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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해송 /이 상석
금년 88세이신 어머니는 1923년 정월 대보름,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에서 함양박씨 6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17세 때 아버지를 만나셨습니다.
호탕하고 술과 노래와 친구를 좋아하시던 아버지, 장날이면 조그만 가게(철물점)를 운영하며 밥술은 먹고 살았으나 일제 강제 징용을 피해 다니느라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 가세가 기울어 고생이 시작되었답니다.
동리 몇 집을 제외하고는 너나없이 어렵던 시절, 어머니는 9남매(8남 1녀)를 낳으셨는데 첫째, 둘째를 연거푸 잃고 마음고생이 심하던 차 셋째(지금의 장형 64세)와 넷째 아들을 얻어 안정을 되찾을 무렵, 불행히도 넷째마저 세살 때 죽고 말았으니 어머니의 고통이 오죽 하였겠으며 가슴속의 슬픔보다도 날마다 시어머니와 마주 대하는 심정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형님이 여섯 살 되던 해에 내가 태어나고 내 밑으로 아들 넷을 낳았으니 다른 집에 비해 자식들은 늦고 논 한 평 없이 야산을 일구어 만든 떼 밭 몇 마지기로 여섯 머슴아이들을 키우느라 어머니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 셋을 먼저 보낸 아픔과 모진 가난에 시달려 자주 아프셨습니다.
심한 가슴앓이로 방안을 뒹굴면 아버지가 구둘 장(방 돌)을 불에 데워 어머니 가슴에 얹어 드렸지만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울면서 학교에 갔지만 하루 종일 어머니 걱정에 공부가 되지 않았습니다.
학교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려 10리가 훨씬 넘는 황토 길을 달려오면 어머니는 애써 아픈 모습을 감추시며 잘 다녀왔냐고 반겨주시곤 하였습니다.
서너 살 터울인 우리 형제들은 비교적 온순하고 착한 편이었으나 누나나 여동생이 없어 집안일은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낮에는 들에 나가 일을 하시고 밤이면 등잔불 밑에서 우리들의 양말이나 검정 고무신을 꿰매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보리밥도 제대로 먹고 살기 어려웠던 가난한 우리 집!
그 어렵던 시대에 아들 여섯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남의 집 일을 닥치는 대로 해야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모내기와 벼 베기, 보리배기, 김 메기 등 남의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나는 동생을 업고 어머니의 일터를 찾아 젖을 먹이러 다니기도 하였고, 저녁에 도깨비가 나온다는 산골짜기 잔등(옹골제)을 어머니 혼자 넘어오기가 무서워 해질 무렵 일하는 주인집에 먼저 가 아이들과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의 놀이를 하며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곤 하였지요. 그리고 그날 저녁은 우리 집에서는 명절과 제사 때나 맛 볼 수 있던 쌀밥과 고깃국을 배불리 먹고 어머니 손을 꼭 잡고 무섭다는 고개를 넘어오며 언제 또 누구네 일 가느냐고 묻곤 하였지요.
심신이 피곤하신 어머니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나는 어머니가 일을 가시면 쌀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생각만 갖고 있었으니 그때부터 이미 불효자였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다른 집 부모들과는 달리 교육열이 대단하셨습니다.
우선은 배고프고 힘겨워도 재산을 모으는 것보다 아이들을 가르쳐야 가난을 면하고 희망이 있다는 생각으로 염전 일과 날품팔이, 행상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여 그 당시 어지간한 부자들도 보내지 못한 상급학교를 보내주셨습니다.
몸이 몹시 약한 어머니는 지칠 대로 지쳐 늘 앓아 누우셨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다시 고단한 일상으로 돌아오시곤 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앓아누워 계실 시간마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가난했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시며 치매기 있는 할머니를 잘 모셨습니다.
할머니는 2년가량 심하게 치매를 앓으시다 내가 12살 되 던 해(초등학교 3학년)에 돌아가셨으며 그토록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3년간 삭망전(朔望奠)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언제나 이웃과도 사이좋게 지내셨기에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성장한 우리들은 어렵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잘 보내고 반듯하게 자라 6형제 모두가 공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변화가 있게 되나 봅니다.
