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보 金致寶 (1906 ~ 1942)】 "대한민국 임시정부 아령총판부 부총판 "
1859년 5월 17일 평안남도 평양(平壤)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치보(金致甫)·김성준(金聖俊)·김감리(監理)를 사용하였다. 이중 김감리라는 이명으로 미루어보건대 평안도에서 금광업에 종사하며 금광 감리를 거친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경 러시아 원동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덕창국(德昌局)이라는 한약방을 개업하여 운영하였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소왕령(蘇王嶺))에도 지국을 두었는데, 덕창국은 연해주 한인 민족운동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1908년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조창호(趙昌鎬) 등과 상의하여 의병을 조직하기 위한 자금을 모금하며 민족운동에 투신하였다. 1909년 정재관(鄭在寬)·이강(李剛)·김성무(金成武) 등의 활동으로 성립된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연해주 한인의 교육활동에도 뛰어들어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계동학교 감독을 맡았으며, 한민여학교 등 여러 학교에 의연금을 납부하였다. 1909년 4월 연해주 청년들의 교육을 발달시키려는 목적으로 청년돈의회(靑年敦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다. 청년돈의회는 1909년 9월 10일 한국 황제의 만수절을 맞아 성대한 축하회를 개최하였으며, 1910년 4월 17에는 ‘안의사추도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10년 12월 28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안창호(安昌浩)가 러시아 한인들의 교화와 경제 향상을 도모할 목적으로 조직한 자선공제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1년 6월 조직된 ‘해삼위거류민회’의 평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해삼위거류민회’는 이후 ‘신한촌민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0년에 들어 국망이 현실로 다가온 상황에서 연해주 한인들은 ‘합병’의 무효를 선언하고 병탄 반대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8월 18일 이상설(李相卨)·유인석(柳仁錫) 등을 중심으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성명회의 명칭은 ‘성피지죄(聲彼之罪) 명아지원(明我之寃)(적의 악독함을 소리 높여 외치고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자)’에서 취하였다. 곧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명회는 병탄 반대와 무효를 선언하는 취지서를 발표하고, 각국 정부에 병탄조약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는 선언서를 발송하였다. 성명회 조직에 참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한 8,642명에 포함되었다. 성명회는 일본이 러시아에 강력히 항의하고, 주요 인물들의 체포와 인도를 요구하여 해산되었다. 또한 이상설·이범윤·김좌두(金左斗) 등 8명은 ‘항일운동의 괴수들’이라고 하여 붙잡혔고, 그 해 9월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로 유형을 당하였다. 이때 다행히 몸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열린 권업회(勸業會) 창립총회에서 통신부장에 선임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의 입지가 좁아졌다. 이에 한인들의 실업 권장, 노동 소개, 교육 보급 등을 위한 기관으로 설립된 권업회는 사실상 연해주 한인들의 항일투쟁을 조직하는 독립운동단체였다. 권업회에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각계 각층 중요 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또한 1912년 12월에는 최종면 등과 함께 신한촌에서 노인단을 조직하고, 그 기념으로 기금을 모금하여 권업신문에 후원하였다. 신한촌의 노인단은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조직된 대한노인동맹단의 기원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연해주 한인사회에도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연해주 각지에 한민회 또는 한민자치회가 조직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거류 한인 1만여 명의 대표기관으로 자임한 신한촌 한민회가 재건되었다. 또한 7월 21일에는 『권업신문』을 계승한 『한인신보』가 창간되었는데, 권업회 해산 이후 『한인신보』 발기회의 고문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실시된 신한촌 한민회 선거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전러시아 한인들의 자치기관 설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17년 5월 18일 ‘노령한인협회 발기회’가 조직되었는데, 최재형(崔在亨)·문창범(文昌範)·윤 니콜라이·김 야콥 등과 함께 의사원으로 참가하였다. 이에 따라 6월 17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제1회 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어 전로한족중앙총회가 결성되었다. 1919년 2월 25일 문창범·김하석(金河錫)·장기영(張基永)·김진(金震) 등과 함께 ‘전로국내조선인회의’ 소집을 발기하여, 전로한족중앙총회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확대·개편하였다. 대한국민의회 상설의회 의원 30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연해주 일대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운동 직후인 3월 26일 신한촌 덕창국에서 대한노인동맹단이 조직되었다. 