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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하늘 원문보기 글쓴이: 흐르는 물/정호순
“니가 4시에 온다 카믄 나는 3시부터 행복할끼라.”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어린 왕자가 있다. <<애린 왕자>>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말을 비롯해 모든 내용이 포항 사투리로 표현되고 있다. 이 책은 많은 관심을 받아 어느새 7쇄까지 찍었다. <<쉼표, 마침표>>에서는 <<애린 왕자>>를 펴낸 최현애 작가를 만났다.
<<쉼표, 마침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국립국어원 소식지 독자 여러분께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최현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도서출판 이팝을 운영하고 있는 최현애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한 <<애린 왕자>>를 출간했고, 현재 팔도 지역 사투리로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쉼표, 마침표.>>
사투리를 쓰는 어린 왕자가 참 새롭습니다. <<어린 왕자>>를 사투리로 옮긴 계기가 있을까요?
최현애
고항에 와서 우연히 겪은 경험들이 <<애린 왕자>>를 출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동네 이야기나 역사가 궁금해서 지역 기록물들을 자주 찾아보는데, 우연히 30년 전에 제작된 향토역사서 <<영일군사>>에 적힌 사투리 문장을 봤어요. 구술자의 이름과 나이, 사는 곳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는데 이것이 진정한 역사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장을 따라 읽으면서 한참 웃다가 화자의 모진 삶을 떠올려 보니 깊은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신묘한 사투리 덕분에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기도 했지요. 사투리는 지역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고요. 소중한 문화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자취와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언어이기도 하고요.
또 우연히 지역 축제에 전문 안내원(도슨트)으로 참여했는데, 제 관람객들이 유치원생들이었어요. 뜨거운 모래사장 위에서도 눈을 반짝이면서 처음 본 저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다가 한 원생이 “선생님 덥지요.”하면서 자기 물통을 선뜻 건네주더라고요. 거기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떠올랐어요. 동심이란 이런 거였지 싶어서요. 기시감이 드는 경험 속에서 제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고전과 사투리의 결합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독일 출판사로 연락하게 되었어요.
<<쉼표, 마침표.>>
<<애린 왕자>>가 외국에서 먼저 소개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외국에서 반응은 어땠나요?
최현애
<<애린 왕자>>는 지난 2020년 독일 출판사(틴텐파스, Tintenfass사)와의 협업으로 해외에 먼저 소개되면서 유명해졌어요. ‘정말 실존하는 책이냐, 가짜냐 진짜냐, 왜 독일에 이런 책이 있느냐’ 등 다양한 반응과 함께 ‘재밌고 신기한’ 책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와 누리소통망에서 입소문이 났지요. <<애린 왕자>> 문장을 직접 소리 내어 따라 읽고 공유하는 것이 하나의 놀이처럼 확산되면서 더 많이 알려지게 된 거 같아요. <<애린 왕자>>가 출간됐을 때 제목 표기가 틀렸다고 직접 제보를 주신 프랑스 교민도 있었고, 책에 쓰인 한글이 이상하다는 어린이 독자들의 반응도 재밌었습니다. 낭독 영상이나 콘텐츠 제작 문의를 주시는 독자들이 있어서 인기를 실감하고 있어요.
틴텐파스는 <<어린 왕자>> 원문을 바탕으로 전 세계 언어를 아카이브하는 언어 전문 출판사인데요. 틴텐파스 에디션은 지역별, 시대별 언어뿐만 아니라 소수 언어 등 다양한 언어가 보존되어 있어요. <<애린 왕자>>는 에디션 125번에 수록했고, 지난해 출간한 전라도 사투리 번역본 <<에린 왕자>>는 에디션 154번에 수록했습니다.
<<쉼표, 마침표.>>
<<애린 왕자>>의 번역 과정을 소개해 주세요.
