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 2026. 8.2일 ) 말씀/ 벧로 후서 1:1-21 믿음의 진보를 보이라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베드로후서는 1:1-12절에서 믿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믿음이 아니라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합니다. 보배란 아름답고 귀하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고후 4:7 ) 그런데 요즘 교회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보면서 보배롭다는 생각이 듭니까? 오히려 추하고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버배로운 믿음이 아름답게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간디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은 에수님도 좋고 성경도 좋아한다고 그러나 교회는 싫다고... 왜 그렇습니까? 내용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릇인 우리 자신이 문제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을 빌리면 믿음의 성장과 진보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인문고전을 대하면서 성장 진보에 대해서 수없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까? 성경도 우리 믿음의 진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어떻게 하면 우리 믿음이 성장 발전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배처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지 오늘 베드로후서 1장 5-7절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말씀을 보면 믿음의 진보에 7단계가 있습니다. 7단계? 겁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짧게 짧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믿음이면 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믿어야 구원받고 천국갈 수 있으니 믿음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정말 중요하지만 다가 아닙니다. 믿음은 신자의 삶의 기본입니다. 이 믿음을 기본으로 해서 하나씩 하나씩 덕목들을 계속 쌓아나갈 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보배처럼 드러나게 되리라 믿습니다. 첫째, 믿음에 덕(goodness); 덕은 신자들의 좋은 영향력을 말합니다. 믿음이 인정받으려면 생활 속에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지 않는 다면 그 믿음은 아직 가치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드러낼 수도 없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땅 문제로 다투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며 양보합니다. 또 바울은 자신은 고기를 먹는 것이 형제에게 거치는 것이 된다면 영원히 먹지 않겠다고 한 내용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이 옳은 것을 주장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덕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 믿는 사람은 양보를 하는구나,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구나.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구나.“ 믿음의 사람이나 교회가 가끔 세상에 지탄을 받는 경우 대부분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덕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행동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면 그 믿음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덕으로 증명되고 인정되는 것입니다. 처음 봉사 나가는 라후족 오지 마을에 가서 예수 믿으라고 말하지 않아도 먼저 그들의 필요를 위해 쌀을 나눠주고 선한 행실을 보이면 됩니다. 그러면 스스로 ”저 사람들은 누구래?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는데 와서 색소폰 연주도 해주고 과자랑 선물도 주고, 쌀도 주고 너무 감사하네. 뭐하는 사람들이야?“ 본인들 스스로가 생각하거나 묻고 답합니다.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이래, 그래 불교믿는 사람들보다 낫네~~“ 신자들이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려면 말보다도 자기 생활에 충실하여 덕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자기 생활에 성실하고, 직장인은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가정주부는 기본 살림을 잘하고, 크리스천들은 한번 약속을 했으면 반드시 지키고, 거짓말 하지 않는 것, 말은 안 해도 사람들은 이런 것을 눈여겨봅니다. 주님은 로마서 15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믿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둘째는 덕에 지식(knowledge): 그 다음 바울은 덕에 지식을 쌓으라고 합니다. 지식의 문제도 아주 중요 합니다. 요즘 우리는 매일 큐티 말씀을 묵상하고, 독서모임을 하면서 니체, 데카르트, 쇼펜하우어 등 글을 통해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며 살아갑니다. 지식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설마 정말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성경 공부 정말 필요합니다. 그런 지식이 우리를 바르게 믿게 하고 , 바른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또 세상을 바르게 아는 지식도 필요합니다. 흔히 말하는 성경 많이 읽는 것, 신학 공부 많이 하는 것, 책을 많이 읽는 것,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의 지식은 참 지식이 아닙니다. 소유의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과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을 배척하였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열심히 읽었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중세 시대에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 오직 말씀, 오직 무오한 하나님의 교리를 주장햇지만 마녀사냥을 하며 수많은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나쁜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안다 하나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세상을 정죄하였습니다. 세상은 자기 지식으로 인해 하나님께로 부터 돌아섰고 무신론과 인문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사실은 사실은 무지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어떤 지식? 삶에 녹아지는 지식, 실천되는 실용지식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르게 아는 지식도 필요합니다. 인문고전.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더 많이 말씀을 묵상하고 책을 읽고, 역사 공부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의사가 의료지식만 갖고 환자를 치료할 수 없습니다. 환자와 질병과 환경에 대해서 잘 모른다면 오히려 의료사고를 내서 환자를 죽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사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을 치료하는 의사들입니다. 그런데 말씀만 알고 세상을 모르면 어떻게 치료할 수 있습니까? 몇 년 전 독일 드레스덴 박영철 선교사님과 대화를 하면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지에서 선교하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전 목사에게 속해 있고, 문재인에 전 대해서 빨갱이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화문 태극기 부대 사고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대학 나온 지식인들로서 선진 유럽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전 목사의 행태는 이미 세상이 다 알고 덕스럽지 못한데서 이미 욕을 먹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의인으로 여긴다는 것을 무얼 말합니까? 오직 하나님만 섬긴다 하나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세상을 아는 지식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의식이 과거에 머물러있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 해야하고, 세상에 대해서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매일 성실하게 큐티를 하고, 인문고전 독서를 하며 세상 거짓 뉴스에 휘둘리지 않으면 됩니다.
