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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暗殺者
이 어 령
살얼음이 깔려 있었다. 그들이 논바닥을 지나갈 때 유리 조각이 바스라지는 것 같은 발소리가 들렸다. 이젠 짖어대던 동네 개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발소리, 살얼음이 바스러지는 그 발소리뿐이었다. 그들은 30분 동안이나 어둠 속을 걸어왔다.
“어느 쪽이냐?”
엽총을 걸머진 청년이 소년을 향해서 물었다. 그들은 논바닥을 지나 산모퉁이의 갈림길로 나선 것이었다. 소년은 그 길에 들어서자 걸음을 멈추고 입을 꽉 다문 채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수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이야, 빨리 앞장을 서서 걸어라.”
이번에는 가죽잠바를 입은 청년이 재촉했다. 소년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들자 갑자기 헛소리를 하듯 커다란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오른쪽예요. 그래요, 오른쪽 길이란 말씀예요. 그 길로 가면 호수가 나타나요. 하지만 별장은 호수의 왼켠쪽 언덕에 있어요 감나무가 하나 있구, 집은 두 채에요. 감나무가 있는 쪽이 김장군이 와 있는 곳이구, 그리구 거기에서…… 그리구 거기에서 말이죠. 저의 집이…….”
엽총을 멘 청년이 그 소년의 입을 틀어막았다.
“알았다니까ㅡㅡ목소리가 너무 크다.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나. 넌 묻는 말에만 대답하란 말야.”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들을 치켜다보고 있는 소년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난 몰라요. 난 아무것도 안했단 말예요. 길만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이따금 엽총의 검은 총신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숲길로 들어서자 이젠 가랑잎 소리가 들렸다.
“넌 약속대로 서울에 가서 살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학교도 다니구. 그렇지만 일이 안되면 넌 죽게 된다. 너의 어머니까지 말야.”
“어머니가 죽는다구요?”
“김장군이 살아 있게 되면 말이다.”
가죽 잠바를 입은 청년은 별장지기 소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겁먹을 거 없다. 난 너만한 나이에 중국에서 혼자 이런 일을 했단 말야.”
그들이 산등성이를 넘자 바람이 불어 왔다. 엽총을 멘 청년은 총대의 멜빵을 바꿔 메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둠 속 한구석이 터지면서 희끄무레한 호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죽 잠바를 입은 청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떨고 서 있는 소년의 얼굴을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어린애를 끌어들인 게 난 아무래도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귀엣말로 엽총을 멘 청년에게 말했다. 그러나 상대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죽 잠바는 다시 호수 쪽을 바라보면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성냥 가진 것 없어?”
호주머니를 더듬어대다 그는 성냥을 달라고 했다. 엽총을 멘 청년은 라이터를 켜며 말했다.
“자네는 초조한 모양이군, 벌써 지금이 열 대째란 말야.”
담뱃불이 반딧불처럼 호숫가의 숲 사이에 명멸해 가면서 호수의 북쪽편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동안 침북이 또 계속되었다.
“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고 하지 않았어.”
엽층을 멘 청년은 소년을 향해 짜증을 냈다.
“곧이에요. 보세요, 저 언덕이란 말예요 난 내 방으로 그냥 들어가겠어요.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하지 않겠어요.”
가죽 잠바는 소년이 손가락질하는 언덕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숲에 둘러싸인 양관의 지붕이 한층 검은 빛을 띠고 그 윤곽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넌 서울로 가게 된다고 했지. 우린 약속을 지킨다. 네가 서울로 보내달라고 말하지 않았니?”
가죽 잠바는 다시 소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당신네들은 장군이 언제 내려오는지 그것만 알려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난 뭐가 뭔지 몰랐단 말예요. 어머니는 아직 내가 당신들한테 그 돈을 받은 것도 모르시구 있구요. 그걸 알면 야단이 날 거예요.”
소년은 엽총의 검은 총신을 보며 헛소릴 하듯이 말했다.
“묻는 말에나 답변하라고 하지 않았어! 말소리가 너무 크다.”
가죽 잠바가 앞섰다.
