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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도호를 납치한 일본의 적군파
△ 일본 적군파 요원 9명은 1970년 3월31일 도쿄 하네다 공항발 후쿠오카행 일본 항공기 ‘요도호’를 공중 납치해 승객과 승무원 129명을 인질로 삼아 북한행을 요구한 일본 최초의 비행기 납치 사건을 저질렀다 (출처=한국일보) 안녕하세요. 제10기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유니콘 이윤태입니다. 1970년 3월 30일, 하네다 공항을 출발한 일본항공 351편 요도호가 공중 납치당합니다. 범인들은 바로 타미야 타카마로를 위시한 9명의 일본 적군파 조직 (1960~1970년대 일본의 극좌 조직을 통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미 비행기 납치 전 경찰서를 습격한 전력이 있던 이들 극좌조직원들은 궁지에 몰려있던 상태였죠. 요도호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등 129명이 타고 있었는데, 적군파는 일본도와 권총, 폭탄 등의 무기로 승객들을 위협해 밧줄로 포박한 뒤, 기장을 위협해 비행기의 도착지를 바꿀 것을 협박했습니다. 그들이 요청한 새로운 도착지는 충격적이게도 북한의 수도, 평양이었습니다.
이 요구에 기장은 북한까지 갈 수 있을 만큼 연료가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비행기가 국내선이라 북한까지 갈 연료가 없다며 범인들을 거짓말로 설득했습니다. 범인들의 허락을 얻은 기장은 연료 보충을 목적으로 오전 8시 58분 경 이타즈케 공항에 기장은 비행기를 주기시킵니다. 일본 당국은 즉각 경찰과 자위대를 보내 활주로를 막았지만 이는 오히려 범인들을 더욱 자극시키기만 했습니다. 기장은 극한 상황 속에서 범인들을 다시 설득하여 여성, 노인, 아동 등 인질 23명을 풀어주게 하는데 성공했고 비행기는 다시 평양으로 떠나게 됩니다.
한국정부의 임기응변
한반도에 진입한 이후 요도호는 38도 선을 넘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형성된 남북한의 경계선인 휴전선은 일직선인 38도선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비행기는 한국의 영공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38도 선을 넘자 북한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기장은 영어로 “여기는JAL351편”이라 신호를 보냅니다.
원래대로라면 여전히 비행기가 한국 영공에 있는 만큼 북한 측으로부터 수신이 들어올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 같게도 “여기는 평양 진입 관제”라는 수신이 비행기에 들어옵니다. 기장은 수신의 지시대로 비행기를 남쪽으로 회항하였는데 이것은 범인들을 속이기 위해 한국 측에서 속임수를 쓴 것이었습니다.
△ 김포국제공항에서 주기중인 요도호를 감시하고 있는 한국군 (출처=문화일보) 북한으로 망명을 하면서도 정작 한국어조차 제대로 몰랐던 범인들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고 3월 31일 요도호는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비상 착륙합니다. 추후 자신들이 평양에 온 것이 아님을 확인한 범인들은 다시 승무원과 승객을 인질로 잡고 북한으로의 안전 비행 보장을 요구합니다.
한국 측은 범인들과 영어로 교섭을 시도했으나 범인 그룹은 영어조차 잘 몰랐기에 대화가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한국 측은 일본어로 교섭을 재개했고 범인들은 여전히 평양으로 즉시 떠나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측이 멈춘 비행기 엔진을 재가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보조시동기를 보급하는 것을 거절하며 상황은 교착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완강했던 범인들은 결국 교섭에 임했고 식사를 제공받았습니다. 3월 31일 특별기로 야마무라 신지로 당시 일본 운수성 정무차관이 서울에 도착했고 그를 인질로 잡는 대신 범인들은 탑승객 전원을 석방한 뒤 4월 3일 비행기를 몰아 마침내 북한 미림 비행장에 도착합니다.
