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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거제도는 ‘차디찬 글라스’인가별별 총선 이야기 (1) 추억의 찬찬찬 트리오
[편집자 주] 녹색당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10월 12일 ‘제20대 총선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 선출 공고’를 냈다. 녹색당은 내년 4월 총선에서 5명의 비례대표 후보를 낼 계획이고, 5명의 면면과 이 후보들의 순번은 당권자 직선 투표에 따라 결정된다.
이 글은 선거 분위기를 조장(!)하려는 목적으로 씌어졌고, 총선의 계절을 맞이해 앞으로도 ‘별별 총선 이야기’를 이 지면에 연재할 예정이다. 국정역사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검인정이라 해도 교과서에는 실리기 쉽지 않은, 우리가 몰랐거나 잊었던 선거 이야기다. 제1편의 주제는 ‘비례대표’다. 당원 여러분의 집필 가세를 환영하고 고대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례대표는 정당명부에 따로 투표하여 선출한다. 2001년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마련된 제도로 총선에서 도입된 것은 2004년, 그 이전에는 정당명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각당의 비례대표 의석수를 산출했다. 1988년에만 해도 지역구 의석수의 1/3을 ‘전국구’ 의석으로 배정했다. 일종의 가산 의석, ‘보너스’였다. 아무리 한국의 선거제도가 거대정당에 유리하다지만 이때는 정말이지 선거제도에 ‘철판’을 깔다시피했던 셈이다.
1992년부터는 지역구의 의석수가 아닌 득표수에 비례하여 전국구 의석을 배분했다.(당시 국민학생이 필자가 가진 <xx전과>에는 이 같은 변경 내용이 반영되어 있지 않아 학생들의 혼동을 초래하였다.) 지역구 의석이 없어도 전국구 당선자가 생길 수 있는 요건이 되었지만, 지역구에 후보를 많이 내지 못하는 소수정당에게는 여전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 선거에 출마한 민중당의 경우 출마자 평균 6.2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출마자수는 51명에 그쳤고 후보를 내지 않은 지역까지 포함하여 득표율을 계산하면 1.25%에 불과했다. 민중당의 의석수는 0이었다. 그리고 해산되었다.
평균 득표율 6.25%를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득표율이라고 친다면 민중당은 최소 3석은 거뒀을 것이다. 사실 정당명부 투표가 지역구 투표보다 소수정당에게 표를 가져다주는 효과가 더 높다는 것을 감안하면 의석수가 그보다 더 많으면 더 많았지 적을 수는 없다. 민중당 참여자들은 후일 상당수 민주노동당 창당에 나서고, 민주노동당은 헌법재판소로부터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따내기에 이른다. 헌재 판결 당시, 민중당의 해산을 경험한 바 있는 활동가들은 특별히 더 깊은 감회에 젖었을 법하다.
1990년대에는 ‘정당명부’가 없었다
이처럼 1990년대식 ‘전국구’ 제도는 득표와 의석수간의 비례성을 높인다는 취지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전체 국회 의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지금처럼 그때도 상당히 낮았다. 또 최근 비례대표가 정치신인의 등용문이었던 것과 달리, 당시는 말 그대로 ‘전국구 인사’들이 적지 않게 전국구 후보에 앉았다. 전국구는 ‘옥상옥’의 지위, 그러니까 무언가 불필요해 보이고 비용을 낭비하는 듯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이는 아마도 국민들이 현재에도 비례대표제에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원인이 된 것 같다.
요즘에야 여성할당제도로 인해 비례대표 1번은 대부분 여성이고 어떤 분야의 전문가나 시민운동가에게 이 자리가 돌아가고는 하지만, 당시에는 대선 후보급 또는 당대표급의 정치인이 1번을 차지했다. 1992년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의 전국구 1, 2번은 김영삼 대표와 박태준 최고위원이었고, 제1야당인 민주당의 1번과 2번은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의 몫이었다. 4년 뒤 1996년 총선에서 집권당인 신한국당은 1번과 2번에 이회창, 이홍구 씨를 앉혔다. 영입 인사였지만 대선 주자로 꼽히던 인물들이었다.