“따라 와, 이젠 네가 우리 뒤를 따라오는 거야. 그러구 넌 별장 개를 끌어내는 거다. 밖에 끌어내다가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구 그놈을 처치해야 한다.”
별장지기 소년은 그 자리에 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우리집 개를요? 나보구 그걸?”
“그게 네가 맡은 일이야. 우리들 가운데 개가 보고도 짖지 않을 사람은 너밖에 없지. 그러니까 그놈을 죽일 사람은 너밖에 없단 말이다.”
“난…… 난 못하겠어요. 그건 내가 기른 개예요. 꼬리를 치고 달려오는 그 개를 내가 어떻게 죽일 수 있어요?”
엽총을 멘 청년은 별장지기 소년에게 총대를 들이댔다.
“실수하면 너도 너의 어머니도 다 죽게 된다고 하지 않았나. 난 잔소리를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말을 자꾸 시키지 마라.”
그들은 언덕을 향해 걸었다. 이번에는 발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숨소리만이, 가랑잎이 바람결에 서걱거리는 것 같은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소년을 떼어놓은 채 그들은 별장의 뒤꼍으로 돌아갔다.
“그놈이 해치울 수 있을까?”
가죽 잠바는 낙엽 위에 주저앉아 별장을 굽어보며 말했다. 양관, 감나무잎 사이로 비치는 별장의 창문 하나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개에 싸인 것 같은 희끄무레한 공간이 별장 아래로 깔려 있다. 그것은 호수일 것이었다. 그쪽으로 개를 끌고 기어가는 소년의 검은 그림자를 그들은 볼 수 있었다.
가죽 잠˙바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가지고 엄지 손가락에 탁탁 치면서 귀엣말로 말했다.
“정말 그놈은 개를 죽일 수 있을까?”
“웬일이야 자넨 초조한 모양이군. 상해 바닥에서 굴렀다는 말도 다 거짓말이었군 그래.”
엽총을 멘 청년은 라이터를 꺼내며 비웃었다.
“소년을 끌어들인 것이 아무래도 잘못이었단 말야. 그리구 난 호수나 강물을 보면 이상한 충동을 느낀단 말야.”
엽총을 멘 청년은 그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명령주로 이렇게 말했다.
“저 불빛이 꺼질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기로 하자.”
가죽 잠바는 담배를 피우면서 그 가랑잎 위에 누웠다.
별들이 엉성하게 돋아 있는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했다.
“호수가 자꾸 신경을 곤두세운단 말야. 자넨 어떻게 하다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나? 난 말야, 우연한 기회에, 그래, 정말 우연한 기회에 사람을 찌르기 시작했던 거다.”
가죽 잠바는 호주머니에서 재크나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접었다 펐다 하면서 엽총 쪽은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그리고 담뱃재를 털지도 않으면서 혼잣말처럼 지껄여댔다.
“꼭 이런 호숫가였어. 실은 그때 그건 강변이었지만 난 저 별장지기 애만했을까? 중학교 4학년 때였으니까. 일본 애들은 날 못살게 굴었다. 콤파스 끝으로 찌르기도 하구 내 책가방을 찢기도 하구…….”
엽총을 멘 청년은 별장의 불빛만 지켜보고 있었다. 호수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덜 떨어진 참나무의 마른 잎들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발자국 소리 같았지만 그들은 놀라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난 그날 미우라라고 하는 덩치 큰 일본애 하나와 맞상대를 붙었어. 우린 학교를 파하자 강가로 갔었다. 물론 힘이 딸려서 난 매를 맞았지. 코피가 터졌어. 그 피를 보자, 모래 사장에 핏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자, 난 그만 정신을 잃고 창칼을 꺼냈다. 칼을 꺼내 가지고 그놈의 가슴에다 대고 찌르려고 했어. 난 정말 찌르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미우라는 칼을 보자 갑자기 놀라더니 이상한 웃음을 웃더군. 이상한 웃음, 자네도 그런 웃음을 본 적이 많겠지. 놀라면서도, 공포에 떨면서도 핼쓱하게 웃는 입술말야. 미우라는 그 입가에 애원하듯이 그리고 비굴한 그리고 멋적은 그 미소를 띠면서 넌…… 넌…… 정말 날 찌를래…… 이봐 칼을 치워…… 이렇게 빈다니까, 잘못했다니까. 그앤 모래 위에 무릎을 꿇으면서 애원하더군. 그때의 미소가 이상하게 날 미치게 만들었던 거야. 무언지 난 지금도 설명할 수 없어. 정신없이 그 미소를 향해 찌른거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애는 강바닥에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단 말야. 퍼런 강물이 물귀신처럼 날 떨리게 하더군. 난 도망쳤지. 형사들이 쫓아다녀서 결국 만주로 뛰고…… 상해까지 뛴 거야.”