최현애
<<애린 왕자>>는 틴텐파스에서 준 원문을 참고했습니다. 틴텐파스 에디션의 프랑스어 원문과 독일어 원문, 누리집(웹 사이트) 엔젤파이어의 영역본도 참고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투리는 입말(구어) 중심인데 원작은 글말(문어)로 되어 있어요. <<애린 왕자>> 번역은 글말을 입말로, 다시 입말을 글말로 옮기는 과정을 거쳤는데요. 먼저 소리 내어 말하듯 옮겼고, 이후 퇴고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어문규정을 넘나들면서 맞춤법의 틀을 깨트리는 일탈을 저질렀는데 초고를 마쳤을 때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어요. 자동 맞춤법 기능 때문에 문서 작업창에 전부 빨간 밑줄이 그어져 있더라고요. 오히려 다 틀려서 잘했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한 문장도 빠짐없이 사투리를 반영했습니다. 초고를 바로 출간할 수 없으니 전문가에게 감수와 자문을 구했어요. 오랫동안 방언 연구를 해 오신 언어학자 이상규 선생님, 지역 민요 구술 채록을 해 오신 민속학자 박창원 선생님, 또 동심을 늘 일깨워 주시는 동화 작가 김일광 선생님께서 도움을 주셔서 무사히 국내 출간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쉼표, 마침표.>>
<<애린 왕자>> 중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어휘나 구절이 있으신가요?
최현애
<<애린 왕자>>에는 ‘허거리’라는 말이 나와요. 입마개의 사투리로 ‘허거리’라는 단어를 썼는데요. 프랑스어로 뮤젤리에(muselière), 영어로 머즐(muzzle for the sheep)이라고 하는 입마개, 부리망을 대체할 수 있는 포항 사투리를 찾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결국 아쉬운 대로 경주 사투리인 ‘홍오리’를 쓰려던 차에 짚풀공예 작가님이 포항 사투리인 ‘허거리’를 알려 주셔서 쓰게 되었지요.
“딴 사람들이 내 책이 숩게 읽는 건 싫아가 내가 이케 주낀다.” 이 문장은 사투리로 환기할 수 있는 국어, 한글, 우리 문학의 소중함을 전하고 싶어서 고른 문장이에요. <<애린 왕자>>가 술술 읽히지 않는 이유기도 하고요. “니가 4시에 온다 카믄 나는 3시부터 행복할끼라. 시간이 가믄 갈수록 더 행복하긋제. 4시가 되면 하마, 안달이 나가(운짐 달아가) 안절부절 모하겠제, 내가 얼매나 행복한지 보여줄끼라.” 이 구절은 여우와 어린 왕자의 만남과 헤어짐이 나오는 21장인데요, 많은 독자분들이 좋아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행복한 마음이 사투리를 통해 더욱 절묘하게 표현되었다고 생각해요. 이 밖에 “맴으로 바야 잘 빈다 카는 거. 중요한 기는 눈에 비지 않는다카이.”는 사투리의 입맛이 잘 녹아 있어서 신선한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막이 아름다븐기는 어딘가 응굴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데이.” 구절도 마찬가지예요. 조종사와 어린왕자의 대화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작가로서 욕망과 좌절을 동시에 느낀 부분이기도 합니다.
<<쉼표, 마침표.>>
<<애린 왕자>>는 최근 7쇄를 찍었고, 여러 유명인들이 낭송하기도 했습니다. <<애린 왕자>>의 특별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작가님께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최현애
일단 웃기잖아요. 사투리에는 고유한 지역 정서와 문화가 담겨 있어요. 경상도의 ‘마!’ 전라도의 ‘잉!’ 충청도의 ‘혀!’ 등 사투리는 사귐의 언어이자 문화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경기도 말씨는 새초롬하고, 강원도 말씨는 순박하고, 경상도 말씨는 씩씩해요. 그리고 충청도 말씨는 정중하고 전라도 말씨는 맛깔스럽죠. 특정 언어와 방언에 대해 갖게 되는 심리적 상태나 그런 느낌을 언어 의식 또는 언어 태도라고 하는데, 사투리에는 순화된 표준어에서 발견할 수 없는 언어의 맛이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정체성과 모국어, 지역 문화에 대한 고민을 <<애린 왕자>>로 해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포항에서 나고 자라, 청주에서 공부하고 서울·대전에서 일하고, 해외도 다니면서 지냈는데요. 포항에 다시 오니 낯선 이방인이 되어 있더라고요. 사투리는 표준어와 같은 한국말이지만 주류가 아니기에 고쳐야 할 말이라 배웠다 보니 그동안 사투리를 쓸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또 싱가포르에 지내면서 다민족 다문화 사회의 독특한 현지 영어와 중국어를 접하다 보니 제 언어생활에 관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지요. ‘싱글리시’라고 불리는 독특한 현지 영어에서 <<애린 왕자>> 출간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덕분에 지역 사투리의 맛과 멋을 재발견할 수 있었지요.
