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의 절반은 한인들과 뒤섞여 살았네.(生涯半雜漢人家)
○ 〈한족(漢族)은 본시(本是) 소수민족(少數民族)이었다.〉라고 설명(說明)하였다. 【우리 카페(Cafe)에 이미 수차례 게재(揭載)된 바 있다.】 이를 뒷받침하고, 고증(考證)할 수 있는 내용(內容)이다.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를 주장(主張)하는 이들에겐 고무적(鼓舞的)인 내용(內容)이 아닐까한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은, 대륙(大陸) 곳곳에 한족(漢族)이 대부분(大部分)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20세기(世紀)에 정치적(政治的) 목적달성(目的達成)을 위한 조작(造作)된 이야기일 뿐이다.
이는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반도(半島) 땅으로 이동(移動)시키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넓고 넓은 대륙(大陸) 땅 이곳저곳에, “한족(漢族)이라는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소수민족(少數民族)을 주류(主流) 종족(種族)인 냥 만들어 놓은 것이다.” 1,900년대로부터 지금까지도 계속(繼續) 조작(造作)되고 있다.
18∼19세기를 살다간 우리들의 선대인(先代人)이 기록(記錄)한 문집(文集)속의 내용(內容)을 보기로 하자.
○ 노사집(蘆沙集)【著者 기정진(奇正鎭 : 1,798~1,879) 자 대중(大中), 호 노사(蘆沙), 본관 행주(幸州)】 / 노사집(蘆沙集) 제1권 / 세 고을을 읊은 시 3수〔三鄕 三首〕
남쪽의 백성과 만물 점차 쓸쓸해지는데 / 南維民物漸蕭索
대나무 울타리 가에 오솔길이 비껴있네 / 篁竹籬邊細路斜
새벽에 물고기 잡아 저녁끼니 제공하니 / 曉拾魚鰕供夜食
생애의 절반은 한인들과 뒤섞여있네 / 生涯半雜漢人家
갈대가 객 지나는 언덕에 나눠있는데 / 蘆荻平分過客岸
목면으로 누가 상파화와 흥정하는가 / 木綿誰博商婆花
포구 사람은 아직 상서사랑 말하고 / 浦儂猶說尙書愛
농가는 지금도 찰방 집안을 전하네 / 農戶今傳察訪家
무협의 양대에 산은 백 겹이요 / 巫峽陽臺山百疊
모인의 대식국에 물결이 일렁였네 / 毛人大食水曾波
평생에 세 고을 좋음 익히 들었으나 / 平生慣聽三鄕好
온갖 한과 수심을 어찌 알겠는가 / 萬恨千愁可柰何
※ 참고 / 고전번역원db [주-D001] / 무협(巫峽)의 양대(陽臺) : 무협은 촉(蜀) 땅에 위치한 무산(巫山)을 가리키고, 양대(陽臺)는 무산에 있는 누대(樓臺)의 이름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회왕(懷王)이 고당(高唐)에 노닐다가 꿈속에 신녀(神女)를 만나 동침을 하였는데, 신녀(神女)가 떠나면서 “첩은 무산(巫山) 남쪽 높은 봉우리에 사는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매일 아침저녁 양대(陽臺) 아래에 있습니다.” 하였다 한다.《文選 宋玉 高唐賦》
● 위의 시(詩)는, 「18세기(世紀)∼19세기(世紀)를 살다간 조선인(朝鮮人)의 작품(作品)이란 것에 의심(疑心)의 여지(餘地)가 없다.」 구절(句節)속에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비주류(非主流)였던 “한인(漢人) 곧 한족(漢族)”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우리들에게 일깨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1) 〈生 涯 半 雜 漢 人 家 : 생애의 절반은 한인들과 뒤섞여있네〉하였다. 위의 시(詩)를 잘 보면, 「저자(著者)는 그곳이 고향(故鄕), 토착민(土着民)이 아닌 외부(外部) 곧 조정(朝廷)으로부터 명(命)을 받고, 임지(任地)에 부임(赴任), 생활(生活)하던 관리(官吏)로써 백성(百姓)들과 함께 살아가는데, 그곳에는 살고 있는 백성(百姓)들이 한인(漢人) 곧 한족(漢族)이었으니, 이들과 반평생(半平生)을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구절(句節)은, 「조선(朝鮮)의 땅이 오늘날의 반도(半島)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곧 〈저자(著者) 자신(自身)은 ‘한인(漢人)=한족(漢族)’이 아닌 조선인(朝鮮人)이었고, 그가 관리(官吏)로 조정(朝廷)의 명(命)을 받고 부임(赴任)한 임지(任地)의 땅에는 한인(漢人)들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시(當時)의 한인(漢人)은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남만(南蠻)에 속해 있었으며, 그곳은 장강(長江) 이남(以南) 땅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2)〈浦儂猶說尙書愛, 農戶今傳察訪家 : 포구 사람은 아직 상서사랑 말하고, 농가는 지금도 찰방 집안을 전하네.〉하였다.