엽총을 멘 청년은 별장의 불빛을 지켜보다가 가죽 잠바를 잡아일으켰다.
“자넨 오늘 이상스럽게 들떠 있군…… 말이 많아……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게 된단 말야.”
가죽 잠바는 담뱃불을 손가락으로 비벼 끄면서 헛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실수…… 내가 실수할 것 같은가?”
재크나이프의 날을 펴면서 그는 말했다.
“오늘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수하지 않을 테니까 두고 봐. 사실 난 한번도 실수한 적이 없어. 수십 명을 찌르구 찌르구 또 찌르구…… 무수한 사람을 죽였지. 그런데 너나 할 것 없이 칼을 들이대면 그때 미우라처럼 이상한 미소를 짓더란 말일세…… 자네도 봤지. 죽음의 순간까지두, 애원하면서 혹시나 혹시나 하고 아첨하듯 웃는 그 미소말일세. 난 그 미소를 향해서 수없이 찔렀단 말야. 아냐, 그 미소를 생각할 때마다, 난 또 하나의 사람을 찾아야 했던 거야. 내가 그들을 죽였는데도 어쩐지, 꼭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 미소를 생각하면 말야. 그들은 살려달라고 했다. 내게 동정을 청했다. 칼이 심장을 뚫기 직전까지도 내가 자기를 찌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을 위해서 그들은 웃었다. 그런데 난 그들을 찔렀거든. 일본 헌병, 첩보원의 앞잡이들, 꾸리, 인력거꾼…… 지령만 내리면 누구든 난 죽였어. 그런데 예외없이 미우라처럼 그들은 놀람과 애원과 아첨과 비굴과 절망과 그런 것이 뒤범벅이 된 미소를 지으며 죽어갔지. 한놈도 덤벼들거나 증오든 분노든 그런 표정을 짓고 칼을 받는 친구는 없었던 거야.”
엽총을 멘 청년은 일어섰다.
“자넨 오늘밤 실수할 것 같군. 나 혼자 해치우고 오겠네.”
가죽 잠바는 벌떡 일어나면서 엽총을 잡았다.
“안돼,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꼭 해치운단 말야.”
엽총을 쥔 손을 뿌리치면서 그는 잠바를 입은 청년에게 나직한 그러나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이번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기회인지를 알고 있겠지. 이번에도 실패를 하면 우리 당은 끝장이 나는 거야. 난 긴 말을 좋아하지 않네. 이번의 결정적인 찬스를 자네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단 말야. 내 말을 들어 봐. 우리 편은 세 번 다 실패했어. 저쪽에서도 두 번 실패를 했고. 누가 먼저 상대편 당수를 암살하느냐에 따라 대세가 판가름되는 걸 자네도 알고 있잖아. 해방 직후의 이 혼란만 지나가면 앞으로 암살은 영영 못하게 된단 말야. 군중대회 때 한 번, 그의 사택에서 한 번, 또 자동차의 폭발물 투척이 한번…… 세 번이나 다 실패를 했어. 그들은 경계를 하고 있구, 김장군은 알다시피 토치카 같은 사람이야. 그런데 이런 호젓한 기회가 두번 다시 올 것 같은가…….”
가죽 잠바는 그를 억지로 그 자리에 앉혔다.
“내 말을 좀 들어봐!”