발상 전환으로 정반대의 작전이 구사되기도 했다. 1988년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은 김대중 총재를 전국구 11번으로 돌렸다. ‘김대중까지 당선되도록 싸운다’는 ‘배수의 진’인 셈이다. 결국 그는 당선되었다. 이것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평민당의 위상을 상징했다. 김대중은 1996년에도 이 진법을 펼친다.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로 등장한 그는 그해 총선에서 전국구 14번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낙선하고 말았다. 13번에서 당선권이 끊어졌다.
당시 신한국당에서도 비슷한 작전이 펼쳐진다. ‘무균질 우유 CF’로 유명한 박찬종 씨가 21번을 자청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박씨는 그 무렵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스타 정치인으로서 무소속으로 있을 적에도 차기 대선 주자 여론조사에서 1위를 틀어쥐고 있었다. 하지만 잘 나가다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하기도 했고, ‘독불장군’, ‘대통령병’ 이미지에 휩싸여 있었다. 신한국당에 영입되자마자 선거대책위원장직에 오른 그는 “당이 잘 되어서 나도 잘 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때 공교롭게도 신한국당 전국구의 20번은 이찬진 한글과컴퓨터 사장(김희애 씨 남편, 그 사람이 맞다), 19번은 김찬진 변호사였다. 세 사람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따면 ‘찬찬찬’이다. 찬찬찬 트리오 가운데 몇 사람이 당선되느냐에 따라 신한국당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중 둘이 당선되면 승리, 셋이 당선되면 낙승, 한 사람 이하가 당선되면 패배고, 모두 떨어지면 참패라고들 했다.
결과는 “그러나 마음줄 수 없다는 (국민의) 그 말”… 찬! 찬! 찬! 모두의 낙선이었다. 하지만 신한국당의 분위기는 “밤 새워 내린 눈빗물”이 아니었다. 신한국당은 299석 중 139석을 차지했다. 과반 의석에 못 미쳤지만 무려 50석을 차지한 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 갈라서고 거둔 결과인 데다가, 집요하고 치사한 무소속 영입 작전으로 곧 과반 의석을 만든다는 관측이 유력했다.
찬찬찬 트리오와 신한국당 전반의 희비가 엇갈린 결정적 요인은? 신한국당이 지역구에서 대거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1등만 하면 당선되는, 1위만 당선되는 지역구 소선거구제 때문에 찬찬찬 트리오가 다 떨어지고도 신한국당은 ‘찬찬찬’ 축배를 부딪칠 수 있었다.
반면 통합민주당은 전국구에서 6석을 얻었으나 지역구에서 9석밖에 얻지 못해 총 15석으로 원내교섭단체(20석 이상) 구성에 실패했다. 전국구에서 9석을 얻은 자유민주연합의 총의석이 50석이나 된 것과 대조되었다. 지역구에서 선전을 해도 1등이 아니면 당선될 수 없고 전국적으로 고른 득표를 해도 의석수에 그다지 반영되지 않는 한국의 선거제도는 ‘차디찬 글라스’였다! (그래서 새누리당이 ‘빠알간 립스틱’을 로고로 쓰나?)
녹색 투표용지에 오른 정당들, 이제 등록취소 걱정은 뚝
정당명부가 도입된 건 2004년 총선 당시부터다. 지역구 투표용지와 따로 정당명부가 인쇄되면서, 어느 지역의 유권자는 그 지역구에 후보를 내지 않은 정당에 대해서 지지 의사를 표시할 수 있었다. 지역구 선거에서 다수 정당에 투표하면서도 정당명부를 통해 소수 정당을 전략적으로 키워줄 수 있었다. 이런 정당명부 득표에 따라 배분되는 의석은 전체 국회 의석의 2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난점을 안고 있었지만 말이다.
2016년 총선에서도 비례대표제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전까지는 2% 미만의 득표율을 기록한 정당은 등록이 취소되고 향후 4년간 다른 당명을 써야만 했다. 소수 정당의 활로를 가로막는 제도였다. 한국 국회의 비례대표 의석이 50석을 갓 넘기고 있음을 고려하면, ‘2% 미만 정당’을 규제할 게 아니라, ‘2% 정당’에 1석을 배분해도 무방하다. 녹색당은 문제의 조항을 헌법재판소로 가져갔고 2014년 헌재는 해당 법 조항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2016년 ‘녹색’ 정당명부 투표용지에 오르는 정당들은 녹색당의 투쟁 덕분에 등록취소의 위험을 전혀 느끼지 않아도 된다.
김수민 당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