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장사 마돈나>
내가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동구와 아버지의 갈등이었다.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동구를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적어도 내 눈에는 아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에 트렌스젠더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남자에서 여자로 성 전환한 사람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다. 뜻밖에도 그는 자신이 성 전환을 한 이유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은 본래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일 동구의 아버지가 이 다큐멘터리를 봤더라면 동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기준으로 현상을 판단한다. 이 기준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자기화된 기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은 틀린 것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아래의 상황에서 이 같은 오류를 살펴볼 수 있다.
지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앉아있다고 가정하자. 테이블 위에는 큰 상자가 놓여 있는데 이 상자의 한쪽 면은 빨간색이고 반대쪽 면은 흰색이다. 두 사람에게 상자의 단면만 보게 하고 상자를 치운 뒤 “상자는 무슨 색인가?”라고 질문한다면 빨간 면을 본 사람은 빨간색이라고 대답할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흰색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답은 오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번이라도 상대방의 위치에서 상자를 봤거나 다른 면은 다른 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자신의 답만이 정답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구의 아버지가 살아온 세상, 아버지가 인식하는 세상 안에서 동구는 그저 오답일 뿐이다. 동구아버지는 전직 권투선수이다. “가드 올리고, 상대방 주시하고” 이 말은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그는 가드만 올렸을 뿐 상대방을 주시하지 못했다. 동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동구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주시하지 못한 채 가드만 한껏 올려 동구와 자신 사이에 큰 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벽 너머에 다른 세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의 아버지가 단 한번이라도 했다면, 동구가 여자원피스를 입고 아버지 앞에서 이게 나라고 당당하게 밝혔을 때 아버지가 아들을 미친 듯이 두들겨 패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아버지에게 한참 얻어맞던 아들이 종국엔 아버지에게 덤벼들어 아버지를 내던져 버리는 파국으로 치닫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아버지가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자신이 틀림없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기준이 과연 정말 옳은 것인가 하고 묻고 싶은 것이다. 동구에게 있어서 여자가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체육복을 화장실에서 문 잠그고 혼자 갈아 입어야 하고, 짝사랑하는 일본어 남선생님에게 “저 멘스 시작했어요” 라고 말하고 서로 기뻐하는 꿈에서 깬 후 몽정을 한 자신의 팬티를 빨며 눈물을 흘리고, 친한 친구 집에서 치파오를 입고 만족해하며, 자신의 알몸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 젖꼭지에 밴드를 붙여가며 씨름연습을 해야 하는 동구에게 있어 자기 자신은 분명 여자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아버지가 자신의 자폐아 아들을 오물이 가득한 폐가에 가둬두고 가축을 사육하듯 일정한 간격으로 먹을 것만 갖다 준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었다. 긴 머리는 지저분하게 뒤엉켜 있었고 얼마나 오랫동안 안 씻었는지 아들의 몰골은 너무나도 더러웠으며 속옷조차 입지 않은 알몸상태였다. 프로그램 초반에 제작자, 그리고 나를 포함한 시청자들은 아버지가 아동학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란 사람이 저럴 수 있는가…….’한 때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냈었으며, 동네에서 아들을 향한 사랑이 지극한 아버지로 알려진 그는 제작진의 도움의 손길마저 뿌리친다. 나는 자기가 아들을 보살필 능력이 안되면 도움을 감사히 받아야지 왜 저러냐며 비난했다. 그러나 프로그램 중반부에 와서야 나는 “아~”하고 그 아버지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경제적인 문제와 오랫동안 장애인 아들을 돌보며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분열증을 얻었다는 부분 때문이었다. 역지사지라는 말은 상대편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보고 이해하라는 뜻이다. 이 아버지의 상황이나 처지를 알지 못하고 내 잣대로만 보면 나는 결코 그 아버지를 이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인간에, 친구간에, 가족간에 오해로 인해 다툰 경험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 입장에서, 내 사고 범위 안에서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판단의 잣대가 무엇인가에 따라, 분쟁을 불러올 수도 평화를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다.
내게는 한 일본인 친구가 있는데 한 때 그 친구와 친해지는 과정에서 내가 그 친구를 잘못 판단했던 적이 있었다. 보통 나는 친한 한국인 친구들과 밥을 먹을 때 내가 돈이 있으면 내가 내고, 없으면 친구가 내곤 했었다. 혹은 돈은 비슷하게 내더라도 내가 영화를 보여주고 친구가 밥을 사주고 하는 식이었다. 돈을 십 원 한 푼까지 똑같이 나눠서 내는 것은 인정머리 없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 일본인 친구와 나는 밥을 같이 먹을 기회가 많았는데 그 때마다 그는 매번 정확하게 금액의 절반을 나눠서 냈고 내가 내겠다고 해도 한사코 거절했다. 처음에 나는 ‘아, 이 친구가 나를 어렵게 여겨서 이러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르고 서로 가까워진 후에도 여전히 똑같이 반으로 나눠서 내는 것이었다.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고 너무 몰인정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상대방에게 불만이 있으면 직접 말하는 내 성격에 일본인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반으로 나눠서 내야 하느냐고 우리는 친구니까 경우에 따라 둘 중에 한 사람이 낼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그러자 그 친구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일본인들은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이러한 관례가 생겼는데 일본인들 사이에서 밥값 같은 것은 철저하게 반으로 나누는 것이 예의라고 그랬다. 나는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내 입장에서만 일본인 친구를 나쁘게 판단했던 것이다. 일본인 친구의 눈엔 나라는 사람이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사람으로 비춰졌을 것조차 모른 채…….
나는 경험론이니, 인식론이니, 존재론이니 하는 철학의 기본 개념들은 모른다. 이번 수업을 위해 몇 권의 철학입문서를 통해서 이런 것들에 대해 알고자 했지만 내 것이 되지는 못했다. 또한 워낙 철학에는 문외한이기에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며 줄줄 써 내려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나의 목소리는 이것이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불변이라고 믿는 잣대도 결국 완전한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상자의 반대편 색을 보지 못해서이든, 상대방의 처지를 몰라서 생긴 오해이든, 문화의 차이에 의한 것이든 정당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동구의 상황은 이와 다르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일 우리나라에 트랜스젠더의 수가 많고, 사회적인 통념이 트랜스젠더를 포용하고 있다면, 동구와 아버지 사이의 갈등이 생길 확률은 훨씬 적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한 발짝 물러서서 여유를 갖고 상대방의 입장과 예외의 경우를 고려해보며 문제를 판단하는 유연성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자료출처
장애인 아들을 방치한 아버지에 관한 스포츠칸의 기사문
http://cafe.naver.com/wonho007.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