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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보이지 않는 자를 봄
(8월 20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19분)
TMI 실천해 보세요
86. 고아원을 방문해서 필요한 도움을 주세요.
63. 외출이 어려운 이들에게 카드를 보내세요.
106. 더운 날 누군가에게 시원한 음료수를 건네세요.
연구 범위: 롬 8:28~39, 요 14:1~14, 엡 1:18~23, 사 40:27~31
기억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7).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에 관한 정의는 언제나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우리는 어떻게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이번 주 기억절이 그 답을 제시한다.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히 11:27).
우리가 평안할 때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잘못되고 있을 때까지도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바라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정말 큰 도전이다. 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에 관한 진리로 형성된 믿음, 곧 그리스도와 같은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 아버지의 선하심, 예수님 이름의 권능, 부활의 능력,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믿음으로 우리는 비로소 시련의 도가니, 그리고 모든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도 굳게 설 수 있다.
- 이번 주 학습 포인트: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가?
TMI Time -
*학습 목표
- 깨닫기
보이지 않는 자를 믿는 확실한 믿음이 있을 때 눈앞의 시련 가운데서도 평안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기도함으로 삶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살라는 초청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행하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허락된 확실한 약속을 붙잡고 살아간다.
TMI 안으로 : 안교 소그룹이 함께 서로를 돌보고 연합함
1.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2.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3.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TMI 위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2. 로마서 8:28~39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떤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3.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요 14:13, 14)
4.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확신과 희망은 무엇입니까?(엡 1:18~23)
5. 베드로전서 5:7이 우리에게 주는 기별은 무엇일까요?
6.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에 빠졌을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일까요?(사 40:27~31)
7. 마음의 평안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가 나누어 줄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가 있습니까?
결론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면 우리를 위해 일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항상 우리를 돕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염려하는 대신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갈 때 참된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TMI 밖으로 : 안교 소그룹이 함께 지역 사회에 복음을 전하고 봉사함
8월 14일(일)
우리 아버지의 풍성하심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면, 나를 위해 분명히 ( )을 해주실 텐데!” 우리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정말로 사랑하시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면 상황이 이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다른 것을 원하신다는 생각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둘째, 우리의 경험이 우리가 믿는 것과 충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수 있다. 우리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어떤 좋은 것을 보면서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께 화를 내기까지 한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을 발휘할 때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하려는 유혹을 마주하는 그 순간이 바로 믿음을 활용해야 하는 때이다.
로마서 8:28~39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묘사하는 매우 강력한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을 지켜주는 어떤 근거들을 찾을 수 있는가?
로마서 8:32에는 우리로 하여금 상황에 압도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중요한 논리적 근거가 기록되어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시고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보내셨다면, 그분께서 더 이상 우리를 위해 주시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어 죽게 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하고 인색한 분으로 돌변하실 수 있겠는가?
<묵상>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대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수천 가지 모양으로 이와 같은 놀라운 자비를 풍성히 내려 주고 계신다는 진리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이와 같은 사실이 그대의 믿음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요?
(이어서)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의 진리가, 시련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생겨날 수 있는 어떤 의심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역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교훈>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모든 풍성한 은사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그 은혜를 통하여 모든 의심을 날려버릴 수 있다.
<적용>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한 진리가 그대가 가진 의심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즐거워함 - “어떤 사람도 항상 의심을 품고 위축되어 떨면서, 그리고 자신의 길에 불평의 씨를 뿌리면서 걸어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선하심을 깨닫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즐거워해야 한다. 그대들은 모든 힘을 다 동원하여 위를 쳐다보고 그대들의 어려움을 내려다보지 말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도중에서 쇠약해지지 않을 것이다”(증언보감 2권, 223).
<기도>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라면, 나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해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해 주시옵소서.
8월 15일(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
예수님께서는 얼마 있지 않아 제자들을 떠나셔야 했다. 제자들의 든든한 후원과 격려가 되시던 분이 하늘로 떠나시려 할 때, 그들은 혼란과 무력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육신적으로는 더 이상 그분을 볼 수 없었지만, 예수께서는 놀라운 약속을 그들에게 주셨다.
