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생애 통산 네 번째 독집 신보를 발표하고 호응이 좋을 뿐 아니라, 그의 사기를 올려 주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 봐요. 지난 12월21일, 22일 코엑스 컨벤션센터에서 연말 공연을 가졌잖아요. 티켓 판매된 걸 보니 10代가 10%, 20代가 30%나 됐어요. 50代가 16%고 나머지가 30~40代였어요. 세대가 폭넓잖아요. 공연장이 여러 세대가 함께 관람하기에는 그리 좋은 곳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내 공연에 어린애들, 젊은 친구들이 많이 와요.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그는 씩 웃으며, 『그러니까 전인권이지』라고 했다.
가수가 조금만 나이 들어도 활동에 제약을 받는 우리의 가요계 풍토를 감안하면 전인권 같은 노장의 건재는 보는 것만 해도 즐겁다.
『정말 반응이 대단했어요. 무대에 나와서 「안녕하세요!」하는 인사에 객석이 요동을 치는 거야. 그리고 MBC 텔레비전 「사과나무」란 프로그램 알아요? 거기서 2004년 출연자 가운데 가장 보고 싶은 인물로 시청자들이 나를 뽑았어요』
독자들에게 신년 인사를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는 미리 준비해 온 것처럼 전혀 뜸을 들이지 않고 술술 말을 이어나갔다.
『음악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될 때」예요. 이렇게 힘들고 지치고 자신감이 없을 때는 음악으로 충전해야 돼요. 전 요새 매일 서너 시간씩 음악연습을 하면서 사는 즐거움을 늘리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음악을 들어라!」고 해요. 올해를 음악의 해로 잡았으면 합니다』


전인권은 외모부터 독특하다. 감지 않은 듯 무질서하게 뻗친 「폭탄」머리, 검은색 선글라스, 검은색 티셔츠에 역시 검은색 재킷 그리고 별로 깨끗해 보이지 않는 청바지…. 이 날은 바지마저 검은색이었다.
옛날 같으면 지저분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머리가 이제는 특징적인 헤어스타일로 시선을 끈다.
『열일곱 살부터 머리를 길렀어요. 제가 멋을 굉장히 부렸거든요. 장발에 흰 티셔츠에 청바지 스타일을 그때 벌써 굳혔죠. 머리를 기르니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한번은 대마초 피우며 거울을 봤는데 내가 봐도 괜찮았어요. 요즘엔 색깔만 검은색으로 바뀐 거지, 기본 컨셉트는 같아요』
갑자기 그의 입에서 대마초란 말이 튀어나와서 내가 움찔했다.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 넘겼다. 그는 자신의 외모가 마구잡이 또는 게으름의 소산이 아니라 「하나의 메시지」라고 우겼다.
『어릴 적 평화·사랑·자유 같은 히피 문화에 매료됐어요. 장발을 비롯한 지금의 모습은 거기에서 비롯된 거예요. 평화·사랑·자유는 제 삶의 목표예요. 남 보기에도 자유분방해 보이고, 나부터가 편합니다. 편하면 됐지,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어요』
「그래도 가끔 변화를 줘야지, 마냥 그 스타일로 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더니 목소리가 조금 올라간다.
『바꾸라고요? 왜 바꿔요? 어느 자리에서나 어울리고, KBS 방송국 수위도 나를 알아보는데 바꿀 이유가 없지. 그리고 차림을 자주 바꾸면서 겉모습에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외모에 신경 쓰는 것보다는 내 할 일을 하는 게 중요해. 혹시 몰라, 나중에는 바꿀지. (갑자기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올려 이마를 드러내 보이며) 내가 이마가 괜찮거든. 나이가 들면 올백으로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은 있죠』
전인권은 언제나 당당하다. 자유인 전인권의 破天荒的(파천황적)인 언행을 이제 사람들은 『전인권이니까』라며 받아들인다. 이날따라 그는 더 여유만만해 보였다. 그가 홍보 활동을 하고 있는 4집 새 앨범은 순항 중이다.