그는 엽총을 멘 청년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난 해치울 수 있단 말야. 미우라란 놈처럼 그런 미소를 짓지 않고 죽을 사람은 김장군밖에 없을 거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구. 오랫동안 별러 왔지. 싸움터에서 자란 담대한 김장군만은 그 공허한 미소를 짓지 않고 내 칼을 받을 거다.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난 그것을 원하고 있었어. 그게 오늘밤 이루어지는 거다.”
“자네의 이야기는 꼭 정신착란증 환자의 말 같단 말야. 자넬 믿을 수가 없어.”
그러나 가죽 잠바는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라구. 자네도 경험했을 거라고 하지 않아. 사람이 산 속에서 늑대를 만났다고 해봐. 늑대가 덤벼들 때에도 그들은 그런 미소를 지을까?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에만 그런 애원의 미소가 생기는 거야. 아무리 급할 때에라도 사람은 사람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웃는 거지. 무슨 여지가 있을 거라구. 그래 그 인간적인 여지를 찾아 그들은 구명의 웃음을 짓는 거지.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피살자는 언제나 자기를 죽이는 암살자를 믿어가며 죽어가는 거란 말야. 난 그게 싫어. 인간적인 여자를 믿는 그들이 싫어. 난 냉혹하다. 그래서 냉혹하게 죽어가는 놈을 원한단 말야. 김장군은 그렇게 죽을 거구, 그러면 난 더 살인을 하지 않게 돼……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그때 호숫가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허파에서 슈우 하고 바람이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소리였다. 가죽 잠바는 엽총을 멘 청년의 손을 끌었다. 소년이 꼬리를 치며 따라 온 그 개를 죽여버린 것 같다고 말하면서, 불빛이 꺼지기를 기다릴 것 없이 지금 해치우자고 말했던 것이다.
“지금!”
“그래 지금 해치워. 불이 켜져 있어야 해! 칼을 받을 때의 김장군 얼굴을 봐야 해, 냉엄한 장군! 피가 없는 사람처럼 싸늘한 표정을 짓고 죽어가는 김장군을 나는 봐야겠다.”
그들은 감나무를 타고 뒤뜰로 내려섰다. 흘러나오는 불빛을 향해서 한 걸음 다가섰다.
“총소릴 내지 말게, 소리 없는 밤이니까…….”
가죽 잠바는 재크나이프를 폈다. 가까이 가자 창틈에서 불빛과 그리고 사람 소리가 흘러 나왔다.
“편하게 살 때가 온대두. 이봐, 미스 신보다 내 쪽이 더 위험하대두 그래요. 내 목을 노리는 살인자가 득실거리는 판에 이렇게 홀몸으로 몰래 빠져나와서 밀회를 한다는 건 모험이오. 정권을 잡을 때까지만…… 약속하겠소.”
여인의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방탕한 게 아니라니까. 미스 신이 환영대회 때 꽃다발을 가지고 단상에 올라선 그 순간 난 인생관까지 변해 버렸다고 하지 않았소. 만주 벌판에서 난 승냥이 떼처럼 수십 년을 지냈거든. 난 누구도 사람을 사랑하진 않았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단 말야. 소아마비에 걸린 사람을 봐서 알겠지. 다른 육체는 다 건강하게 자랐는데두 소아마비에 걸린 그 발만은 옛날 어렸을 때 그대로란 말이오. 꼭 그래…… 내가 그렇단 말이오. 어렸을 때 난 그 사랑을 이 땅에 두고 떠났던 거요. 내 사랑은 그 뒤에 더 자라지 않았소. 이제 첫사랑이나 다름이 없단 말이오. 이제서야 사랑이란 걸 알 것 같애. 처음으로 느끼는 애정이오.”
옷을 벗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흐느낌 소리는 잦아들어가고 있었다.
“이 겨울만 이런 대로 넘기면…….”
이불이 펼쳐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스 신만 괴로운 게 아니오! 살인자들이 우글거리는 판국에 밀회를 한다는 건 위험한 일이지. 불을 끌까?”
