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아낙네
(김성한)
허연 망사(網紗)옷을 걸쳐 입은 포도밭에는 노랫소리가 요란하다 .
“쿵 짝, 쿵 짝, 쿵 짜 자, 쿵 짝!……”경쾌한 리듬이다.
철사얼개 울타리를 시나브로 감아 오르던 보라색 나팔꽃이, 바람결에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어 댄다. 쿵 짝 트롯에 신이 난 아낙네처럼.
노래를 머금은 탐스런 포도송이가 오뉴월 축 늘어진 쇠불알 같다. 거봉포도는 뚝심으로 밀어붙이는 황소를, 머루포도는 천방지축 날뛰는 애 송아지를 닮았다.
‘컵에 담긴 물도 음악소리를 들으면 육각수로 변한다는데.’
애옥살이 우리네 삶에도, 맹물이 육각수로 바뀌는 마음 포실한 음률 하나쯤 있었으면.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맨 포도밭 안주인이, 송알송알 맺힌 포도송이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진다. 대도시에 공부하러 나간 자식들 얼굴이 포도송이에 알알이 박혀있으리라.
옛날시골 농부들은 소를 팔아 학자금을 마련했다지만, 이 댁은 포도가 자식농사자금인 셈이다.
이 태전 6월 중순, 들녘의 벼가 땅 맛을 알고 초록빛을 띨 때이다. 포도밭이 훤히 뵈는 고향 앞 냇가 다릿발 밑에서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렸다. 모두들 예순을 코앞에 둔 나이답지 않게 옷차림새가 요란하다. 분단장이 심한 어느 여자동창생이 손을 맞잡고 깔깔대며 웃는다. 눈 옆 잔주름이 어릴 때 본‘참새미골’밭고랑을 닮았다. 그녀도 세월은 피해 갈수 없나보다.
개똥장마 끝인지라 강기슭까지 차오른 냇물에 발을 담그는 이가 있는가하면, 아예 물싸움까지 벌이는 이도 있다. 그 옛날 여름 방학 이면 해종일 물장구치며 놀던 때가 떠오른다.
마을별로, 반(班)별로 ,끼리끼리 둘러앉아 사·오십년 전의 추억 캐기가 한창이다. “이 머슴아”에이어 “이 가시나”라는 말까지 나온다. 아무리 동심(童心)으로 필름을 되돌린다지만 이건 좀 심하다.
나와 어릴 때 한동네에서 자란‘순이’가, 이날 처음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지난 봄볕에 검게 그을린 며느리 얼굴형상에다, 수수한 옷차림새가 영판 시골아낙네모습이다. 그녀는 웃고 떠드는 친구 옆에서 다소곳이 앉아있다. 가끔씩 맞장구만 쳐줄 뿐 통 말이 없다. 초등학교 때에는 자그마한 체구에 반달형 눈썹이 무척이나 예쁘장스러웠다. 대구에 있는 모 여상을 졸업 하고, 재 넘어 농사짓는 총각과 결혼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만나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모임이 거지반 끝날 때 쯤,언제 한번 놀러오라는 얘기만 남기고는 혼자 돌아간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즈음, 정말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얘기로만 들었는데.
‘군청에서 좌회전하여, ㅇㅇ교를 건너서, 농로를 따라서……’라는, 해질 무렵의 낯선 시골길을 네비게이션(차량자동항법장치)이 잘도 안내한다. 시골정취 물씬 풍기는 하얀 대문 앞에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그녀 부부가 우리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집 앞 포도농장에는 포도상자가 수북하게 쌓여있다.
언젠가 시골길을 지나가면서 얼핏 본 포도공판장이 생각난다.
그곳에는 포도상자가 지천으로 쌓여있고, 경매인이 다섯 손가락을 폈다, 오므렸다 하는 곳이다.
오늘 이 댁 포도 창고 앞이 그 공판장을 닮았다. 다만 시동엔진 걸어놓은 화물차 몇 대가 경매인 목소리 같다. “부르릉, 부르릉”
때 마침 일요일이라 인물 훤한 아들·딸들도 하루일마무리에 정신이 없다. 사위로 보이는 믿음직한 청년의 얼굴에는, 말간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혀있다. 앙증맞은 세 살배기 외손녀도 일을 거든다고 뒤뚱뒤뚱 돌아다닌다.
“하야버지, 여기 ∼이 없어요.”
택배로 보내는 상자에 주소표지가 붙어 있지 않은 모양이다.
이윽고 화물차 운전수가 하루 막바지 인사를 하고는 휑하니 떠난다.
저녁노을이 서녘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잘 다듬어진 널따란 잔디밭 원두막에서 삼겹살 파티를 벌인다. 노릇노릇 잘 굽혀진 삼겹살이 연신 푹 꺼진 볼우물을 메운다. 소주잔 건네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늦가을 홍시 같은 불콰한 얼굴들에는 웃음꽃이 핀다. “한해수입이 얼마 됩니까?” 물음에, 수줍은 듯 “크게 많지 않아요, 한 장 정도 되는 걸요.” 한 장이라고. 억! 하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온다.
지난 초여름 동창회 때 모습이 되살아난다. 시골아낙네 차림이라고, 눈을 내리깔던 옆자리의‘ㅇ자'와 'ㅇ옥'이 얼굴도 함께 떠오른다. 번지르르하게 분칠한 얼굴에, 마구 떠들어대던 모습들이.
돌덩이가 듬성듬성 박혀있는 흙 담장 위에는 하얀 박꽃이 피어있다.
산마루턱에 걸려있는 상현달이 박꽃위에 살포시 내려앉아있다.
순박한 포도밭 아낙네‘순이’가 박꽃처럼 하얀 이빨을 내보이며 웃고 있다.
첫댓글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우리들 마음은 언제나 고향의 훈훈한 인심과 추억에 있나 봅니다.국장님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