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군수 신경준의 마애비는 서산 부석사 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
마을 깊숙히 좁은 도로로 5분여 들어 가면 휴양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 있다.
신경준의 마애비는 여름 휴가 기간에 찾아 간 것이기에 풀이 많고 하여 사진 촬영하기가
여간 어려운 곳이 아니다.
그래서 가져간 작대기로 풀을 정리하고 높은 곳에 사진 촬영도 어려워 돌을 밟고 나뭇가지를 붙잡고
엉성한 각도로 사진을 찍었다.
신경준 마애비는 높이가 거의 3m지점에 있다.
잡목과 풀이 덮혀 있어 마애비 인지 자세히 안보면 보이지 않는다.
신경준 마애비는 180cm정도의 크기로 마애비 치고는 크게 만들어 졌다.
향 오른편에 새긴 년도를 새기고 글씨의 크기로 인해 영세 불망비는 글이 일렬이 아니고
3행으로 글이 새겨져 있다.
마애비 답사는 여름보다는 겨울이 제격이지만 시간을 마추기가 쉽지 않다.
특히 울산에서는 겨울답사는 눈이 오지 않는 울산과 달리 타 지역은 멀기도 하지만
눈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날씨의 추위에 따라 답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마애비는 지번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자세한 자료로 바탕으로 찾아야 하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신경준의 마애비 위치가 있는 옛길이거나 이 마을에 관련된 어려움을 해결 해주어
세운 비를 새긴 것으로 생각되나
처음 추정한 엣길에 신경준을 오래 동안 잊지 않는다 비를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신경준의 마애비에 새겨진 년도 1763년이라 되어 있지만 조선 왕족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762년에 서산군수에 제수된 신경준이 하직 인사를 한다는 기록에 승정원 일기에 보인다.
승정원일기 1201책 (탈초본 67책) 영조 38년 1월 21일 을묘 3/23 기사 1762년 乾隆(淸/高宗) 27년
安東府使 兪漢蕭가 下直함
瑞山郡守申景濬
영조실록 104권, 영조 40년 9월 17일 병인 3번째기사 1764년 청 건륭(乾隆) 29년
이복원·서명신·이육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장령에 제수 되는 기록이 보인다.
신경준에 대한 연구는 많이 되고 있으나 일반인 들은 잘모르는 경우가 허다하고 생각
되는 것은 조선후기 영조 시대의 언어 지리학 연구자로 대단한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조선후기 언문학자로는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신경준이 남긴 책이나 여러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운해훈민정음』(행장에는 五聲韻解)·『일본증운(日本證韻)』·『언서음해(諺書音解)』(유고목록과 서에는 東音解)·『평측운호거(平仄韻互擧)』·『거제책(車制策)』·『병선책(兵船策)』·『수차도설(水車圖說)』·『논선거비어(論船車備禦)』·『의표도(儀表圖)』·『부앙도(頫仰圖)』·『소사문답(素沙問答)』·『직서(稷書)』·『장자변해(莊子辨解)』·『강계지(疆界志)』(또는 疆界考)·『산수경(山水經)』·『도로고(道路考)』·『산수위(山水緯)』(旅菴全書에는 山水考로 통합되어 있음.)·『사연고(四沿考)』·『가람고 伽藍考』·『군현지제(郡縣之制)』
그 중에 수차도설에 대한 이야기 정약용 선생이 쓴 책에는 수차를 만들려고 여러번 노력하나 만들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가 공장(기술자)이 없어서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다양한 방면에서 많은 기록을 남겼지만 그 중에 주목해 야하는 것은
산경표이다. 우리나라 산의 높이, 이름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흔적과 노력이 산수경과 도로고에 나타나고 있으며
지리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말년에는
승지·북청부사·순천부사·제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낸 다음 1781년(정조 5) 70세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 사람의 노력이 전해지고 있는 다행으로 생각되지만 특히 많은 저술 활동과 기록을
남긴 것은 후대에 많은 도움을 주고있는 것은 사실이다.
후대에 언어학자로 지리학자인 신경준 선생을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옥산 이 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