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시골 우리 동네에 해방후 늦게 일본에서 나온 가족이 한 가구 있었다.
제일 큰 아들은 악간 모자라는 사람으로 이름은 겐찌였다.
아이들은 마음시 좋은 큰 형님벌인 그를 자주 놀려 먹기도 하였다.
그 아래 동생은 사내 아이로 정상아로 우리 보다는 예닐곱살 위였다. 이름은 영출이었다.
그 밑에 여동생이 둘 있었는데 언니가 하루꼬였고 동생은 히로꼬였다. 히로꼬는 우리보다 한 살 위였는데 힘도 세고 생긴 것도 남자 같이 생겨서 겐찌를 놀리거나 하면 달려와 두들겨 패기도 하였다.
일제때는 강제로 창씨 개명도 하였지만 해방되고 나서도 왜 아이들 이름을 일본식 이름 그대로 썼는지 모르겠다.
집은 동네 가운데 있었지만 들어가는 입구가 좁고 길어서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무언가 베일 속에 숨어 있는 듯 의구심을 자아냈으나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마산으로 내려왔고 우리집도 고향을 등지고 마산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나오기 전에는 동네 바깥에 있는 디젤발동기로 돌리는 방앗간에서 보리며 나락을 찧었다.
정미소가 들어오기 전인 6.25사변전에는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었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농촌에서는 식구대로 농삿일을 해야 했으므로 아들이 있으면 일찍 장가를 보내야 일꾼 하나를 더 데려오는 격이었다.
디딜방아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는 것으로 한쪽에는 방아 머리로 곡식을 빻는 돌로된 구덕이 있고 반대쪽에는 사람 둘이 올라서서 누르는 발판이 있다. 천장에 끈을 매달아 그 끈을 잡고 발판에 올라서면 방아 머리가 올라가고 발판에서 내리면 중력으로 떨어지면서 돌 구덕에 있는 곡식을 빻게 되었다. 나락은 껍질이 잘 벗겨지지만 보리는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아 여러번 반복해서 방아를 찧어야 했고, 물을 조금씩 퍼 부어 가면서 찧어야 했다. 식구가 많은 집에서는 밥해 먹고 나면 다시 금세 방아를 찧어야 하므로 방아 찧는 일이 일상이었다.
'고시하까리'란 벼 품종 이름이다. 한자로는 월광(越光)으로 표시되는 일본에서 개량된 품종으로 우리는 로얄티를 주고 들여와서 재배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키바레(秋晴)는 맑은 가을이라는 뜻으로 우리에게는 아끼바리로 더 익숙한 밥맛 좋은 쌀의 대명사였다. 이 품종은 1962년 일본에서 탄생해 1969년에 국내에 도입된 뒤 수도권과 중부지방에서 주로 재배되며 토착화했다고 한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소철이 많아 나는 '통일벼'가 반짝 등장한 적이 있었다. 그 쌀로 밥을 해 놓으면 찰기가 없어 밥알이 펄펄 날아갈 듯하고 맛이 없어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 집에 살이 떨어져 코스트코에 가서 쌀을 사왔다. 그전까지는 익산정미소에서 포장된 청결미를 샀는데 밥맛이 마치 통일벼 같아서 이번에 값을 조금 더 주고 '고시히까리'로 바꿨다.
배 탈 때 미국에서 쌀을 사서 밥을 하면 밥알에 윤기가 돌면서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다. 밥맛도 아주 좋았다. 칼로스(Calrose) 쌀이었는데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재배된 찰기가 있고, 윤기 나는 자포니카 계열의 쌀 품종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쌀밥을 잘 먹지 않으므로 일본계의 농장주가 일본이나 한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농사를 대량으로 짓는다고 들었다. 중국이나 동남 아시아에서도 밥을 찰기가 없는 알랑미쌀로 밥을 짓는다. 그리고 밥고 오른손 세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