가죽 잠바는 불을 끄자는 말을 듣자, 창문을 걷어차고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위험한 일입니다, 장군님! 살인자가 득실거리는데 밀회를 한다는 건 말입니다.”
장군과 여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릴 지르려고 했다.
“난 소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엽총을 멘 청년이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알몸뚱이로 일어선 그들은 그제야 이불로 몸을 감추며 방구석으로 피신을 했다. 가죽 잠바의 청년은 재크나이프를 겨누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장군은 이미 늙은 몸이었다. 병든 노마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늑골과 뱃가죽이 등불의 음영 때문에 한결 더 굴곡이 심하게 나타났다.
“이놈들!”
김장군은 간신히 체통을 차리면서 쏘아보았다.
“도둑이야.”
여인이 소리를 치면서 창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와 동시에 가죽 잠바의 재크나이프가 번쩍이었다. 단 한칼에 급소를 맞은 여인은 피를 쏟으면서 하얀 요 위에 쓰러졌다.
가죽 잠바는 표정없는 얼굴로 여인의 시체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아직 앳된 단발머리의 소녀, 학생 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소녀였다.
가죽 잠바는 다시 이불로 몸을 가리고 웅크린 장군 쪽을 향해 재크나이프를 돌렸다. 여인이 죽는 것을 보자 갑자기 김장군은 풀이 꺾이는 것 같았다.
“자네들! 용건이 뭔가?”
두 손으로 하체를 가린 이불을 들쳐쥐고 김장군은 어색하게 말했다.
“안심하십쇼., 좀도둑은 아닙니다.”
재크나이프를 쥔 가죽 잠바가 한 걸음 다가섰다.
“뭘 원하는가?”
김장군의 얼굴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장군의 긍지입니다. 비겁하게 굴지 마십시오.”
김장군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보게 청년들. 난 사실 정치에서 손을 떼고 싶소. 나도 이제 조용히 쉬고 싶소 은퇴할 작정이었단 말이오. 난국만 수습하고 정부가 들어서면…….”
가죽 잠바는 다시 한 걸음 다가섰다. 김장군도 이불을 움켜쥔 채 하체를 가리고 벽 쪽으로 물러섰다.
“장군답게 구십시오. 이 땅을 떠나셔야 합니다.”
김장군은 자기 나체를 감추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이불을 추켜 올렸다.
“나보고 떠나라고…… 어디로 떠나란 말인가? 나 때문에 정치가 안된다면 떠나지.”
가죽 잠바는 한 걸음 또 다가섰다.
“태양이 두 개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영원히, 영원히 돌아오시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히라구.”
“네! 영원히, 지금 가셔야 합니다.”
가죽 잠바는 장군의 왼쪽 가슴에 재크나이프를 갖다댔다. 순간 장군의 입술에는 이상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청년! 동지. 설마 날 죽이지는 않겠지. 난 이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쳐 싸운 사람이오. 그리구 난 떠날 테니까. 난 떠난단 말일세.”
“영원히 떠나셔야 합니다.”
“이 사람아, 잠깐만…….”
장군은 떨리는 두 손으로 황급히 칼을 막으려 하면서 애원하듯이 멋적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순간 재크나이프가 직선을 그으며 번쩍했다.
“늙은이의 몸에서 이 많은 피가 흐르다니.”
가죽 잠바는 아무 말없이 밖으로 나왔다. 엽총을 멘 청년이 그 뒤를 따라오면서 또 한 번 나직한 소리를 내고 웃었다.
호수로 가는 길목에서 소년은 기다리고 있었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그 소년의 발 밑에는 목에 새끼가 감기고 혓바닥을 늘어뜨린 셰퍼드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잘했다. 넌 서울로 갈 거다.”
가죽 잠바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엽총을 멘 청년은 소년에게 앞서라고 했다.
“아니! 또 어딜 가요? 길은 아시잖아요?”