「들국화」 시절을 빼고 개인 4집이 되는 이번 앨범은 「전인권과 안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지난해 12월에 출시되었다. 「안 싸우는 사람들」은 그의 백업 밴드 이름이기도 하다.
전인권은 이번 새 앨범을 포함, 지난 16년 동안 단 4개의 앨범을 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랑한 후에」, 「돌고 돌고 돌고」가 수록된 첫 솔로 앨범이 1988년에 나왔고, 이듬해에 2집 「지금까지 또 이제부터」를 발표했다. 그러다가 14년의 오랜 공백을 깨고 2003년에 「데스트니(운명)」이라는 제목의 앨범을 선보였다.
이번 앨범은 「전인권다움」을 되찾았다.
3집 이후 1년 8개월 만의 신작인 전인권 4집은 3집 때와는 다르다. 세 번째 앨범 때는 왠지 모르게 활기가 떨어져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터뷰에 응하는 자세에서 말해 주듯 아주 생생하고 당당하다.

『그때 앨범은 아주 우울했어요. 앨범을 내기 전 3년 동안 무척 슬펐거든요. 아내와 이혼하고, 많은 사람들과 헤어지고…. 약물을 비롯해 사적인 문제로 처진 날들이 많았지요. 앨범은 그것들을 극복하는 게 됐어야 했는데 여전히 슬퍼 있었던 거죠. 그런데 사람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게 뭡니까? 강하고 낙천적이고, 방송작가 송지나씨 말대로 끝까지 우기는 거 아닙니까? 그런 게 없으니 재미 없었고 성에 차지도 못했죠』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았다는 얘기다. 낙천적이고 강하고 세상에 맞서 우겨대는 지극히 전인권다운 면모가 살아 있다.
노랫말을 보자. 첫 곡인 「사랑하세요 그대」는 전인권式의 여유, 직립과 상승의 사고가 밴드의 코러스와 맞물려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하늘에는 높이 새들이/ 들판 위를 달리는 말들/ 바다에는 힘찬 파도가/ 우리에겐 아아 가슴이/ 사랑하세요 그대/ 사랑하세요 그대/ 사랑해 사랑하세요/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함께 달려가요/ 사랑해 사랑해〉
특유의 외침이 더욱 강해졌다. 특히 블루스 록 스타일인 「기다려 너!」에선 전인권의 외침은 단순히 외치는 수준을 넘어 「미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만큼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3집의 정돈된 아우성과는 급이 다르며 「들국화」 시절의 명곡인 「그것만이 내 세상」이나 「행진」과 비교해서도 마구 부르는, 막가는 듯 들린다.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전인권 보컬 미학의 절정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한계를 벗어난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그것도 많이 참은 보컬』이라고 했다.
『그걸 「막 불렀다」고 한다면 잘못 들은 거예요. 그거 정말 절제하며 노래한 겁니다. 절제감이야말로 이번 앨범에서 내 노래의 핵심이죠. 절제하면서 흥을 낸 거니까, 다시 말해서 절제하면서 「최고의 지랄」을 한 거지. 사실 절제하지 않으면 단순히 지랄일 뿐이고, 들을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노래하는 사람이 참지 않으면 듣기 괴로운 거죠. 사실 녹음할 때는 더 난리였어요. 내가 들어도 소름이 돋더라구. 밴드 멤버들도 너무 심하다고 해서 앨범에 담긴 노래는 다시 부른 거예요. 전체적으로는 내 소리에 대해 조금의 이의를 갖지 않고 불렀어요. 「기다려 너!」도 억지로 질러댄 게 아니라 한국의 소리이고 트인 소리예요』


새 앨범에서 그는 우리 정서만의 멋과 풍자를 지향하고 있다. 전인권의 음악적 귀착점은 바로 우리 가락에 기초한 우리 문법의 록을 구현하는 것이다.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그 절규에는 어딘가 모를 우리의 한이 서려 있다. 사실 진한 넋두리인 「늦지 않았습니다」 같은 곡은 창에 가깝다.
