저.
메신저 헤르메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와 다르다. 헤르메스의 메시지는 프로메테우스의 그것과는 달리 인간적인 지식과 인간적인 불행을 뛰어넘는 앎에 이르게 한다. 기술과 과학을 통한 생산이 인류에게 이바지하던 프로메테우스의 세상이 지나가고 과학과 지식과 기술을 전하고 나누는 일이 더욱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의 시대, 즉 헤르메스의 시대가 도래했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불행을 이겨내는 참된 지식, 지혜를 구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16)미셸 세르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범람하는 지적 패권주의를 목도하게 된다. 현상학자들, 맑시스트들, 그리고 그 시대에 막 태동하던 정신분석학, 구조주의, 사회학 등의 인문과학자들이 바로 그 주역이었다. 이들의 다툼의 와(17)중에서 미셸 세르는 과학과 철학의 경계 지역에서 중간적 대피 지대를 발견한다. 과학사와 인식론이 그것이다. 고속도로가 아닌 오솔길의 발견. 전쟁의 기억은 그에게 과학적 낙관론을 반성케 했고, 과학과 폭력의 새로운 관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는 철학이라는 하나의 메타 언어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세르는 그 철학적 도구로 대수학적이고 위상기하학적인 수학적 방법들, 양자역학, 생화학 이론 등을 가지고 평화의 지혜를 구하러 나섰다.
(17)세르의 영감의 원천은 17세기 독일 철학자이며 수학자였고 백과사전적인 문화의 소유자였던 라이프니츠였다. 라이프니츠의 영향으로 그는 다원적 인식론을 받아들인다. 많은 과학들 중에 진정한 하나의 과학이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나아가 철학이 그런 과학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부인한다. 모든 과학은 자신의 고유한 인식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순성으로부터 시작해서 복합성으로 나아가는 인식론적 위계질서를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인식론은 창조의 예술이며, 옛 것으로부터 새것으로의 이행의 원동력이다. 새로운 인식론에 바탕을 둔 철학은(18)반복하고 체계화하고, 정당화하기를 멈추고, 새로움을 낳고 역동적으로 미래를 예견해나간다.
(18)미셸 세르는 '새로운 과학정신'을 내세운다. 과학적 문제를 하나의 고립된 장애물과의 영웅적이고 고독한 대결이 아니고 상호 주관적인 공동체와 전체적인 복합성과의 대립으로 보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모델과 구조라는 방법론적 커플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열역학으로부터 나오고, 수학, 물리학, 생화학, 언어학을 넘나드는 정보이론적 사고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는 곧 인식하는 주체가 커뮤니케이션의 방ㅂ해자임을 보여준다. 그 결과 백과사전을 각각의 지식이라는 세포들의 연합으로 만들던 분할이 무너진다. 백과사전은 실은 "하나의 연속체로서 운동들과 교환들의 본거지이고, 그 속에서 방법들과 모델들과 결과들은 모든 곳으로부터 수입되고, 모든 곳으로 수출되면서 유통되는 것이다."
(19)세르의 새로운 정신은 라퐁텐느의 우화와 베를렌느와 말라르메의 시에서 기하학의 정리만큼의 엄정성을 읽어내고, 기하학의 정리와 논증에서 시만큼의 아름다움을 찾는다. 그러니까 시인들에게 물리학자, 생화학자만큼의 이성이 있다는 것과, 그리고 역으로 과학에는 어떤 꿈에서만큼이나 반이성이 있다는 것을 세르는 주장한다.
(19)反 콩트, 反 실증주의
새로운 과학정신은 콩트적이지도 않고 실증주의적이지도 않다. 세르는 단순함으로부터 복잡성으로, 순수로부터 응용으로 나가는 콩트적인 분류의 위계질서화의 노후성을 지적한다. 또한 세르는 실증주의가 과학을 우리의 문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통치'라는 무서운 힘과 공모자가 되게 했다고 비판한다.
