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락(盤樂) 三人三色 그남자의 음반 이야기
‘나그녀’의 오프더레코드 국악 김문성의 음반이야기
추모합니다. / 나그녀/ 경서도소리/ MY Collection / 4개의 소 꼭지로 나누고 약 2시간 넘게 사계축(용산 청파동 일대)의 기판(妓版)시조와 가사, 선소리타령, 서도민요, 종교(무속,불교)음악으로 세분하여 서울과 평안도 서쪽소리 ‘경서도 소리’를 들려주고 여기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 음반 쇼이다.
1998년~99년 사이 국악계는 ‘나그녀’ 소동으로 온통 시끄러웠다, 닉네임 ‘나그녀’로 인터넷에 무형문화재 보유자와 언론 지상에 오르내리는 국악 명인만 우대하는 국악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재야에 묻혀있는 국악명인, 사라져가는 국악인도 우대 해야 되고 알아야한다 하며 제도권 국악을 뒤집어 놓았고, 이를 계기로 국악계에 인터넷 실명제가 탄생 했다. 이 ‘나그녀’가 ‘김문성’이며 한국 고음반(古音盤) 수집가들 중 나이 어린 40대로 오늘 음반 쇼의 주인이다.
마을 앞으로 섬진강이 흐르는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금암리, 그의 고향 마을은 판소리 ‘이화중선’, 가야금 ‘정금례’ 명인의 고향으로 옛날에는 재인청이라 불러도 될 만큼 기생, 무당들이 많이 나온 마을이었고 어렸을 때는 술집도 많았다 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93세에 돌아가신 할머니 ‘심순애’ 여사는 늘 큰 소리로 우리소리를 흥얼거리셨고 이런 모습이 지겨웠던 김문성은 국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다.
할머니가 90세 되신 어느 날, 젊은 김문성에게 가슴에 담고 사셨던 ‘한(恨)’을 풀어 놓으셨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함경도 일대에서 건설현장 함바집을 하시다, 1945년 해방 이후 공산주의 좌익 활동가로 1948년 여순사건이 터지자 큰아들과 함께 총살 되셨고, 당신은 탈출 하셔서 ‘금암리’에 정착 하게 되었다. 전남 강진 병영 분인 외할아버지는 경찰 출신 우익으로 6.25가 터지자 쫒기는 생활을 하셨다. 좌. 우익 모두의 피해 당사자인 당신은 ‘한’으로 응어리져 살아온 세월을 말 할 수 없어 판소리로 녹여 내셨단다.
어느 여름날 파리채로 장단을 두드리며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진도 아리랑을 카랑카랑 한 목소리로 구성지게 부르시는 90대 ‘심순애’ 할머니의 영상이 한줄 설명보다 ‘한’ 서린 세월을 실감나게 전해 주었다.
이때 처음 국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직장생활 초년병으로 1996년 황학동 벼룩시장을 지나다 들려오는 ‘김옥심 명창(1925~1988)’ 정선아리랑에 심취하여 그 자리에서 그 음반을 산 것이 고음반 수집의 시작이고 ‘나그녀’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 막연히 김옥심 명창을 미친 듯이 찾아 다녔지만, 이미 돌아가신 이후였고,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이런 과정을 ‘묵계월’ 명창이 알게 되었고, ‘김옥심’ 명창의 인생을 찾아보라고 한정임, 장국심, 두 명인의 전화번호를 주셨단다. 이 길을 쫒아가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병마로 홀로 사투를 벌리다 88세에 쓸쓸하게 돌아가신 ‘한애순’ 명창 삶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 가슴에 담아 할머니의 ‘한’에 담긴 ‘국악’, 이 국악을 평생 품고 사랑하지만 국악계 현실에서 외면당하는 국악인들을 세상에 바로 알려보자 하고, 내가 ‘할머니 심순애’이고, 부평초처럼 떠돌다 사라져간 국악인들을 대변하는 ‘김옥심’ 명창이라는 뜻으로 ‘나 그녀’ 자신을 포장 하게 되었다 한다.
2014년 함께 세상을 떠나신 판소리 명창, ‘성우향’의 <춘향가>, ‘한애순’의 <심청가>, ‘박초선’의 <멍텅구리송>, 서도소리 명창 ‘이은관’의 <원포귀범>, 경기소리 명창 ‘묵계월’ <창부타령>, 이분들의 소리를 찾아 국악계에 점점 빠져들었기에 추모의 정이 더욱 깊다며 들려주었던, 한애순명창의 “ 판소리는 발꾸락 부터 정수리에 꽂혀 주저앉자 못 일어나게 해야 하는데, 요즘 것들은 궁둥이만 바쁘다(소리하다 각종 이유로 들락거린다)” 이야기가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유성기음반을 수집하면서 1700장까지는 숫자를 세어 보았지만 이후 그만두어 본인도 몇 장을 모았는지 알 수 없는 고음반 중에서 ‘국악방송’ 출연으로 골라 본 자신이 꼽은 최고 음반 10장, 박춘제 쪽판/ 해방이후 첫 애국가 음반/ 1960년 4,19시절 서울혁명가요집(민주전사)/ 김봉이 기생점고/ 장학선 아리랑/ 유성준 적벽가/ 김옥심 정선아리랑/ 등 그 이름도 처음 들어보고 사진으로 확인 할 수 있었던 설렘이 아직도 이어지는 것 같다.
1915년, 100년 전에 녹음된 유성기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이동백’ 명창의 <춘향가 어사또 박석고개 대목>은 최초의 음원 공개 현장 이었고, 1940년 ‘한애순’ 명창이 17세에 부른 단가 <뒷동산>, 일제 강점기 시조가사, 잡가 명창 ‘이비봉’의 <국문 뒤풀이>, 릴테잎에 실려 있는 판소리명창 ‘성금연’과 경기소리 ‘이은주’ 명창이 함께 부른 <풍년가와 쾌지나칭칭>, 일본어로 부른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1955년 경기소리 ‘베틀가’를 편곡 녹음한 중국 인민창편 <조선무고>,등 이자리가 아니었으면 듣기 어려웠을 귀한 소리들이 가슴을 뜨겁게 부풀어 올렸다.
김문성 아내로 결혼 후 가야금 연주자에서 이론가로 탈바꿈하며 손 놓았다, 13년 만에 연주한 최옥선류 ‘한윤정’의 가야금 산조, 내 귀를 의심 할 정도로 아름답고 깔끔했으며, 왜 25현금이 아니라 12현 가야금이어야 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여기에 김옥심 소리제를 복원하여 들려준 ‘이은경’명창의 경서도소리와 무대를 마무리하며 어깨 춤사위까지 곁들인 ‘김문성’의 서도 민요 한가락은 최고의 청량제 이었다.
이렇게 약 2시간이 지나갔지만 시간의 흐름을 의식 하지 못 했고, 끝났다는 것이 긴 아쉬움으로 남아 12월 10일(수), 악樂재在반盤중中반盤중中유有락樂 < 이준희의 음반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