『저도 음악 오래 하면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우리 음악의 매력은 우리만이 지니고 있는 멋과 풍자가 살아 있을 때 나옵니다. 천안삼거리 다음의 「흥~」을 봐요. 短歌(단가)에서도 그렇고… 그럼 나와 같은 로커는 뭐냐, 잘 아시겠지만 록(Rock)이라는 게 블루스에서 발전해 왔잖아요. 블루스 기타를 들어보면 다섯 음계 내에서 움직이는 게 전체적으로 우리의 창과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결국 록의 매력은 우리 가락, 즉 민요와 연관이 있는 거죠. 천안삼거리 다음의 「흥~」이나 존 레논의 명곡 「이매진(Imagine)」에서 「유 메이 세이 아임 어 빌리버」 하기 전에 「아하」 하는 대목이나 같아요. 하지만 지금 우리 주변의 록을 봐요. 전부 서구 것을 그대로 하고 있어요. 창조하는 게 아니라 베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것을 살린 록이 없죠. 제대로 하려면 우리의 흥을 알아야 하고, 또 블루스를 이해해야 됩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너무 외국음악의 겉멋에만 빠지지 말고 속을 익혀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록이 나올 수 있다』고 주문했다. 4집 앨범을 만들기 전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풍미한 영국의 록 가수 폴 로저스의 음악에 푹 빠져 살았다.
그룹 「프리(Free)」, 「배드 컴퍼니(Bad Company)」 등에서 활약한 가수 폴 로저스를 그는 『세계에서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라고 했다. 『그(폴 로저스)로부터 진정한 블루스를 배웠다』며 새 앨범에 수록된 곡 「그러나… 안 싸우는 사람들」은 「프리」 시절에 폴 로저스가 발표한 곡 「위싱 웰(Wishing Well)」을 번안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4집에는 존 레논의 「이매진」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사람」이란 곡이 실려 있다. 전인권은 이 곡을 얘기하면서 너무도 신나는 표정이었다. 존 레논은 전인권의 우상이다. 「들국화」 시절의 히트곡 「행진」도 존 레논의 창법을 흉내 낸 것이라고 한다.
『주변에서는 「이매진」에 우리 가사를 붙인다니까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데요. 워낙 명곡이라 해봤자 손해라는 거죠. 하지만 난 하고 싶었어요. 멜로디가 특수하고, 존 레논의 노래는 카리스마가 넘쳐서 모든 감정이 다 느껴져요. 나도 그만하면 잘 해석했죠? 존 레논의 「이매진」하고 전인권의 「사람」을 들으면 하루가 기분 좋아져요』
그는 『음악생활에서 요즘처럼 음악이 좋은 적이 없다. 사람들에게 음악을 전도하고 싶은 기분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후배들을 향한 충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요즘 젊은 음악인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히트 생각하지 말고 그 시간에 음악이나 들으라고요. 그 애들이 음악의 감동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1980년대 록그룹 「들국화」로 유명해졌지만, 그는 이전인 1979년에 포크 듀엣인 「따로 또 같이」의 멤버로 정식 데뷔했다. 음악 인생이 25년을 넘어간다. 그는 음악 얘기만 나오면, 그 수더분한 표정과 달리 시선과 말이 날카로워졌다.
『제가 옛날부터 클럽 음악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클럽활동은 한마디로 라이브이고 훈련이에요. 「들국화」 시절 4년 동안 클럽을 전전하며 연주하고 노래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히트가 났어요. 지금 가수들은 그렇지 않아요. 만들어 준 음악을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가수에 대한 신비감이나 두근거림이 있을 수 없죠. 요즘 가수들은 훔쳐보는 재미가 사라져 버렸어요.