(19)非 바슐라르적
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은 단순한 외관 아래에 숨어 있는 복잡한 현실을 읽어내는 정신이다. 그런데 바술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은 과학과 고전 사이의 완전한 단절을 이룬다. 인간의 머리 한쪽에는 깨어 있고 일하는 정신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잠자고 꿈꾸고 몽상하는 물질적 상상력이 있다는 것이다. 과학을 벗어나서는 어떤 이성의 작업, 어떤 가치 있는 윤리도 없다는 이러한 이론은 스콜라적이고 위험하다.
(20)백과사전
우리는 백과사전 또는 지식의 공간이 매끄럽고 잘 정돈되어 있다고 믿어왔으나, 실제의 백과사전은 광대하고, 열려 있고, 복잡하고 끊임없는 상호 간섭이 일어나는 놀이의 장이며, 백과사전 안에서 각각의 과학은 다른 과학들과 수많은 관계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다.
(20)창조
어떤 확실함을 탐구하는 일이나 토대를 만드는 일보다 훨씬 흥미로운 '창조'는 라이프니츠의 '발견의 기술'과 연결된다. 발견의 기술은 서로 다른 정보에 의한 사실 검증에서 새로움이 태어나고, 교차점이 새로운 발견을 낳게 하고, 진보가 교차로부터 나오는 오늘날의 '중재의 기술'이 된다. 우연은 창조의 궁극적인 자원이다. 질서라는 것은 무질서 속의 한 섬인 것을, 합리적인 것이 현실 속의 한 섬이라는 것을 알아야 세르가 말하는 우연적이고 기적적인 창조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20)생산의 기술, 발견의 기술은 모두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이다. 세로는 단자들의 고립과 단자들간의 표현이라는 역설 속에서 처음 커뮤니케이션을 만났다. 단자들은 귀멀고 침투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서로를 듣고 서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나의 신이 필요하고, 그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신의 중재는 그 중 가장 쉬운 해결책이다.
세르의 <헤르메스> 시리즈의 다섯 권의 책들, <의사소통><간섭>,<번역>,<배분>,<북서로 난 통행로>등에는 헤르메스의 중재의 양상들이 그려지고 있다. 그가 말하는 커뮤니케이션은 그러니까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메시지들의 유통이다. 그리고 그 중개자인 헤르메스, 천사들, 세르 등은 과학자들 사이의 중개자. 과학과 문학 사이의 중개자로서 매우 복잡한 현실과 모호하고 난해한 텍스트들과 기호들에 분명함을 가져다 준다. (...)세르는 '헤르메스', '기생자. '양성동체' '아를르켕' '교양 있는 제삼자' 등의 인물들을 창조하여 커뮤니케이션을 성공시키고 있다.
(21)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세르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전통적 추상화의 개혁 가능성을 탐지한다. 플라톤으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철학에서의 추상화 양식은 '존재', '나는 생각한다', '인과관계' '자유' '본질' '실존' '내재성' 등등 동사나 실사를 기본으로 이루어졌다. 이 말은 마치 물신처럼 숭배되는 말들이다. 그런데 이 철학들이 생산하는 담론들은 끝없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늘 똑같은 체계 내에 머무른다. 이런 사물(실사), 작동(동사)에서 출발하는 추상화에 대해 세르는 하나의 관계를 '따라서' 전치사적으로 추상화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그의 추상화 양식은 유동적인 관계를 따라가는 이동에 있다. 그의 추상화는 체계화하는 쪽이라기보다는 관계들의 망을 종합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세르는 칸트식의 주관적 초월성을 대체할 관계들의 총괄성에 도달하려고 한다.
(22) 지식은 서로 나누고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자신으로부터 즐거움의 열매들을 많이 낳는다.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힘들을 무력화시킨다. 걔혁가는 화해자다.