평생을 살 줄 알았던 고향 마을에 간척사업으로 큰 저수지가 생기고 부근 10 여 호가 이주를 하게 되어 나는 면 소재지로 방을 얻어 나왔고 어머니는 마침 경기도 성남에 사는 셋째 아들내외가 공직자이므로 아이들을 돌보아주기 위해 1986년 한 많고 정도 많은 고향을 떠나시게 됩니다.
동생은 예쁜 딸만 둘을 낳아 어머니는 손녀 키우는 재미로 사셨으며 어쩌다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시면 아이들 걱정에 며칠 계시지도 않고 올라가시곤 하였지요.
그토록 애지중지 키운 손녀들이 서울의 유명 대학에 들어가 유학도 다녀오고 졸업반이 되었으니 어머니께서는 정말 좋아하십니다.
당신께서 갓난 아이 때부터 키운 손녀들이기에 그런지 아이들도 할머니밖에 모르고 제 할머니를 ‘ 이쁜 이’라고 부르며 할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어린 아이들처럼 온갖 재롱을 부리곤 한답니다.
제수씨께서는 어머니가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만 하셨다며 생전에 편히 한 번 모셔야 한다고 2008년 6월 우체국 생활 27년을 접고 명예퇴직을 한 후 지금까지 모녀처럼 잘 살아오고 있답니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께 효도는 못해도 최소한 걱정은 끼쳐드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큰 형님을 중심으로 우애 있게 살아가고 있지요.
그리고 우리 집은 본래 무일물(本來 無一物)이였기에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형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우애 있게 살아가며 나름대로 앞가림을 하고 있답니다.
어머니는 쑥떡과 꽃 게장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나와 아내는 봄이면 쑥을 캐서 쑥떡과 꽃게 장을 만들어 어머니께 다녀오기도 하고 때로는 택배나 차편으로 보내드리기도 한답니다.
형제들은 가까이 있어 어머니를 자주 뵙지만 사실 나는 년 중 몇 번에 불과하여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고 어머니께서도 하루가 멀다 않고 전화를 하시지요. 해가 거듭 될수록 어머니는 자주 아프셨으나 형제들이 병 수발을 잘 하여 며칠 만에 일어나시곤 하시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곤 하였지요.
세월, 매정한 세월은 어머니를 그냥 두려하지 않습니다.
그 숱한 가난과 모진 역경 다 겪으시며 오직 자식을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께서 이제 조금 편안하게 사시려는데 세월은 그것을 시샘하나봅니다.
지난 5월 초순, 심상찮게 시작 된 어머니의 병환!
어지간하면 자식들이 걱정한다고 억지로 일어나시던 어머니가 이번에는 세월과 노환에 짓눌려 일어나지를 못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조금 지나면 그전처럼 좋아 질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통 잡수시지를 못하고 만사가 다 싫다하셨습니다.
병원에도 안 가신다고 하여 몇 차례 의사와 간호사를 집으로 불러 치료 해 보았지만 효과가 없고 어머니의 기력은 더욱 떨어져 이대로 두면 영락없이 돌아가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생전 처음 어머니의 이런 모습을 보니 겁이 덜컥 났습니다.
형제들이 급히 상의하여 병원으로 모셨습니다. 약한 혈관에 몇 개의 주사 바늘을 꼽고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해도 특별한 이상은 없었으나 어머니는 매우 힘들어하셨습니다.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어 물 한 모금을 잡수셔도 토해 내고 목구멍에 차오르는 가래와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심한 기침으로 몇 날 며칠을 잠 한숨 못 자고 괴로워하셨습니다.
눈도 뜨지 못하시고 말씀도 목구멍 속에서만 나와 무슨 말인지 알아들지 못하여 어머니는 허공에 손을 내 저으시며 더욱 몸부림을 치셨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노환이니 더 이상은 기대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눈치를 보이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동생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아들은 부모님의 이런 고통스러운 모습을 안 보아도 되니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언제 숨을 거둘지 한 치 앞을 못 보는 위기의 상황이 여러 차례 지나가고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자식들이 안 보이면 몹시 불안 해 하시며 수시로 찾으셨습니다.