세월이 흐르면 사람의 마음이 달라지고 그래서 음악도 달라지는 것이지만 그래도 기본은 한결같아야죠. 자세부터 기본으로 가야 합니다. 우린 음악을 하더라도 치열했어요. 세포가 움직이는 기분으로 곡을 썼죠. 요즘은 그런 음악이 없어요. 그러니까 전부 이등병·일등병 노래지. 근래 장교급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고 들어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미국화·서구화되어 있다는 거죠. 서구의 것만 흉내 내다가 다 망했어요. 본래의 헝그리 정신도 사라지고…. 영리해져야죠. 뭘 취하고 뭘 버려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봐야 하고, 모르면 연구를 해야지요』
「요즈음 TV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어떤가? 음악은 괜찮은 건가」라고 물었다.
『사정은 같아요. 요즘의 대세인 R&B 발라드를 봐요. 창법만 해도 필요 없이 너무 많은 멋이 들어갑니다. 흑인 가수의 창법을 그대로 본뜨다 보니 테크닉만 강조되는 거죠. 그러니까 「자우림」의 록보다 사랑을 못 받는 거예요. 물론 얼마 전 「바이브」란 그룹의 노래를 들었는데 꽤 잘합디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지겨워요. 유행의 끝은 지겨움이죠』


얘기를 하다가 그는 수시로 바깥을 들락날락했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였다. 담배를 끈 즉시 『아이 추워』를 연발하며 바로 들어왔다. 그는 몇 개월 전 과로 때문에 「대상포진」(몸에 띠 모양으로 수포가 생기는 병-편집자 注)을 앓았다고 한다. 대상포진은 나았지만 몸이 쉬 피곤해진다고 했다.
『의사가 영양제를 처방하면서 무조건 쉬는 게 필요하다고 했어요. 나이도 있고, 사실 내 몸이 좋을 리 없죠. 일반인들보다 피곤하게 살았잖아요. 가수로서도 그렇고…. 지금도 같이 먹고 살아가야 할 주변 사람들이 많으니 고삐를 늦출 수 없죠. 멤버와 매니저를 포함해 14명입니다. 쉬어야 하지만 별로 쉴 시간이 나오지 않아요』
그가 冒頭(모두)에 자랑했듯이 전인권은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그는 자신이 『1020 가수(10代와 20代에 인기가 있다는 뜻-편집자 注)』라며 웃었다.
「도대체 10代·20代들이 전인권에게서 무얼 발견한 걸까요」 물었더니 그는 『그건 임진모씨가 얘기해야 하는 것 아냐? 내 입으로 하려니까 이상하잖아』하면서 나름의 분석을 내놓았다.
『얼마 전 연세大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면서 그런 말을 했죠. 「소속감」 말이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해하다가 나중에는 무지 좋아하더라구. 제가 디지털 위성방송 「스카이 라이프」 광고를 한 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아요. 거기서 강하게 어필이 되었고, 「저 사람하고 놀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나 봐요. 사람들은 뭔가에 소속되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 그러다가 「인권이 라이프!」 하는 광고를 보고 「그래 저놈하고 놀면 재미있겠다」 하고 마음을 정한 거지』
그것하고 10代·20代가 괴상하게 생긴 전인권의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게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10代와 20代 들이 저더러 멋있다고 해요. 대놓고 그렇기도 하지만 TV 녹화현장에 가면 방청객들이 뒤에서 「야, 특이하다. 나도 저렇게 해볼까?」하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요. 색다른 것을 구경한 거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니까. 나이 든 사람들도 젊은 세대에게 보여 줄 게 있는 겁니다』

그는 2003년 봄 고려大 축제에서 젊은 가수들과 한무대에 섰다. 「리듬 앤 블루스」와 힙합에 물든 대학생 관객들에게 그의 음악은, 「위험한」 어떤 것이었다.
