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2014.3.8(토) ~ 2014.3.9(일)까지 1박2일간 제23회 고분문화연구회 학술세미나 & 경주 신라왕릉을 서울대학교대학원, 서울여대대학원, 한신대학교대학원 한국사학과 교수 및 대학원생 총38명이 다녀왔습니다.
첫날은 제23회 고분문화연구회 발표로 경주 신당리 고분 발굴조사 성과와 남해 남치리 고분 발굴조사 성과 유적사례 발표가 있었으며, 이어 최병현(숭실대학교 명예교수)교수님의 '신라 마립간시기 왕릉군의 형성' 을 주제로 열띤 토론이 있었습니다.
둘째날은 경주 신라왕릉 중 대릉원, 국립경주박물관, 서악동고분군, 무열왕릉, 괘릉을 답사하였습니다. 혹시 못가보신 분들을 위하여 함께 하고자 사진을 올립니다. 자료는 쯔데히로시 짓고 고분문화연구회에서 옮긴『왕릉의 고고학』책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왕릉이란 무엇일까? 그 특징을 살펴 보면 첫째, 죽은 왕을 매장한 무덤. 둘째, 왕의 무덤으로서 특별히 쌓은 거대한 기념물. 셋째, 죽은 왕을 신격화해서 제사를 지내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고학에서 왕릉을 명확히 규명하고자 할 때 분구의 형태, 크기, 매장시설의 특징, 피장자의 성별, 사망 연령과 부장품의 특징 등을 조사하는 작업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피장자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경우는 드물며 무덤의 주인이 왕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는 정확히 판정할 수 없고 왕에 버금가는 권력자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정도입니다. 또한 그가 사회의 영웅적 지도자였는지 전제적 권력자였는지는 민중과의 관계에서 본 왕의 성격에 대해서는 고고학 자료만으로 판정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왕릉이란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영웅이나 권력자를 매장하고 제사지내는 거대한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릉은 고대국가 형성 과정의 어느 단계에서 출현하지만 그것이 국가 형성 과정의 어느 단계인지는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격화와 왕릉의 출현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접촉을 가진 지역 사이의 교류와 영향을 살펴 보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접촉하는 사회끼리의 교류와 영향 관계이며 그 과정에서 생겨난 문화 변용입니다. 다른 하나는 동시대이지만 교류가 없는 세계끼리 또는 시대가 달라 접촉이 없었던 세계끼리의 비교입니다.
중국 왕릉의 분구와 묘실 형식, 장송 의례 등이 주변 지역에 끼친 영향에 관해 본다면 남조 양나라에 신하의 예를 보이는 책봉관계에 있었던 백제 무령왕릉처럼 남조 왕릉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경우도 있었던 반면에, 삼국시대의 신라 왕릉처럼 중국의 직접적 영향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도 성립기에는 고대 중국의 사상적 영향은 부분적으로 받았으나 기본적으로는 야요이 시대의 전통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왕릉을 비교하는 또 하나의 시각은 교류 없는 세계의 왕릉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는 일입니다. 먼저 공통점을 살펴 보면 첫 번째, 기념물로서의 성격이 강한 거대 왕릉이 돌연 등장한 것은 국가 형성기 특히 그 초기 단계에 많다는 점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고왕국과 중왕국 시대 파라오의 무덤입니다. 중국에서는 국가 형성기에 속하는 은과 주의 오아들이 거대한 기념물을 지상에 남기고 지하 깊은 곳에 큰 묘실을 쌓고 장송 제사를 성대하게 실시했습니다. 시황릉은 여러 나라를 통합한 진제국의 성립을 내외에 과시한 기념물입니다.
이어 중국과의 접촉에 자극이 되어 주변 지역에서도 국가가 형성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왕릉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삼국시대의 한국, 고분시대의 일본, 티베트의 토번, 서하, 요 등 비한족의 왕권도 왕릉 제도를 받아들였습니다. 두 번째, 초기의 왕릉에 매장된 왕은 신으로 숭배되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이집트 제4왕조기의 파라오는 태양신 자체로 여겨졌습니다. 제5왕조기에 태양신 라의 신앙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파라오는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에 가까운 존재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세 번째 공통점은 초기 왕릉에는 순장과 희생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왕이 죽을 때 목숨을 강제적으로 빼앗는 점은 순장이나 희생 모두 같기 때문에 양자는 혼동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순장은 내세로 여행하는 왕을 위해 왕의 친족이나 가신에게 강제하는 행위이지만, 관에 묻히고 부장품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비해 희생은 장송 제사를 봉행하는 공물인 것입니다. 네 번째 공통점은 발전기의 왕릉이 권력 유지와 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왕으로서의 신성왕(神聖王)은 국가 형성의 초기 단계에 종종 엿보입니다. 그러나 신의 베일에 둘러싸인 신성 왕권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적인 권력으로 민중을 지배하는 왕권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여섯 번째는 국가 형성의 초기 단계에는 거대한 왕릉이 활발히 축조되었지만, 강력한 관료기구와 성문법을 가진 지배 제도로 정비된 단계의 국가가 되면 왕묘를 장대하게 만드는 것이 중시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계 각지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왕이 신격화되었을 때 왕릉이 만들어졌으며, 반대로 왕이 신이 될 수 없었던 경우에는 왕릉이 발달하지 않은 것입니다.
(봉황대 : 경주가 봉황새 지형이어서 알을 만들어 날아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실제는 배모양이라고 함)
(대릉원 : "미추왕은... 재위 23년 만에 돌아가니 대릉에 장사지냈다." 라는 삼국사기 기록에서 대릉원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대릉원에는 전미추왕릉, 황남대총, 천마총 등 23여 기의 능이 밀집해 있다.)
(천마총)
(천마도)
(천마총 : 적석목곽분)
(황남대총 : 화면을 바라볼 때 좌측이 남분(남자), 우측이 북분(여자))
(황남대총)
(황남대총)
(신라 무열왕릉)
(신라 무열왕릉 : 뒤에서 바라본 모습, 한송이라고 해서 무덤 뒤에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둘러 심는다)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서악동 고분군 : 추사 김정희가 처음으로 무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풍수지리에 입각해 무덤을 만들었다. 무열왕릉 뒤로 4개의 고분이 일직선상(무열왕릉의 마음(정통성)을 읽었을 것으로 보인다)에 있다.
경주 시내의 평지 고분군(대릉원)에서 외곽으로 퍼지기 시작, 서악동 고분군은 멀리서 바라볼 때는 하나의 고분이 좀더 안으로 걸어가자 위치에 따라 세개도 보이고 네개도 보인다. 이를 통해 시간이 공간에 심어지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시간을 읽어 내어 재구성되는 것을 생각하고 이에 더해 정치까지 읽어낼 수 있다 하겠다.)
(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
(괘릉 :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무덤)
(무인석 :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화표석)
무덤속의 피장자는 죽었지만 살아 움직인다! 어느 교수님의 말씀...
첫댓글 잘 봤습니다.
천마도 보러 경주 가야겠네요. 날짜 맞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