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 드레이퍼(오른쪽) 미국 세인트루이스 한국 명예영사는, 자기처럼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가수 인순이와 만나는 오랜 꿈을 20일 이뤘다. 조용철 기자 |
인순이=“(눈물을 닦으며) 얘기 안 해도 오래전 친구 같네요.”
드레이퍼=“(인순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그냥 순간적으로 통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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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이퍼=“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묻지 않아도 알 거 같아요. 인순이씨 눈에서 내가 보이네요.”
인순이=“나도, 주디에게서 내가 보여요. 보자마자 느낌이 통했어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물어봐서 뭐하리, 내가 곧 당신인데. 그런 생각이 드네요.”
드레이퍼=“인순이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존재 자체로 아름답다고 느껴져요.”
인순이=“주디도 그래요. 내가 주디고, 주디가 나인 것 같아요.”
드레이퍼=“천년은 알고 지낸 거 같아요.”
인순이=“아니, 만년이에요, 만년.”
미군 흑인 아버지에 한국인 어머니
북받치는 감정에 말을 겨우 이어가던 둘은 자리에 앉았다. 기자는 살아온 속 얘기를 편하게 할 수 있게 30여 분쯤 자리를 비켜줬다.
다시 돌아가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대화에 빠져들어 식사 주문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사이 둘은 좀 차분해졌고 더 가까워져 있었다. 여전히 젖은 눈, 상기된 얼굴의 인순이는 기자에게 그랬다.
“주디가 판사로 성공했다고 반가운 게 아니에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자기 길을 걸어간 것 자체가 대견한 거예요. 서로에게 그렇지요.”
이런저런 감정을 여러 표정으로 곱씹으며 인순이는 계속했다.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안 중요해요. 오늘까지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준 게 고마워요. 주디는 미국에서, 나는 한국에서 살아왔지만 똑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왔다는 게 절절히 느껴져요. 서로가 서로에게 ‘장하다’는 맘이 막 들어요.”
언니의 표정으로 듣고 있던 드레이퍼가 입을 뗐다.
“우리처럼 혼혈인 사람들은 어느 사회에도 100%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갖고 평생을 살아요. 어딜 가나 나를 거부하는 것 같은 느낌에 맞서야 합니다. ‘아무도 날 원치 않는다’는 느낌은 어릴 때 특히 더 괴로워요. 그 상처를 극복하는 건 힘들죠. 그렇지만 이겨내면 더 큰 기쁨이 오는 거예요. 인순이도 그 기쁨을 잘 알아요. 그래서 보자마자 통하는 거죠. 인순이는 자랑스러운 동생이자 평생 친구예요.”
막 테이블 위에 차려진 불고기덮밥이며 깍두기를 서로 접시에 덜어준다. 꼭 서로를 챙겨주는 자매 같았다. 둘은 도란도란 지난 얘기를 나눴다.
인순이=“상처를 곱씹기만 하면 더 큰 고통밖에 안 되잖아요? 그래도 그 고통이 우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만드는 게 결국 자기하고 모두에게 좋은 거지요. 혼혈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150을 노력하면 70은 알아줘요. 그리고 그게 쌓이면 70만 노력했는데도 90을 알아주는 과분한 사랑을 받을 때도 생기고요.”
드레이퍼=“상처를 마음속에 오래 두면 원한이 되잖아요. 마음속 원한은 결국 내 발목을 잡게 되는 거예요. 그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줘야 훨훨 날아갈 수 있더라고요.”
인순이=“주디가 한국의 뿌리를 잊지 않은 것도 고마워요. 미국까지 가서 어려움을 딛고 성공했으면 한국에 굳이 안 와도 되잖아요. 힘든 기억만 있는 곳이니까요. 그런데도 자기 뿌리를 찾아와 주는 것이 고마워요.”
약 한 시간의 짧은 만남. 드레이퍼가 다음 일정 때문에 일어서야 했다. 둘은 친구로 또 자매로 계속 만나기로 했다.
기자는 인순이와의 만남 이전에 드레이퍼에게 간간이 지나온 삶을 물어봤다.