위 (1)에서 설명(說明)한 것처럼 〈저자(著者) 자신(自身)은 ‘한인(漢人)=한족(漢族)’이 아닌 조선인(朝鮮人)이었고, 그가 관리(官吏)로 조정(朝廷)의 명(命)을 받고 부임(赴任)한 임지(任地)의 땅에는 한인(漢人) 곧 한족(漢族)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 영토(領土) 내(內)의 남방(南方) 땅에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한인(漢人)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통상적(通常的)으로 남방(南方)이란 장강(長江) 이남(以南)지역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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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尙書) : 고려(高麗) 육부(六部)의 으뜸 벼슬. 정3품(正三品)으로 6대 성종(成宗) 14년(995)에 어사를 고쳐 부른 이름임. 그 뒤에는 판서(判書) 또는 전서(典書)로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다. 상서(尙書)는,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판서(判書)를 말한다.
… 찰방(察訪) : 조선왕조(朝鮮王朝)시대 각 도(道)의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문관(文官) 종육품(從六品) 외관직(外官職)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이르는 중요한 도로에 마필(馬匹)과 관원(官員)을 두어, 공문서(公文書)를 전달하고 공용여행자(公用旅行者)에게 숙소제공‧마필공급 등 편리를 도모하는 기관(機關)을 역참이라 하였는데, 약간의 역참(驛站)을 1구(區)로 하여, 이를 역도(驛道)라 칭하고, 그 구간의 마정(馬政)을 맡아보는 관직(官職)을 마관(馬官)이라 하여, 교통로(交通路)를 이용하여 정보수집(情報蒐集)도 하였는데 고려 후기부터 역승(驛丞)이라고 하다가 1535년(중종 30)부터 찰방(察訪)이라고 개칭하였다.
경국대전에 보면 조선 초기 전국에 23명의 찰방과 18명의 역승(驛丞)을 두어 총 537역을 관장케 했는데, 1535년(중종 30)에는 역승을 없애고 전국의 큰 역에 40명의 찰방을 두고 이를 찰방역이라 하였다.
경기도(京畿道)에 6원, 충청도(忠淸道)에 5원, 경상도(慶尙道)에 11원, 전라도(全羅道)에 6원, 황해도(黃海道)에 3원, 강원도(江原道)에 4원, 함경도(咸鏡道)에 3원, 평안도에 2원을 두었다. 작은 역에는 역장을 두어 찰방이 이를 관장하였는데, 중요한 요소에는 겸찰방(兼察訪) 12원을 두어 찰방의 비행(非行)을 감시하게 하였다. (인용/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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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 부임(赴任)했던 옛 고려왕조(高麗王朝)의 상서(尙書)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찰방(察訪)이 매우 어진 이들로써 토착민(土着民)들로부터 칭송(稱頌)을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고,
부임(赴任)했던 임지(任地)는, 「고려(高麗) 땅이었다가 조선(朝鮮) 땅(疆域)이 된 곳」임을 알 수 있는데, 이곳은 남방(南方)의 땅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이곳도 고려(高麗) 땅이었고, 조선(朝鮮)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 21세기(世紀) 한국사(韓國史)는 도대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것이며, 누굴 위해 존재(存在)하고 있는 것일까? 일제(日帝)군국주의(軍國主義)자들의 후예(後裔)들을 위해…! 이젠 정신(精神)을 차려야 되지 않을까?
2019년 07월 11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역사통설(반도사관=식민사관) 논자들이 말하는 반도조선의 허구를 깨지 못하는 한, 조선사 진실찾기는 탁상공론에 그칠것이다라는 것은 명백한 현실입니다.
이 사람들은 미친 척하면서 반도조선 영역 쌓기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오늘도 어디 어디에서 옛 백제 유적이........언론플레이를 합니다.
지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오류"라고 말하고, 명문 하나 없는 유물유적에 대해서는 추정과 추측만으로 두리뭉실 설명만 합니다. 한글로 말입니다. 무슨 증거나 고증도 없이 그저 한글해설서만으로 모든 것이 다인 냥 합니다.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이상한 나라로 만들어지고 있는 걸까요?
토착왜구가 정말 존재하는 걸까요?
토착왜구!
요즘 열도 "아베"의 막장드라마에 우리나라의 극우들과 선이 맞닿아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기사들이 보입니다.
이런 국란속에 정말 토착왜구가 '아베'편을 들 수가 있을까요?
이 국란이 끝나고 난 뒤에 그들은 어떻게 얼굴을 들며,
이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들이 미국이나 열도로 이민가지 않을까?
무척 궁금해집니다.
정말 대한민국에 토착왜구와 같은 무리들이 존재하고 있는 걸까요?
만약 이러한 무리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이들 모두를 배편으로 열도로 보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실록에보면 분명히 漢人들이라고 나옵니다. 즉 朝鮮人은 따로 있었다는거죠. 정조실록을보면 사천성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을해야되는데, 이때 황제(정조)는 滿州八機軍과 漢軍을 출병시켜 반란을 제압합니다. 또한 그들 모두를 京社로 불러들여 부상병들은 치료해주고 각각 훈포상을 해서 돌려보냅니다. 이기록을 근거로보면 이른바 靑軍과 漢軍은 朝鮮皇帝의 어지를 받드는 군대임을 알 수 있읍니다. 따라서, 얼마전까지만해도 大韓民國 국방부장관이 중국을 방문했을때 열병식을 해주는것을 보았을겁니다. 이런것은 아무나 안해줍니다. 바로 그들도 역사적인관계를 아니까 예우차원에서 하는거죠. 울나라국방인들은 이런사실을 모르죠.
삼전도 항복 이후에 한반도로 쫒겨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