엽총을 멘 청년은 호수 가까이까지만 가자고 했다. 그들은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가랑잎 소리가 울려왔다. 언덕을 내려서자, 물비린내가 풍겨왔다. 희끄무레하던 호면(湖面)이 훨씬 더 희게 번뜩이는 것 같았다. 새벽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호숫가에 이르자 인사를 했다. 그러나 엽총을 멘 청년은 돌아서려는 소년을 그 자리에 불러 세웠다.
“벌써 호수가에 왔구나. 널 서울로 데려가야겠다.”
“아저씨들? 왜 이러세요.”
가죽 잠바는 웃었다.
“지금! 지금 서울로 가자.”
“어머니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는데요.”
가죽 잠바는 재크나이프를 꺼냈다. 소년은 두어 걸음 물러서면서 다시 또 와들와들 떨었다.
“날 어떻게 하시려는 거예요? 날 죽이려는 거예요? 난 아무 잘못도 없어요.”
“그래, 넌 아무 잘못도 없다. 하지만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 탈이다.”
“김장군을 죽이지 못했나요? 왜 날 죽이려고 해요.”
엽총을 멘 청년은 주저앉은 소년을 일으켰다.
“넌 말이 많다.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고 하지 않던.”
“살려 주세요, 받은 돈을 다 내드릴게요. 말하지 않을게요. 서울에 안 가도 좋아요. 아저씨 살려 주세요.”
눈물이 번진 얼굴이었지만 소년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애원했다. 다시 재크나이프가 그 미소를 찔렀다. 호수에서 철렁하는 물소리가 울려왔다. 호수는 아직 얼지 않았다. 새벽의 호수는 눈을 뜨고 있었다. 소년이 쓰러진 호수로 가죽 잠바는 재크나이프를 던졌다.
“끝났어! 난 다시 칼을 만지지 않겠네.”
가죽 잠바는 담배 한 대를 꺼내어 엄지손가락 위에다 탁탁 쳤다.
“라이터 있지?”
그러나 엽총을 든 청년은 라이터를 꺼내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그래 끝난 거야, 이제 자네 차례니까.”
가죽 잠바는 섬찟 놀란 표정을 하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 입에 문 담배가 떨어졌다.
“자네 말마따나 우리에겐 잘못이 없지만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게 탈이었네. 나도 며칠 안 남았겠지만.”
“그렇게 지령을 받았었나?”
“물론이지, 각하는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의 수가 하나라도 적은 것을 원하고 계시니까. 당은 자네의 손을 믿을 순 있지만 입은 믿을 수가 없다는 걸세.”
“자넨 처음부터 날 이 호숫가에서 죽일 게획이었나?”
“그렇지. 소년과 자네는 격투를 하다가 익사한 것처럼 꾸며놔야 뒤가 깨끗해질 테니까.”
“줄곧…… 줄곧 너는 그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며 나와 같이 걷고 있었군.”
총을 멘 청년은 엽총을 내렸다. 그것을 보자 가죽 잠바는 공허하게 웃었다.
“아! 이젠 내 차롄가? 그러나 자네, 난 애원하는 미소는 짓지 않겠네. 난 인간을 믿지 않으니까, 쓸데없는 일이란 걸 아니까…… 산 속을 걷다가 늑대를 만난 것처럼 그렇게 혼자서 죽어갈 걸세…… 혼자 살아왔으니까 말야.”
청년은 엽총을 그의 가슴에 겨누고 방아쇠를 잡아 당기려고 했다.
“서툰 짓이군. 자넨 암살자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어. 소리내지 말게. 암살은 조용히 다가서서 소리없이 해치우는 걸세.”
가죽 잠바를 입은 청년은 잠바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다보며 말했다. 엽총의 개머리판이 허공을 쳤다. 호수는 다시 한번 출렁이었다. 텀벙 소릴 내고 새벽의 호수는 출렁거렸다.
가죽 잠바를 입은 청년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목숨을 애걸하는 그런 웃음이었는지 혹은 진짜로 우스워서 웃는 웃음이었는지 엽총을 멘 청년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며칠만 있으면 호수는 얼 것이었다. 논바닥을 지나갈 때 유리조각이 바스러지는 것 같은 발소리가 들렸다.
엽총을 멘 청년은 혼자서 걷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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