요한복음 14:1~14을 읽어보라. 특히 13, 14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행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언제나 기도의 맨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권면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핵심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단서는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할 때 하늘의 모든 권능이 우리를 위해 활동한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하고 있는 천사들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요청에 응하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늘 보좌로부터 파송된 천사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하고 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눈을 뜨면 모든 상황이 바뀌어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상황은 전혀 바뀐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이 폭풍을 잠잠케 하실 때처럼 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격려하실 때처럼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게 임할 수도 있다. 어떤 극적인 사건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묵상>
요한복음 14:1~14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그대 앞에서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약속에서 어떤 소망과 격려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위대한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재림의 약속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희망이 됩니다. 눈앞에 닥친 시련 앞에서 분명한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할 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 약속을 굳게 붙잡을 수 있는 믿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교훈>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비록 하나님의 능력이 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해도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적용>
예수님의 이름으로 날마다 기도하기 위해 정해 놓은 시간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대화를 위해 어떤 시간을 구별하시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 - “예수께서는 그들의 성공의 비결은 당신의 이름으로 힘과 은혜를 구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셨다. 그분은 그들을 위하여 간청하시려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영혼을 대신하여 마치 자기 자신의 소망인 것처럼 겸손한 탄원자의 기도를 드리신다. 성실한 기도는 어떤 것이나 하늘에서 들으시는 바 된다”(시대의 소망, 667).
<기도>
극적이고 화려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저의 구원을 위해 오늘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해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음을 믿고 오늘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하는 하늘 백성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8월 16일(화)
부활의 능력
부활은 인간이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나타내 보여준다.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종종 그분의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법적 관계를 갖도록 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에 있어서 특별한 측면을 더해 준다. 예수님의 부활이 중요한 까닭은 우리도 언젠가는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활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우편, 곧 능력과 권세의 자리에 앉게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부활의 능력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허락하신다.
에베소서 1:18~23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말한다. 이 구절은 부활의 능력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이 구절에서 그대 자신을 위한 어떤 희망과 약속을 발견할 수 있는가?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한다. 첫째, 그의 부르심의 소망과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 1:18), 둘째,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기를(엡 1:19) 기도한 것이다.
그런 다음 바울은 이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묘사하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이 능력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아버지의 권능의 우편에 앉게 한 것과 같은 능력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설명을 멈추지 않는다. 부활은 예수님께 단순히 어떤 막연한 능력을 부여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에게 다스릴 권세를 주었으며, 영원한 세월 동안 그분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묵상>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어떤 확신을 줄 수 있을까요?
“사탄의 앞에서 예수님만을 쳐다보며 ‘나에게는 부활하신 구세주가 계시다. 주님께서는 결코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고난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주님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 예수님은 나의 의시며 나의 기쁨의 면류관이시다’라고 말하라”(가려뽑은 기별 1권, 352).
<교훈>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한 소망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울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 또한 깨달을 수 있다.
<적용>
그대의 삶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필요한 영역의 목록을 기록해 보십시오. 그리고 필요한 모든 영역에 예수님의 능력이 임하기를 기도하십시오.
<영감의 교훈>
부활하신 예수님 - “예수님은 요셉의 새 무덤에 누워 계시지 않으신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셨고,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신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구주가 계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소망과 힘과 용기와 그리고 그분의 보좌에 그분과 함께할 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대가 그분을 부를 때 그분께서는 언제든지 그대를 도우실 수 있고 또한 즐겨 도와주신다”(교회증언 8권, 128).
<기도>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저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일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음을 기억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제 안에 역사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저의 마음에 초청하게 도와주시옵소서.