모두가 직장인들이기에 난감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간병인에게만 어머니를 맡긴다거나 중환자실로 들여보내 우리가 어머니를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면회도 못하고, 어머니가 우리를 찾을 때 곁에 아무도 없으면 마음 아파하실까 봐 형제들이 계속 간호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모두가 함께 있을 수는 없어 당번을 정하고 자기 근무 일자에 휴가를 내고 부부간에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습니다. 토하면 또 떠넘기며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동생들과 제수씨들께서 간병을 하고 있어도 큰 형님은 직장에 장기간 휴가를 내고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연가를 내고 아내와 함께 올라가 간병을 하였지만 형제들이 고생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괴로워 신음하는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차마 떠난다는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금호고속 야간 버스에 몸을 싣는 안타까운 심정을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어머니가 병석에 드신지 104일째 되는 날이며 지금까지도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는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진리를 믿습니다.
형제들의 정성을 가엾게 여기어 반드시 어머니의 병환에 큰 차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어머니는 아주 작은 소망이 있기에 그냥 돌아가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소망은 생전에 해남을 다녀가시는 일입니다.
지난번 정신이 조금 드셨을 때 꼭 한 번 해남 우리 집에 다녀가시고 싶다 하셨습니다. 당신께서 그토록 고생했던 곳이지만 당신의 한과 땀과 눈물이 묻어 있는 고향산천, 같은 시대를 함께 지냈던 정다운 고향 사람들, 그리고 꿈에도 그리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기에 어머니는 반드시 쾌차하여 고향을 다녀 가 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집에 오시는 날, 나는 나비처럼 훨훨 춤을 추며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찹쌀밥에 게장을 어머니 숟가락에 얹어드리겠습니다.
나 어릴 적 많이 아파 입맛 없을 때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하얀 쌀밥에 갈치 토막 얹어 먹여 주시던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어머니, 어머니, 내 어머니!
살아 주셔서, 살아 계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010. 8. 23)
※ 아래 글은 젊은 시절 어머니께서 가난과 한과 눈물을 삭이시던 절구통을 보며 어머니가 그리워 적어 본 글이며, 이것은 우리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 온 가난한 어머니들의 노래일 것입니다.
절 구 통
찌든 가난
머리에 이고
모질게 살아오신
어머니 모습 담긴
절구통 하나!
겉보리 한 말만 있어도
부자 부럽지 않다 시며
이른 새벽 절구질로
보리밥 지어주시던
어머니!
명절날
어렵게 구한 쌀 한 되 박
한나절 절구질로 시루떡 쪄
조상님께 바치시던
정갈하신 어머니!
매운 고추 마늘 찧어
풋김치 담그시며
애야! 맛 좀 보렴.
매운 걸 잘 먹어야 야무지단다
하시던 어머니!
아!
나 어릴 적 절구통은 변함없건만
내 어머니 허연 백발 구순이 가까웠네.
안타깝고 한스러워라
어머니 계실 날이 몇 날이료?
세월 속에 묻혀버린 절구통 보며
숱한 날 절구질 하시던
어머니 모습 보고 있네.
화석처럼 영원하실
어머니 얼굴 그리고 있다네. (어버이날에 씀)
첫댓글 ...안타가운 일이군요. 뭐라고 위로해드릴 말이 생각이 안 납니다. 저도 마음이 아픕니다. 빨리 회복되시어서 상석씨 바램처럼 꼭 고향에 다녀가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미자 친구 고마워요. 꼭 그렇게 되었으면.......
어떤 글이 위안이 되겠습니까?연로하신 로모님의 병상생활은 자식들의 눈물로 쾌차하신답니다. 지극정성이 감응하여 쾌차의 그 날만을 기대합니다.해송거사도 건강이 념려되는디.로모님까지 마음속의 이중고를 알고 도 남습니다.건강챙기소서.
친구 고생이 참 많네 .... 어머님께서 빨리 쾌차하시어 행복한 노후를 오래오래 보내시기를 기원하네
우상, 경남 친구 고맙네. 자네들도 건강 조심하소. 언제 한번 만나세.
이상길선배님을 통해 병환이 깊으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앞전 달에 향우님들 몇 분들과 병문안을 가기로 했었는데 저는 사정이 있어 늦는 통해 병원에 들르지 못하고 이상길선배님만 뵙고 왔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다시 병문안을 간다는 것이 또 한 달이 지나버렸네요. 부디 선배님 형제분들의 지극정성이 하늘에 닿아서 어서 쾌차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