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츠 23회
여직원이 궁금한지 물었지만 그는 대답 대신 포장을 뜯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다. 천천히 그는 포장지를 뜯은 후 박스를 잠시 보더니 박스를 갈무리
한 테이프를 뜯는다. 그리고 뚜껑을 연다. 그 안에는 셔츠 다섯 장이 들어 있었다. 그는
사무실 직원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꺼내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주변의 시선이 따갑게 느
껴진다.
“어! 선물인데,”
그는 얼떨결에 대충 대답을 하고 상자를 들고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자신의 차 문을 열고
뒷자리에 앉아서 다시 뚜껑을 열고 셔츠를 꺼내기 시작했다. 셔츠 석 장을 꺼냈을 때 그 안
에 작은 메모지가 들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가슴이 멈칫하는 기분이다. 왜 그
녀는 셔츠를 한꺼번에 다섯 장을 보냈을까. 그는 선뜻 메모지를 들지 못하고 생각을 한다.
그녀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집에 셔츠가 열 한 장인가 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아직
까지 그에게 매 달 한 장씩 보내온 것이 여섯 번. 그러니까 오늘 보낸 다섯 장의 셔츠는 그녀
의 집에 있었던 셔츠의 모두인 것이다. 그런 계산을 한 그는 긴장한 모습으로 메모지를 들어
서 편다. 메모지는 네 번이나 깔끔하게 접혀 있었다. 노란 색으로
‘선생님,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저는 아름다운 추억을 담게 되었습니다. 늘 건강하
시고 좋은 인연 만나서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그는 그 글을 몇 번이나 되읽는다. 읽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판단이 앞선다. 지난 달 만났을 때에도 그는 전혀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
다. 아니 그녀의 행동이나 말에서 그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없었고, 그녀는 그에게 그렇
게 행동을 했던 것이다. 예전 같이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는 메모지를 다시 박스 안에 넣어놓고
운전석으로 돌아가서 시동을 켜며 핸드폰 홀더를 열어 사무실로 전화를 한다. ‘나 지금 갑자기
바쁜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올 텐데, 혹 일이 늦어지게 되면 그냥 퇴근할 테니 그렇게 알라’
고 말하고는 끊는다. 시동을 켠다. 차는 그의 지시에 충실하게 시동을 걸려준다. 기어를 드라이
브에 넣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차는 그의 바라는 대로 부드럽게 전진하기 시작한다.
식당 문은 아직 열려있지 않았다. 하긴 그 시간에 열 식당은 아니다. 식사 보다는 술을 중심으
로 장사하는 식당이니 아직은 조금 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는 차를 식당 앞에 두고 걸어서 백
화점으로 간다. 하지만 백화점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별 생각이 다 그의 뇌리를 감
싸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그 곳을 그만 두었다면’ ‘만일 그녀가 그를 보고 못 본 채 한다면’ 하는 생각이 그
로 하여금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 것이다. 걸음을 돌린다. 아무래도 확실한
것은 식당의 언니라는 여자에게서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는 되 돌아와 식당이
보이는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커피 하나를 사서 편의점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린다. 식당 문
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렸다. 반대편 신호등 앞에 그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출근하는 것이다.
손에는 시장을 들러서 오는 것인지 검은 비닐 봉투 몇 개가 들려있다. 그는 일어서서 신호등 앞에
가서 기다렸다가 신호가 바뀌자 곧 뜀걸음으로 가서 여자에게서 검은 비닐 봉투를 빼앗듯 받아
든다. 여자가 놀란다. 하지만 가게 문을 열 때 까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게 문을 열자
곧 그는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다. 여자는 비닐 봉투의 내용물을 주방으로 가져가더니 손질을
시작한다. 하나하나 손질을 해서 냉장고에 넣는 동안 그는 담배만 피우며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