슬펐다. 드레이퍼의 한국 이름은 ‘평화’. 외할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다. 1956년, 6·25의 상처가 아직도 크게 벌어져 있을 때 태어난 손녀가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담았다. 하지만 6살 때 부모를 따라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로 이주하면서 그의 삶은 ‘평화’와 멀어졌다.
“놀림을 받을까봐 주디라는 미국 이름을 만들었어요. 한국말도 안 하겠다고 엄마한테 떼를 썼지요. 난 미국 사람이 될 거니까 영어만 할 거라고 엄마한테 소리를 질렀어요.
그때 엄마가 제 엉덩이를 막 때리면서 울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동네 가게를 가는 것도 전쟁이었다.
“엄마가 영어를 전혀 못해 항상 같이 갔어요….” 드레이퍼의 시선이 잠시 멀어지면서 목소리가 떨렸다.
“동네 애들이 엄마하고 나한테 돌을 던졌어요. ‘중국 놈아,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며 소리를 질렀지요….”
학교에서도 왕따였다.
“애들이 ‘넌 왜 그렇게 이상하게 생겼니’라며 늘 놀렸어요. 차이일 뿐인데 차별이 된 거예요. 그래도 친해지려고 한번은 애들 집에 놀러 갔어요. 그런데 갑자기 몇 명이 튀어나와서는 나를 괴롭히고 때렸어요. 울었어요. 도대체 내가 왜 맞아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요.”
“그러면서 생각했어요.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법대에 가서 판사가 됐지요.”
그 과정에서 엄마 이순여씨의 ‘한국식 교육’이 톡톡히 역할을 했다. 드레이퍼를 법원에 데려가 판사석을 보여주며 “너도 나중에 저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했다.
또 “주디야, 성공하려면 너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돼. 남들 잘 때도 공부해야 한다. 엄마만 믿어”라고 했다. 그렇게 닦달하던 엄마는 그가 10대 때 이혼했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드레이퍼는 조부모의 손에 자랐고 엄마는 지금 그에게 삶의 등대가 되고 있다.
흑인 남편과 딸 온 가족이 법조인
조부모와 살면서 드레이퍼는 노스캐롤라이나대에 입학했다. 그 뒤 하워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후 2004년부터 세인트루이스 지방법원에서 일해왔다. 흑인인 남편도 법조인이다. 딸 첼시(25)도 법대에 다니고 있다. 인순이를 만나던 날 남편이 미주리주 대법원 판사로 임명받았다는 희소식도 날아왔다.
드레이퍼는 어릴 때 한국이라는 뿌리를 부정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뿌리를 다지는 데 열심이다. 지역 내 ‘아시아계 미국인 변호사협회’ 창립도 주도했다. 미국에 온 한국계 결혼이민자들 모임을 찾아다니며 조언도 해주고 있다. 지난 6월엔 세인트루이스의 한국 명예영사도 됐다. 또 같은 배경을 가진 아이들을 돕는 재단을 인순이와 함께 만들고 싶은 꿈도 갖고 있다. “주디의 ‘J’와 인순이의 ‘I’를 따서 ‘J&I 재단’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도 있다. 두 사람은 논의를 더 해보기로 했다. 인순이는 혼혈아동복지를 위한 기관인 펄벅재단의 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그는 “아무리 부정해도 내 뿌리는 안 사라져요. 내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니 마음도 한결 편해졌지요. 이젠 지역 내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다지는 데 명예영사로서도 힘을 더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명예영사 외교부는 전 세계 93개국에 146명의 명예영사를 두고 있다. 명예영사는 우리 공관·영사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지역에서 한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한국인을 보호한다. 관할 지역에서 한국인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거나 해당 지역의 한국에 대한 친밀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임기는 5년이며 연임할 수 있다. 해당 국가의 유력 인사들 중에서 선임되며 주로 법조인·사업가·교수 등 명망가로 구성된다. 미국에선 허버트 험프리 전 미국 부통령의 아들인 허버트 험프리 3세(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관할), 미식축구 수퍼보울 최우수선수 출신인 프랑코 해리스(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관할) 등이 활동한다. 이들 중 주디 드레이퍼 명예영사를 포함한 17명이 외교부 초청으로 17~22일 방한해 창덕궁·비무장지대 및 산업시설을 시찰하고 한국 전통문화 공연을 관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