평양에 도착한 이들
오후 7시경 비행기는 북한의 평양 순안 국제공항에 착륙합니다. 북한 측의 무장해제 요구를 받아들인 이들은 무기를 반납하고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우습게도 이 무기들은 모두 장난감이었죠. 북한은 인도주의적 차원에 따라 범인들을 제외한 승무원과 기체는 송환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요도호 도착 이후에는 말을 뒤집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측의 강한 반발에 직면한 북한은 결국 범인들을 제외한 인질들과 기체를 일본으로 돌려보냅니다.
북한에 남은 적군파들의 삶
△ 1970년 3월 30일 욛호를 공중 납치한 적군파 조직원들의 사진들 (출처=연합뉴스) 극좌사상에 경도돼 있던 이들 일본 적군파들이 북한을 찾았던 이유는 '일본 혁명'을 위한 배후지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일성이 북한을 전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한 ‘민주기지’로 천명한 ‘민주기지론’을 주장한 것과 유사하게 이들은 북한을 일본에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전진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뭇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 이 일본 적군파들은 북한 정권으로부터 나름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비행기 납치를 주도했던 타미야 타카마로는 이후 북한 정권의 일본인 납북 계획에 협조하면서 살았고, 1995년 11월 30일 평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2014년 기준 비행기를 납치한 적군파 9명 중 현재 4명이 북한 평양에 살고 있습니다. 트위터를 개설하기까지 한 이들은 “일본에 돌아가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 “일본이라는 국가와 민족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는 글을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 요도호 납치 사건 일지 (출처=조선일보) 이런 적군파들 중 한명인 고니시 다카히로는 비행기 납치 전부터 사귀던 일본 여성을 평양으로 불러 결혼해 자녀 2명을 두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납치범들은 납북, 초청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비록 북한에 살면서도 일본 여성과 결혼했는데요. 그들의 자녀들 대부분은 일본으로 귀국해 일본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비행기 납치를 하던 당시 16세였던 시바타 야스히로는 1980년대까지도 혁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일본에 밀입국해 공작 활동을 하다가 체포했습니다. 자신의 직업이 혁명가이고 혁명을 위해 자금과 동지규합을 목적으로 일본에 입국했다고 일본 경찰에게 진술한 그는 5년 형을 살고 출옥한 뒤 가족과 연락을 끊고 외롭게 살다가 2011년 병사했습니다. 죽기 전 그는 “내 사상의 잘못을 알았다.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인생이 바뀌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일본 경찰은 북한에 거주하는 요도호 납치범들을 결혼 목적 유괴 등 일본인 납북 혐의로 국제 수배 하고 있습니다. 평양의 일본인 마을에 집단 거주하는 요도호 납치범들은 북한 정권의 지원으로 북한 주민 기준으로 봤을 때는 풍족한 삶을 살고 있지만, 북한에서 사망한 3명의 납치범들은 탈북을 시도했다가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상황입니다. 북한은 자녀들은 몰라도 납치범 본인들의 귀국을 허용하고 있지는 않으며 납치범들이 일본인 납북과 관련 있다는 혐의 또한 부정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트위터 개설 허용도 납치 문제에 대한 일본의 반감을 줄이기 위한 북한의 전략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여전히 납치범들은 트위터에 일본인 납치와 자신들은 전혀 관련이 없다는 내용을 올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 요도호 사건은 돈키호테다운 발상을 했던 일본인들과 남북한의 분단체제가 빚어낸 다소 엉뚱하면서도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제10기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유니콘 이윤태였습니다.
김호준 기자
이번에 방일한 더부러공산당 핵심 맴버 몇마리는 일본 내 극좌파 인물들을 만났다 그 세력이 바로 혁명적공산주의라는 일명 "적군파"(테러단체) 들이다 이제 저들이 누구인지 그래도 모르겠는가 ? |
첫댓글 이게 예수님 진리랑 0.1%의 연관성이 있는건가?
당연히 잇쥐 있지 --
나라안에 빨갱이섹퀴들이 있는한 기독교가 제일 타격이 심하거등 '
당연히 관계 있지 않나요.
선열의 피를 뿌려 지킨 자유가 님에게는 그다지 소중함을 인식되지 못하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