8월 17일(수)
우리의 모든 염려를 내어 맡김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진 명판을 걸어두기도 한다. “걱정할 수 있는데 왜 기도하십니까?”(Why pray when you can worry?). 이 문장은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너무나도 자주 하나님께 근심을 맡겨 버리는 대신에 혼자 염려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삶이 완전히 헝클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 매듭을 푸시도록 맡겨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기를 갈망하신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손쓸 수 없게 될 때까지 어떻게든 그 문제를 붙잡고 있으려 한다. 우리는 왜 주님께로 가지 않고 스스로 절망에 빠지려고 하는가?
베드로전서 5:7을 읽어보라. 베드로는 시편 55:22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를 위한 어떤 기별이 있는가?(참조 마 6:25~33).
이 구절은 매우 단순하다. 아무런 비밀도 숨겨져 있지 않다. 기록된 그대로다. 염려를 맡겨 버리라는 말은 골치 아픈 염려거리들을 던져 버림으로 더 이상 붙잡고 있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짐을 아무 곳으로나 던지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염려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우리 하늘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염려를 모두 맡긴다”는 일의 문제는 그것이 어렵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쉬워 보인다는 데 있다.
근심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과중한 업무나 예상치 못했던 비난, 내가 사람들에게 필요치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또 건강이나 재정적 염려,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하다는 느낌, 그리고 용서받지 못했다고 믿는 데서 올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가 문제를 붙들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자신이 누구보다도 그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묵상>
삶의 수많은 문제들을 앞에 두고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어서) 그러나 베드로는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돌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혼 직전에 놓여 있거나, 내가 완전히 무가치한 존재인 것처럼 느낄 때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관심을 가지시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한다.
<교훈>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는가? 우리는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김으로 참된 마음의 안식을 맛보아야 한다. 주님은 모든 걱정거리를 해결하실 수 있으시다.
<적용>
그대로 하여금 걱정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해결하기에 너무 어려운 일이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라 - “그대들은 그대들의 업무에 있어서 번민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대의 앞길이 점점 암담하여져서 손실을 당할 염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낙담하지 말라. 그대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침착하고 기쁜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이 사건들을 신중히 처리할 지혜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함으로 손해와 재난(災難)을 면하게 하라.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하여 그대로서 할 최선을 다하라”(정로의 계단, 122).
<기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는 데서 경험하는 자유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모든 문제를 감당하며 해결해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함으로 맡기며 살아가는 행복을 경험하게 해 주시옵소서.
8월 18일(목)
하나님을 볼 수 없어도 신실히 행함
우리가 어떤 힘든 상황을 지나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형편을 잘 알지 못하시고 관심조차 두지 않으신다는 생각은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상황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느꼈다. 계속되는 포로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이사야 40장에서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마음을 담아 친절하고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포로 된 그들은 ‘여호와여 어디 계시나이까? 주께서 우리를 여전히 돌보고 계신다는 증거를 볼 수 없나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사야 40:27~31을 읽어보라. 이사야는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이 묘사는,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사 40:27)는 그들의 생각에 어떤 답을 주고 있는가?
자신들의 사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숨겨졌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무리를 우리는 에스더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심지어 하나님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에스더서 전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멸절시키고자 기안된 변경할 수 없는 법령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개입하시는 놀라운 드라마의 기록이다. 이 이야기는 과거의 사건을 묘사할 뿐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핍박을 당하며, 그들을 죽이라는 법령(계 13:15)이 반포될 때를 상징하고 있다.
<묵상>
에스더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를 묵상해 보십시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어떤 기별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이어서) 이와 같은 끔찍한 상황 앞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버리셨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얼마나 쉽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에스더의 이야기에서 당신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지막 위기에서 다시 건져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교훈>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못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때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적용>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거나 사라져 버리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믿음으로 전진함 - “비록 흑암 중에 싸여 도무지 앞길을 볼 수 없는 때에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앞으로 전진하자. 주저하며 의심하는 자 앞에서는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불안과 실패나 패배의 위험이 다 없어지기까지 전진하기를 꺼려 하는 자는 결코 전진하지 못할 것이다. 믿음은 눈앞에 있는 어려움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앞을 넘어다 보는 것이며, 또 우리가 보이지 아니하는 전능하신 분을 의지할 때 결코 우리의 앞이 막히지 않을 것이다.”(복음 교역자, 262)
<기도>
다가올 마지막 환란의 때를 생각하면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더 시대에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셨던 하나님께서 우리 또한 지켜주실 것을 기억하며 담대하게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싸움을 싸우게 해 주시옵소서.