(23)악의 문제
오랜 세월 악의 문제를 다룬 사람들은 그 책임자를 고발하는 일에 몰두해왔다. 때로는 신이, 때로는 악마가, 때로는 남성이, 때로는 여성이, 때로는 정복자가, 때로는 폭군이 악의 근본으로 손가락질 당했고 저주 받아왔다. (..)인구문제 공해, 핵. 실업 등의 새로운 악과 질병과 재해 등의 오랜 악들을 마주한 현자 세르는 고발하고 폭로하고 외과적 방법으로 수술하려 하기보다는, 그 문제들과 공존과 공생과 균형관계를 찾으려고 한다.
첫번째 대담 "
https://en.wikipedia.org/wiki/Michel_Serres
생애 및 경력
바지선 선원의 아들로 태어난 세르는 1949년 프랑스 해군사관학교인 에콜 나발레(École Navale)에 입학했고, 1952년에는 에콜 노르말 수페리외르(École Normale Supérieure)에 입학했다. 그는 철학을 공부한 후 1955년에 입학했다. 그는 1968년 파리 대학에서 박사 학위(Le Système de Leibniz et ses modèles mathématiques)를 받기 전까지 몇 년 동안 해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1969년 파리 I에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세르는 전쟁의 폭력과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나는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시체를 구했다"고 그는 브루노 라투르에게 말했다. [5] 이러한 형성 경험으로 인해 그는 전쟁, 의심 및 비판의 모델에 기반한 학문을 일관되게 피했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세르는 마법을 부리는 강사이자 프랑스어의 음향에 의존하여 사실상 번역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놀랍도록 아름답고 수수께끼 같은 산문의 작가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신화적인 북서 항로, 기생충의 개념,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의 폭발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더 일반적으로, Serres는 과학에 대한 단일 설명이 특권을 부여받고 정확한 것으로 간주되는 메타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과학 철학을 개발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하나의 기록을 권위 있는 것으로 정하기보다는 기록 간의 번역이라는 개념에 의존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Serres는 Hermes(그의 초기 작품에서)와 천사(최근 연구에서)의 인물을 영역 간(즉, 지도 사이)을 앞뒤로 번역(또는 지도)하는 메신저로 의존했습니다.
1990년, 세르는 프랑스에서 가장 저명한 지식인 중 한 명이라는 지위를 인정받아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 회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로버트 포그 해리슨(Robert Pogue Harrison), 조나단 베이트(Jonathan Bate)와 같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6][7]
그의 가장 불후의 저서는 Le contrat naturel (1990)로,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철학의 필요성을 다룬 매우 선견지명이 있는 저작이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와의 인터뷰에서 세르는 21세기의 디지털 맥락을 다루는 새로운 정치 철학의 출현에 관심을 표명했다. [8]
세르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지식, 특히 Wikipedia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9]
2012년에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상을, 2013년에는 댄 데이비드 상을 수상했다.
https://naver.me/5kkAWegO
과학·철학 경계 넘나든 佛 철학자 미셸 세르 별세
입력2019.06.02. 오후 6:48
프랑스 한림원 회원인 철학자 미셸 세르가 6.1일(현지시간)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dpa통신이 보도했다.
세르는 과학과 철학,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보편적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여러 저서에서 기술의 변화를 교육 제도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재고하는 기회로 사용할 것을 제언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지난 2012년 독일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상'을 받기도 했다. 주최 측은 당시 수상자 선정 배경으로 "인간의 사고 구조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이라고 밝혔다.
1930년 프랑스 남서부 아장에서 태어난 세르는 해군사관학교 이공계열에 입학한 뒤 다시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69년 파리 소르본 대학의 과학사 교수로 임용됐으며 1984년부터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스탠퍼드 대학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1990년에는 프랑스 한림원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세르는 5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으며 이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됐다.
주요 저서로는 '헤르메스' 5부작을 비롯해 '기식자' '천사들의 전설' '엄지 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