이날 거행된 발회식에서 노인동맹단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홍범도(洪範圖)·유상돈(劉尙敦) 등 16명이 의사원으로 선출되었다. 5월 5일 노인동맹단은 이승교(李承喬)(이발, 이동휘의 부친)·윤여옥(尹餘玉)·김학영(金學永)·안태순(安泰純)·차대유(車大輶)·정치윤(鄭致允)·차부인 등 대표 7명을 선정하여 국내로 파견하였다. 5월 31일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오전 11시 보신각 앞에서 민중들에게 연설을 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 붙잡혔다. 이후 안태순·윤여옥·차대유는 징역형을 받았고, 이승교와 정치윤은 너무 노쇠하다고 하여 러시아로 추방당하였다. 6월 25일에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대표로서 20명의 연서를 받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在露領大韓國民老人同盟團謹瀝血禱衷干」이라는 제목의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다. 또한 단원 중에서 결사대를 모집하여 국내로 들여보내 만세운동을 확산시키려는 계획으로 강우규(姜宇奎)를 서울에 파견하였다. 강우규는 9월 2일 서울역 앞에서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탄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1920년 2월 신한촌의 인사들은 3·1독립선언기념회를 갖기로 하였는데,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재무부장에 선출되었다. 3월 1일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대한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으며, 여기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유수의 인물들이 초대되었다.
한편 1920년 2월 연해주 한인 유지 15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상무총회 설립을 발기하였다. 상무총회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의 상무 진흥을 도모하고, 독립운동에 이용하기 위해 『한인신보』를 기관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1920년 3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러시아 지역에 연통제를 실시하여 아령총판부와 재무관서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아령총판부의 총판 최재형에 이어 부총판으로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연해주 4월참변이 발발하여 아령총판부는 설치되지 못하였다.
연해주 4월참변은 1920년 4월 4일 밤 일본군이 기습적으로 연해주임시정부와 혁명군에 공격을 감행하여 수많은 한인 민족운동가들이 체포되고, 최재형·김이직(金利稷)·엄주필(嚴柱弼)·황경섭(黃景燮) 등이 일본군에게 피살된 사건이다. 연해주의 한인 민족운동가들은 다른 지방으로 피신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지만, 이미 60세가 넘어 신한촌에 남았다. 이때 덕창국 상점 주인으로 평범한 생활인의 태도를 취하였다. 일제는 신한촌민회 대신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창립 초기 조선인거류민회회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1921년 1월 23일 개최된 총회에서 의사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일제는 1921년 12월 일본의 문화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시베리아조선인교육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영업부원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일제는 한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조선 국내에 관광단을 파견하였다. 이에 대한 일환으로 1922년 4월 국내에 파견된 천도교청년회연예단에 해삼위천도교구장의 자격으로 고문으로서 합류하여 국내를 방문하였다. 국내를 순회 중이던 7월 14일 김광희(金光熙)·강도희(姜道熙)·김홍종(金弘鐘) 등과 함께 국내의 이종훈(李種薰)·홍병기(洪秉箕)·최동희(崔東曦)(최시형의 아들)를 만나 협의하여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2년 일본군의 연해주 철병 이후 일본의 비호 아래 있던 조선인거류민회는 해체되고 조영진(趙永鎭)·강양오(姜良五) 등은 친일 인사로 타도되었지만, 이때 타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에 천도교 대표로 참가한 신숙(申肅)이 창조파가 조직한 국민위원회에 참여하자 1924년 3월 1일 시베리아 천도교인들이 반대 성명서를 발표할 때 참여하였다.
이후 중국 닝안현(永安縣) 영고탑(寧古塔)에서 조직된 적기단의 조직원이었다는 일제의 정보 보고가 있지만, 적기단과 관련된 다른 기록에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이미 65세가 넘은 나이에 직접 활동에 참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중국 훈춘(琿春)으로 가서 살다가 1941년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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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보의 활동 내용에 대한 일제 정보 보고 문서(1920. 8. 29) [판형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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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1911. 12. 29)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