축제 기획팀은 전인권이 누군지 모르는 대학생들로부터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 가슴을 졸였다고 한다. 그가 무대에 서자 객석에서 기가 차다는 수군거림이 돌았다.
『저 사람 누구야? 너무 구리잖아!』
전인권이 노래를 시작하자 객석의 반응이 달라졌다. 학생들은 그동안 방송에서 전혀 듣지 못한 전인권의 통렬한 獅子吼(사자후)를 접하고 넋을 잃었다. 특유의 바이브레이션, 솟구치는 음색, 가슴을 찢는 듯한 포효를 들으며 웅성거림은 감탄으로 바뀌었다.
『와! 정말 대단하다!』
전인권은 다음해 학생들의 요청으로 고려大 축제 무대에 다시 섰다.
전인권은 그래서 말한다.
『「7080 콘서트」 붐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젊은 세대와 끈을 이어야 해요. 1970년대, 1980년대에 그 음악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추억만 팔려고 하지 말고 부지런히 청년 관객들과 만나야 합니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히트곡을 다시 되살리는 「7080 콘서트」 유행을 걱정했다. 신곡 하나 없이 저 옛날의 올드 레퍼토리만 소비하는 방식을 가지고 얼마나 버티겠느냐는 거다. 관객들이 젊었을 때 즐겨 들었던 곡만을 요구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수 자체가 새로운 음악을 내놓지 못한 채 추억팔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그는 『노장들이 고집스럽게 새 앨범을 내야 한다』고 한다.
『앞을 봐야지 뒤만 돌아봐서 되겠습니까?』
전인권이 허성욱, 최성원 그리고 조덕환과 함께 「들국화」를 결성해 첫 앨범을 낸 때가 1985년이다. 全斗煥 정부의 억압이 가슴을 옥죄이던 시절, 음악은 트로트와 건전가요가 主流를 형성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포효하는 전인권의 노래는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신문과 방송은 「들국화」를 「언더 그라운드」라고 불렀고, 앨범을 낸 동아기획은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메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다.
「들국화」는 명맥이 끊어졌던 「밴드」라는 록 음악의 뼈대를 재건했다. 「들국화」는 「한국의 비틀스」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서구 록 밴드의 앨범만을 「眞本(진본)」으로 여겼던 한국의 록 팬들도 「들국화」 앨범만은 인정했다.
음악 팬들은 「들국화」를 통해 한국의 록이 결코 서구의 록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자기 음악을 자기가 만들어 연주하고 부른다」는 작가정신이 1980년대 한국 음반계에 자리 잡은 것은 전적으로 「들국화」의 功이다.
「들국화」는 1986년 2집 앨범을 내고 이듬해 별안간 해체를 선언했다. 활동기간은 짧았지만 「들국화」의 충격은 강렬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팬들은 그때의 기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들국화」의 핵심은 전인권이었다.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매일 그대와」, 「내가 찾는 아이」, 「너는」 등의 노래를 잊지 못하는 것은, 시대의 울분을 씻어 내는 그의 후련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어찌해서 「들국화」가 그 시대를 관통할 수 있었을까? 전인권의 해석은 이렇다.


『전인권의 소리가 당시 세대들의 고통을 대변해 주었다고 봐요. 내 소리를 통해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거죠. 사실 「들국화」의 가사는 세상을 포용하려는 측면이 강했어요. 하지만 그 소리는 달랐죠. 시대의 비명 같은 것이었다고 할까요.
사람들은 정치적 억압 속에 공포를 오랫동안 느낀 거죠. 그런 상황에서 전인권 노래를 듣고 「저런 소리도 있구나!」 놀란 거죠. 아까 말한 요즘 아이들의 느낌과 다르진 않아요. 그리고 한편으로 「저렇게 내질러도 되는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낀 것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들 의식 저변에 위치한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죠』
「낭만주의」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용어다. 그 상징으로 대뜸 그는 「이대 앞」을 들었다.