8월 1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선지자와 왕> 598~606, ‘왕후 에스더의 시대에’를 읽어보라.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성령님은 실제적이고 참된 인도자가 아니신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추측에 의해 기록된 듯이 하나님 믿기를 주저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교훈해 주시기를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보증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늘 아버지께 기꺼이 배우려는 정신과 열망을 가지고 겸손히 나아간다면 왜 그분께서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에 대해 의심하는가?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그분을 의심함으로써 그분께 욕을 돌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에는 그분의 뜻을 행함에 있어 인도함을 받고 있으며 축복을 받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을 그릇 해석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의뢰하며 성령께서 어떻게 그분의 계획과 섭리를 이행하시는지를 바르게 깨닫도록 이끌어 주심을 믿어야 한다”(엘렌 G. 화잇, 발표된 원고, 6권, 225).
“의심과 반대의 세력으로 더불어 투쟁하는 중에 믿음은 굳건하게 자란다.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 얻은 체험은 가장 값비싼 진주보다도 더욱 가치가 있다”(교회증언, 3권, 55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가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믿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리의 시력이 미치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같이 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2.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방법이 비록 내가 원치 않는 방법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길을 신뢰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3. 우리의 관점에서 보기에 끔찍한 결과를 마주한 사람들이나 성도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간절한 기도와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이번 주 교과에 비추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삶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그리스도인
어느 안식일 아침에 교회에 한 낯선 젊은 엄마가 어린 아이를 안고 교회에 들어섰다. 매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조금 후 윤 집사님이 교회에 들어서셨다. 아이 엄마와 함께 교회에 온 것이다. 새로운 손님이기에 어떻게 교회를 오게 되었는지 환영 인사와 함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윤 집사님은 교회에서 30여분 떨어진 정동진에서 오래 전부터 카페를 운영해 왔다. 그래서 오래 된 단골 손님들이 많다. 오늘 교회에 온 아기 엄마도 처녀 때부터 종종 정동진에 오면 이 카페에서 차를 마셨던 단골 손님이었고, 그래서 카페 사장이신 윤 집사님과 오래 전부터 알게 된 손님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결혼하게 되었고, 결혼 후 정동진의 아름다운 환경이 그리워 아예 정동진으로 이사를 해서 머물게 되었다.
전에도 그랬듯이 아침에 카페에 와서 차를 마시고 간단한 요기를 하면서 일출을 보며 아침을 즐기다가 사장님이신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집사님이 교회에 나가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도 토요일인 안식일에 교회를 가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젊은 아기 엄마가 집사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저도 오는 안식일에 교회에 같이 가면 안 돼요?” 그래서 약속이 되었고 그 안식일에 아기와 함께 교회에 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는 사장님이 나가는 교회라면 무조건 따라 갈래요.”
사실 윤 집사님은 “감사 집사님”이라는 별명이 있다. 언제나 밝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분으로서 어떤 순간에도 입에서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상황이 어려워도 “감사합니다”, 누군가 일을 맡겨도 “감사합니다”, 손해를 보는 상황이 생겨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윤 집사님의 삶이 고객으로 카페에 왔던 젊은 청년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후에 결혼하여 카페 근처로 이사 왔을 때는 “사장님이 다니는 교회라면 무조건 따라 갈래요”라는 신뢰를 주었던 것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 한 번도 손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거나 이름을 말한 적은 없어도 집사님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이 얼굴에, 모습에, 씌어 있는 것을 이웃들이 읽게 된 것이다. 복음은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도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작년 가을부터 출석하게 된 아기 엄마는 아기와 함께 코로나 상황에도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며, 지금은 남편도 함께 교회에 출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동중한합회 강릉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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