<<쉼표, 마침표.>>
<<애린 왕자>>에 이어 다양한 사투리 번역본을 제작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재 진행 상황이 궁금한데요. 각별히 신경 쓰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최현애
현재 <<애린 왕자>>의 경상도 사투리 번역본을 거쳐서 소리의 고장인 전라도 사투리 번역본을 마쳤어요. 다음으로 충청, 강원 사투리에 이어서 제주어로 번역을 해야 하는데요. 참여하실 분을 공개 모집합니다.(웃음) <<어린 왕자>>를 구수한 사투리로 표현할 수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환영해요. 오디오북 녹음을 역자분이 직접 해 주시면 더 감사하고요. 지난한 과정을 참을성 있게 버텨 줄 체력을 갖추신 분이라면 좋겠네요.(다시 웃음) <<애린 왕자>>는 책으로 읽는 즐거움도 크지만 아무래도 사투리는 입말이다 보니 직접 들어 봐야 참뜻을 알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후 진행될 지역어 프로젝트는 오디오북 작업에 공을 더 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쉼표, 마침표.>>
지역어와 관련해 국립국어원에 바라는 점이 있으신가요?
최현애
누리집에 지역어 사전과 북한어 사전이 있으면 좋겠어요. 저는 국립국어원 누리집 단골인데요. ‘우리말샘’에 검색하면서 ‘나만 헷갈리는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궁금증을 해소하고 있습니다. 글쓰기와 편집, 교정, 교열 등 모든 작업을 국립국어원 누리집을 통해 해결하니까 누리집 없이 못 산다고 봐야죠.
그런데 지역어 사전이 국립국어원 누리집에 없다 보니, 방언과 사투리 자료는 <<문학 속의 방언 총서>>에 기반한 ‘지역어 종합정보 누리집’에서 종종 확인하는데 늘 아쉬움이 남아요. 또 언어문화산업의 기반이 되는 공공데이터 구축을 목표로 유관 부처와 협업해서 북한어 정보도 함께 등록하면 좋겠어요. 통일부의 겨레말큰사전 편찬 성과를 국립국어원 누리집에서 활용할 수 있었으면 해요.
<<쉼표, 마침표.>>
마지막으로 <<쉼표, 마침표.>> 독자분들과 <<애린 왕자>>의 예비 독자분들께 전할 말씀이 있으신가요?
최현애
<<어린 왕자>>는 동심의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위대한 책이에요. 어린 왕자에 깃들어 있는 메시지는 시간이 지나도 새롭고 신선하지요. 이처럼 살아있는 메시지를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여 확산하는 건 필연의 과정이라고 봅니다. 변방의 지역 언어라고 해서 담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팔도 지역 사투리를 쓰는 어린 왕자가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우리가 흔히 쓰는 표준어로 쓰인 책이 아니기에 읽어 내려가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어린 왕자>>를 접하신 분이라면 사투리의 뜻을 금방 알아차리실 거예요. 사투리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언어가 담고 있는 메시지에 집중해 주세요. 투박한 듯 섬세하기 짝이 없는, 유머러스하면서 진심 어린 새로운 어린 왕자의 세계가 펼쳐질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사투리 고유의 생생한 입말로 전달하는 메시지가 때로는 더욱 강력할 수 있다고요.
글: 강은혜
사진: 최현애(본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