『이대 앞에 다방이 있었잖아요. 한번 거기를 갔더니 이대생들이 스피커에서 나오는 카펜터스의 「탑 오브 더 월드」에 맞춰 볼펜을 두드리며 따라 부르는 거예요. 얼마나 멋집니까. 특히 나같이 공부를 싫어한 애들한테 공부 잘하는 이대생들은 동경의 대상이었죠. 「이대 앞」이란 말만 들어도 설레요. 지금도 그래요. 「왠지 우리 이대 앞!」인 거지. 신세대들은 너무 그런 게 없어요. 마음을 설레게 하는 대상이 없는 겁니다』

1990년대 말 「들국화」는 오리지널 멤버들이 다시 모여 일시적으로 컴백했다. 후배들은 그들에게 바치는 헌정 앨범을 만들었다. 하지만 전인권은 옛 동료들과 함께 오래 움직이기 어려웠다.
그는 이 시기를 포함해 「들국화」 시절의 노래 가운데 어떤 음악을 가장 좋아하는 걸까? 예상을 깨고 그는 걸작으로 기억되는 1집 곡들을 빼고 2집의 「너는」을 첫손에 꼽았다.
『「들국화」의 1집은 사랑스럽죠. 「들국화」와 저를 오늘날 있게 한 작품이니까요. 내가 곡을 쓴 「행진」은 쓸 때부터 사람들이 좋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을 겁니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만족스럽지는 않아요. 솔로로 발표한 첫 앨범의 노래들, 「사랑한 후에」, 「돌고 돌고 돌고」가 더 만족스러워요. 이번 앨범에도 「사랑한 후에」를 다시 불렀죠』
행복한 순간이 그때였다면 그럼 삶에서 가장 괴로웠던 때는 언제였을까? 그의 대답은 속사포였다.
『대마초 사건으로 날 잡아갔던 놈들에게서 치사한 방식으로 취조를 당했을 때였죠. 1987년 9월이었어요. (목소리가 커지면서) 그건 사람대접이 아니야. 그래서 네 번째 잡혀갔을 때는 참을 수 없어서 그들에게 항변했습니다. 「대체 너희가 뭐기에 날 잡아가느냐? 인생이 망가지더라도 내가 나를 망치는 것 아닌가. 국가가 개인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거냐?」고 말이죠』
전인권의 인생에서 대마초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체포 구금의 물리적 시련을 넘어 그 사건은 전인권의 가슴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았다.
『하도 잡아가니까 나중에는 음악적으로도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음악하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는구나, 후회하기도 했죠』
최근 들어 대마초 흡연 합법화에 대해 논쟁이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많은 국가들이 대마초 흡연을 불법으로 처벌하고 있고, 한국 내에서도 대마초는 여전히 민감한 문제다. 그는 조금의 거리낌이 없이 대마초를 합법화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우리나라 온 국민이 대마초를 피우더라도 처벌하면 안 돼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왜라는 질문이 이상하지. 반성처럼 즐거운 것은 없잖아요. 대마초를 피우면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싸움하는 것이 싫어져요. 내가 어렸을 때 대단히 폭력적이었어요. 욱하면 주먹부터 나갔어요. 대마초 흡연 이후 나는 싸움과 완전 작별한 거죠. 내 밴드 이름이 뭡니까? 「전인권과 안 싸우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리고 (대마초를 피우면) 삶이 흥미로워져요. 어차피 누구나 하루를 보내게 되는데 대마초는 하루를 진짜 재미있게 만들어 준답니다』


그는 『「마약쟁이」라는 불명예가 나한테 그치지 않고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되었다는 점이 더 분하다』고 말했다. 지금 스물두 살인 딸과 열세 살인 아들이 어렸을 적에 마약쟁이의 아들딸이라는 주변의 가혹한 눈초리에 고생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다소 어눌했던 그는 이 순간 말이 아주 명료해졌다.