셋째로 지식에 절제(self-control): 지식 다음으로 우리가 추구할 것은 절제입니다. 절제는 자기 통제(selfcontrol)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소원이 있으며 동시에 육신의 본성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목표를 가지고 있어도 절제가 안 되면 그 뜻을 이룰 수 없고, 우리의 삶은 육신의 본성에 의해 한순간 무너질 수 있습니다. 먹는 것도 절제, 입는 것도 절제, 자는 것도 절제, 노는 것도 절제 모든 삶이 건강하게 정상적으로 돌아가려면 절제가 필요합니다. 절제란 자기 안에 영적인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안일과 게으름, 교만 등 죄의 소욕을 통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도록 콘트롤 하는 힘입니다. 감정이 앞서지 않고 이성이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런 절제의 삶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이성의 힘을 기르는 것이고, 좋은 습관을 갖는 것입니다. 좋은 습관은 반복하는 훈련을 할 때 생깁니다. 이런 좋은 습관은 관성의 법칙이 있어서 한번 길들여지면 그다음부터는 어렵지 않게 저절로 된다고 합니다(뉴톤의 제1 법칙). 계속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가 어렵지 않습니다. 계속 습관적으로 독서하고, 성경읽기 하는 사람은 책을 읽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계속 습관적으로 운동하는 사람은 운동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좋은 습관을 길들임으로써 감정절제, 안일 절제가 되면 이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넷째로 절제에 인내(perseverance): 절제 다음에는 인내입니다. 오래 참는 인내가 없으면 절제도 무산됩니다. 왜냐하면 좋은 습관도 어려운 고비가 있습니다. 특히 상황이 갑자기 바뀔 때, 어떤 어려운 시험이 부딪힐 때, 좋은 목적을 가졌지만 장벽에 부딪힐 때 낙심하고 포기하기 쉽습니다. 이때 참고 인내하며 도전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책을 읽을 때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악기를 하나 배우는 것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다이어트 정말 인내가 필요합니다. 마침내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인내의 과정이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성장을 위해, 다른 사람을 돕는 일들 인내가 없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 인내는 신앙 생활하는 우리를 온전케 하고 마침내 영적인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모든 훌륭한 신앙인들은 다 이 인내하는 과정을 통과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인내하였고, 야곱도 처가살이 20년 인내가 필요했고, 모세는 40년을 인내하며 기다렸으며, 요셉의 인내는 마침내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내의 과정을 통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외적인 성취가 아닌 사람을 만드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온유한 사람, 구속 역사에 쓰임받을 만한 사람을 빚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 만드는 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성숙에도 인내가 필요하고, 마침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 인내할 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 때가 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지금 각자를 돌아보면 어려운문제들이 없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참으면서 인내하는 믿음을 배운다면 마침내 좋은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다섯째 인내에 경건(godliness):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헌신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삶에 최고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고 덕을 쌓는 일, 절제하고 인내하는 일,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하고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사는 신자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최고의 목표로 두는 것은 당연합니다. 전도서 저자는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서 결국 인간이 헛되이 살지 않기 위해서는 본문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 본분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덕을 쌓기 시작해서 성숙에 이르게 되면 점점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어 말과 행동, 생각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 little Jesus가 되고, 말과 행실을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게 정상인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주위에 안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진짜 그리스도인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소리를 들어야 진짜입니다. 사도행전에 안디옥 교회가 그랬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전 11:25-26)
여섯째, 경건에 형제우애(brotherly kindness): 경건이 끝이 아닙니다. 경건에 증거가 필요합니다. 경건이 하나님께 대한 자세라면, 형제우애는 우리의 신앙이 사람에게로 나타내지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경건을 소유했다면 이 신앙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당연히 형제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1:4:20)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만 머물러 있다면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또 "나는 하나님 앞에 살고 있소' 하면서 사람과는 관계가 안 좋고 말도 안 하고 산다면 그것도 참된 경건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배려하고, 거짓말 하는 것을 그쳐야 합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 사랑을 밖으로 흘러 넘쳐서 형제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나타나야 진짜 하나님 사랑이며 경건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건물 이름만 사랑의 교회라고 해서 사랑의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곱째, 형제우애에 사랑(love): 이제 마지막 단계가 사랑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 즉, 모든 덕목 위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더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시작한 덕목들을 마지막 사랑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한1서 3:1) 이는 모든 덕목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시작되어 점점 성숙해져서 마지막 최고의 덕목인 하나님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우리 신앙인의 목표는 조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신자들은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최고의 덕인 사랑을 목표로 하여 열심히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멈추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계속 진보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9절에서 기초적인 믿음에 머물러 성장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소경이요, 원시치 못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는 알지만 둘은 모르는 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악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자신도 혹시 안다고 하나 무지하고, 본다고 하나 소경이 아닌지 돌아보고 의심해봐야 합니다. 악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끊임없이 배우며 성장하고 진보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의 진보 7단계를 배웠습니다. 이는 믿음은 반드시 성장의 단계를 거쳐 진보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해야 마침내 보배로운 믿음을 세상에 드러내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여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참 그리스도인들로 성장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태국 단기 선교 여행팀들 더운 날씨에 수고들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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