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디'는 '나병 환자'의 뜻이 아니라 '문(글월 문)과 덕(큰 덕) 즉, 학식과 덕을 고루 갖춘 사람'이란 뜻으로 ...
(참고 : 옛날에 딸 아이를 낳으면 순하라고 '순할 순, 큰 덕 즉, '순덕'이란 이름을 많이 지어 주었다. '순덕'이를 경상도에서는 지역에 따라 '순둥이' 또는 '순디'로도 부른다. '문덕'이도 마찬가지로 '문둥이',
'문디'로 부른다)
나는 '문디'가 '나병환자'라는 뜻이 아니라 '문덕(글월 문, 큰 덕)이란 뜻으로 배웠다. 이 말이 1맞다면 '문디'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친구끼리(경상도에서), 자주 '문디'란 말을 많이 쓴다. '야, 문디야, 우째사노?' 등등. 친한 친구한테서 '문디'라는 말을 들으면 다정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 말이 원래 이런 뜻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아래와 같은 주장도 있다
서울의 한 정승이 따뜻한 봄날이 되어 전국으로 외유를 나왔습니다.
경상북도 상주를 지나 안동에 들어왔는데,
들판에 누런 보리가 포근한 봄바람에 물결치고
보리밭 사이의 논두렁으로 서당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 예쁜 바지저고리의 깃을 팔랑팔랑 나부끼며, 뒤로 묶은 머리는 좌우로 흔들리고 -
손에 책을 들고 천자문을 외우면서 콩닥콩닥 뛰어가는 그림같은 모습을 보고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아 저 보리밭 사이의 문동(文童)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구나!"
영남의 정치적 소외와 유소(儒疏), 그리고 문동(文童)
다음은 문둥이의 연원에 대해 알아보자.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문둥이는 문동(文童)이라는 말이 시기를 내려오면서 바뀐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문동이라는 말은 조선후기 정치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영남지역은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칭해질 정도로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와 정치가를 배출하였다. 숙종 초반까지만 해도 영남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숙종 연간의 당쟁에서 기호지역에 기반한 남인이 정치적으로 실각하고 서인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영남 남인은 고립무원의 재야세력으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영조 연간에 일부 소론과 함께 영남 남인이 무신란(戊申亂)을 주도하였다. 무신란은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가지고 일으킨 것이었다. 당시 국왕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패배로 끝났고, 그 결과 영남 남인은 정치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정치적으로 실각한 영남 남인들은 중앙 정계에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수단으로 집단으로 상소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른바 유소(儒疏)가 그것이었다. 조선은 사림을 기반으로 한 국가였다. 조선 사회에서 사림이란 명칭은 최고의 영예였다. 그들의 여론인 사론(士論)은 국가의 공론(公論)을 대표했고, 그들의 기상인 사기(士氣)는 곧 국가, 국민의 원기(元氣)로서 적극 배양해 주고 권장해 주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관료예비군인 사림을 양성하기 위해 교육과 인재 양성에 주력했는가 하면, 사림 즉 선비의 이름으로 행해진 언동에 대해서는 개인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위정자들이 최대한 관용을 베푸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유생들이 때로는 부당한 집단행동이나 과격한 유소를 했을 때도 국왕이나 집권층은 그들이 아직 배우는 학생이라고 간주하여 늘 관용을 베풀곤 하였다.
이러한 관행에 따라 18세기 이후 영남 남인들은 영남의 거의 모든 유생이 서명한 유소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곤 했다. 때로는 많은 수의 유생을 확보하기 위해 상소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유생을 협박하거나 회유하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한 번의 상소에 만명이 서명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영남 남인의 정치적 소외가 뚜렷해질수록 상소에 서명하는 유생 수가 증가하였다. 정조 이후 영남 유생 만명이 서명한 상소라는 의미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렇게 만인소가 작성되면 상소의 맨처음에 서명한 이-이를 소두(疏頭)라고 한다-와 그를 지지하는 일군의 유생들이 함께 상경했다. 그리고 소를 올리기 위해 서울 거리를 활보하였다. 19세기 서울은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도회적 풍모가 드러났고, 서울 사람들의 옷맵시는 매우 세련되었다. 영남 유생이 쓰는 사투리와 시대에 뒤진 복장은 서울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서울 사람들은 상소를 하러 올라온 영남 유생을 보고, “영남의 보리 문동(文童)들이 또 상소를 올리러 왔구나”하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러한 회수가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영남 사람하면 ‘보리문동’이라고 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19세기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 그것도 특정 집안 사람이 권력을 독점했던 때였다. 그 여파로 영남과 같은 지방의 정치세력은 권력에서 밀려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남 유생들은 정치적 발언권을 잃지 않기 위해 자주 유소를 올렸고, 그로 인해 보리문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래서 보리문동은 어디까지나 경상도의 양반만을 지칭한 말이었지, 결코 경상도 사람들 모두를 지칭한 말이 아니었다. 보리문동으로 불리던 이들 역시 양반이 아닌 경상도 사람들과 일체감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박정희 이후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리면서 경상도 사람들은 모두가 보리문둥이라는 일체감을 갖게 되었고,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 결속력을 보이곤 했다. 얼마전에 있었던 총선에서도 여전히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은 지역감정에 편승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고, 그것은 어김없이 효과를 보왔다. 정치적 소외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노력에서 비롯된 ‘보리문동’이라는 말이 멀어지는 권력을 붙잡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여기에서 또 한번 역사의 아이러니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