『그래서 난 죽을 때까지 아이들의 명예를 찾아 주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고통받은 우리 아이들을 위해 끝까지 뛸 거예요. 우리 딸아들은 아버지를 너무 사랑해요. 애들에게 「아버지를 믿느냐」고 물으면 가슴 시원해질 정도로 믿는다고 말합니다. 전 꼭 승리할 겁니다. 패자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그러기 위해 끝까지 꼬장을 부리며 살 겁니다』
―꼬장을 부린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내가 누구랑 만나서도 「아, 네」 하며 격식을 차리며 폼 나게 얘기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털털하게 막 얘기하고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꼬장을 부린다는 거지. 그런다고 사실 딴 사람들이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 없죠. 난 고등학교 1학년 때 중퇴했어요. 출신이 그러니 사회적으로도 꼬장을 부려야 했고, 성격적으로 원래 꼬장을 좋아했어요』
이 대목에서 그가 털어놓은 자신의 성격이다.
『어렸을 때 형한테 허구한 날 놀기만 한다고 10년 동안 매 맞으면서도 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어요. 맞는 것은 잠깐이고 일단은 놀자 이거죠. 형한테 맞는 것은 나중 일이니까 그전에는 마음껏 놀자는 거였죠. 저는 미래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전인권은 아버지가 되어 자식을 때리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딸은 세 번, 아들은 두 번 매를 댔다고 한다.
『초등학생 때 아들의 일기를 보니까 이렇게 썼더라고요. 「나는 일기를 쓰는 게 싫다. 그러나 오늘도 난 일기를 써야만 한다. 왜냐하면 숙제이기 때문에!」라고요. 난 일기는 하루에 한 일을 쓰는 거라면서 대화를 시작했죠. 때렸더니 아들이 나한테 꼭 안기데요. 일기를 그렇게 쓰면서 자기도 내심 불안했던 거죠』
그러면서 그는 아들 세대의 의식이 정체돼 있다고 걱정했다.
『아이들도 우리 어른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감각적으로 세밀하지만 멀리는 못 보는 게 다를 뿐이에요. 공포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같습니다. 생각 밖으로 약하죠. 그래서 젊은 세대가 저의 야성스러움을 좋아하는가 봐요. 야성적인 한편으로 또한 보호자의 모습을 느낀다고들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인권이 라이프」는 성공적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세상 경험을 많이 했고 그 과정에서 옳고 그른 것을 잘 골라냈으며, 약간은 퇴폐적인 냄새가 나지만 전체적으로 옳은 길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앨범이 불황인 요즘 상황에 비해 잘 되는 편이며, 많은 나이치고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이라고 말했다. 열아홉 살 때부터 경제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떠, 현재 먹고사는 것에 걱정이 없다고 자랑했다.

그는 새로 내놓은 4집으로 화제를 돌리면서 『기성세대든 젊은이들이든 모두 넉넉함을 맛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멋과 풍자가 사라졌습니다. 멋과 풍자를 배워야 하고 되살려야 해요. 일에 쫓기고 돈과 지역 때문에 싸우고, 정치도 싸움질로 세월을 보내고 있죠. 다들 戰士들이야. 그래서 안 싸우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앨범의 메시지가 바로 이거예요. 그 싸움의 에너지가 음악 듣는 열정으로 바뀌어야죠. 그래야 나은 미래가 보일 겁니다』
스타는 이미지를 먹고살기에 실제 만나보면 평소 생각해 왔던 것과는 차이가 많이 나곤 하지만, 전인권은 그렇지 않았다. 마음 가는 대로 말하고 움직이는 자유인의 초상 전인권, 그래서 대중들은 전인권을 부러워하고,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첫댓글 정말 당당하시죠 ? 이시대 꼭 필요한 평화주의자 히피...좀 느슨하고 게으르면 어떻습니다 우린 빨리빨리에 멍든사람들 아닙니까 ? 전인권 만세 ~~~
전인권 형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