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곤(51) 선수는 휠체어 바퀴를 손으로 굴리며 기자의 접근을 피했다. “나는 많이 알려졌어요. 또 잊고 싶은 과거에 대해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요. 이제 다른 선수를 인터뷰하세요”라면서.
그는 서울·바르셀로나·애틀랜타·시드니 장애인올림픽에서 탁구금메달 4연패(連覇)를 기록한 인물이다. 오는 17일 개막하는 이번 아테네 장애인올림픽에도 쉰이 넘은 나이로 또 출전한다. 그래서 본인은 많이 유명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세간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80일째 마무리 합숙 훈련을 하는 곳도 서울 강동구 보훈병원 안에 있는 체육관이다. 휠체어를 탄 그는 압박붕대로 오른손과 라켓을 하나로 동여 감았다. 척수장애 1급인 그는 라켓을 움켜쥘 수 없기 때문이다.
“한여름에 운동을 해도 전신마비로 인해 땀이 나지 않아요. 열기가 땀으로 발산되지 못하니, 몸 안에서 불이 납니다. 입안이 다 터져요. 자원봉사자들이 스프레이로 찬물을 얼굴에 뿜어줘 열기를 식히곤 합니다. 시원하게 땀 흘리는 사람들이 정말 부럽지요.”
30년 전만 해도, 세상 사람들이 그의 젊음을 부러워했다. 그는 180㎝, 78㎏ 체구의 헌칠한 해병대원이었다. 그런데 야간 특수훈련을 수행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굴렀다. 목뼈가 부러져 있었다. 청년의 몸에서 살아남은 것은 머리뿐, 전신마비였다.
“병상에 누워 전역을 했지요. 전역이라는 게 국군통합병원에서 보훈병원 병상으로 옮겨진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엉겁결에 예전처럼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꼼짝 못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처럼 엉엉 울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죽고 싶을수록 더 집착하는 삶….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가 술 취해 돌아와서는 병실에서 난동을 피운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 저를 탁구라는 운동이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제 잘난 맛에 살지만, 저는 세상에서 가장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못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합니다.”
그는 6년간 병상에 누워있었다. 미국인 선교사로 와있던 모우숙(한국명)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뒤로도 그렇게 지냈을 것이다. 당시 그녀는 1주일에 두 번쯤 환자의 물리치료를 위해 보훈병원에 들렀다.
“병원 앞마당에서 삶의 의욕을 잃은 채 멍하게 앉아있는 제게 이분이 말을 걸어온 겁니다. 휠체어를 마련해 주고 탁구 라켓을 선물했습니다. 그런 뒤 강제로 휠체어를 끌고 병원 내 탁구장으로 데려갔어요. 그때는 탁구가 싫었습니다. 기력도 없고 온몸이 아팠으니까요. 이분이 병원에 오는 날이면 탁구를 안 치려고 숨고 도망다니기도 했어요. 그 뒤 이분은 미국으로 돌아가 양로원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탁구를 치면서 그는 팔과 허리를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잃어버린 신체 기능이 되살아난 것이다. 당시 상이군인들끼리 치르는 국내 시합에도 출전했다. 하지만 번번이 시합에서 졌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오기를 자극해 더욱 탁구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88장애인올림픽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해 금메달을 땄을 때, 우리 같은 삶에도 즐거움이 있을 수 있구나, 나도 전혀 몹쓸 인간이 아니구나 하는 상념에 눈물이 복받쳐 올랐어요. 탁구를 치면서 저는 제 자신을 장애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장애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돈을 많이 벌고 더 잘 살았겠지요. 하지만 제 주변의 비장애인들이 욕심에 의해, 혹은 근심 걱정에 의해, 잠 못 이루는 것을 보곤 합니다. 저는 그날 그날 살아있다는 것, 건강하게 깨어나 운동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생계를 위한 직장이 없다. 매달 보훈 연금 65만원과 올림픽 금메달연금 80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그에게는 초등학교 교사인 부인과 두 자녀가 있다. 그는 “사생활에 대해서는 쓰지 말아달라”고 했다. 오는 11일 그는 태극마크를 달고 아테네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