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광복을 위해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4.19혁명에 참가했다 사망한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양의 편지
4.19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3월 15일에 치러진 부정선거입니다.
3.15 부정선거에 대한 내용은 이미 다뤘던 적이 있지요.
궁금하신 분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https://story.kakao.com/ch/kistory/HZQj0gyyay0
3.15 마산의거 당시 고등학생인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됩니다. 어머니인 권찬주 씨는 한 달 가까이 마산 거리를 돌아다니며 아들을 찾았지요. 자연스럽게 김주열 군의 이름이 마산시민들 사이에서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월 11일, 김주열 군의 시신이 부둣가에서 떠오릅니다. 경찰은 시신을 병원으로 급히 옮기고 이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이미 소문은 마산 전체로 퍼진 상태였습니다. 성난 시민들은 병원으로 쳐들어가 김주열 군의 시신을 확인했지요. 시신은 최루탄이 오른쪽 눈을 관통한 상태였습니다.
참혹한 시신을 본 시민들은 분노하여 시가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이를 2차 마산의거라고 부르지요. 정부의 대응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어 이 사건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종된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서울에서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계획 중이었습니다. 원래 서울 시내 대학생들은 21일에 거사를 벌이기로 합의를 봤지만, 고려대학교가 먼저 선수를 칩니다. 4월 18일에 단독으로 평화시위를 진행하지요.
그러나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는 고려대 학생들을 정치깡패들이 습격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은 다음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지요.
4월 19일 본격적인 시위가 전국적으로 펼쳐집니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에 ‘피의 화요일’이라고도 불리지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실 이 날 시위에 가장 먼저 참여한 것은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입니다. 그 직후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종로로 진출했고, 오전 10시가 되었을 때는 다른 학교의 대학생들이 가세하여 학생시위는 순식간에 10만 명까지 불어났지요.
학생들은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와 이기붕 자택 쪽으로 향합니다. 이에 경찰은 현재의 광화문 위치에서 저지선을 형성, 공포탄과 최루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했지요.
오후 1시 30분이 되자 학생들은 경무대 앞 100m까지 진출합니다. 결국 경찰들은 본격적으로 학생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지요. 이때의 발포로 4.19혁명 최초의 희생자로 알려진 동국대학교의 노희두 열사를 시작으로 많은 사망자가 나옵니다.
정부는 경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는지 오후 3시 긴급히 계엄령을 선포했고, 계엄군은 각 도시에 진입하며 시위는 소강상태에 들어갑니다.
흥미로운 것은 계엄군은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경찰과는 달리 중립을 지키며 시위대와 협상을 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했지요.
이들 계엄군이 경찰들처럼 강경하게 시위를 진압하지 않은 이유는 이승만에 대한 군부 내의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공비 토벌에 적극적인 역할을 맡는 등 준군사조직에 가까웠는데, 이승만이 경찰들만 우대하고, 군대를 홀대했기에 군부는 이승만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한 것이지요.
당시 서울지역 계엄을 담당했던 15사단 조재미 준장은 부대에 아래와 같은 방침을 지시합니다.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하는 것을 금지한다.
-민가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민간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받는 것을 금지한다.
유혈진압을 서슴지 않던 경찰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녁이 깊어가며 시위대는 점차 진압됩니다. 일부 시위대는 경찰로부터 총기를 빼앗고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경찰과 계엄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은 아니었지요. 시위대는 점차 도심지에서 밀려났고, 결국 고려대학교 교정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때 두고두고 회자될 극적인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고려대학교에 뭉쳐있는 시위대를 진압하는 것은 가능했겠지만 경찰과 계엄군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은 확실했습니다. 이때 놀랍게도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단 두 명의 부관만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진입합니다.
그리고 학교 강당에 들어간 후 태극기로 덮인 수많은 희생자들의 시신들 앞에서 정중한 태도로 조의를 표했지요. 당혹감과 착잡함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시위대는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 무기를 버리고 해산합니다.
이렇게 1960년 4월 19일은 지나갔습니다. 이날 서울에서의 사망자 수는 경찰 3명을 포함해 104명이었지요. 부산의 경우는 13명 사망, 광주는 6명 사망, 그 외의 지역에는 경찰의 발포가 없었기에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위대가 진압되었기에 이승만과 자유당 입장에서는 일단 급한 불은 껐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지만 말 그대로 급한 불만 껐을 뿐, 혁명의 열기는 여전했습니다. 4월 19일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5분 한국사 이야기
https://story.kakao.com/ch/kistory/app
첫댓글 잠시회상해봤네요.여중생이?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경남도립병원인 마산병원에서 김주열군의 시선을 보았습니다.
최루탄이 오른쪽 눈을 관통된 상태로 공개되었지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메어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