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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름의 능력
행3:1~10
사랑하는 여러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고 그 충만함을 받은 결과 120문도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의 일을 말하며 하루에 세례 받은 수가 삼천에 이르고 전도하며 그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기도는 사단을 이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함인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령강림 사건 이후 주님 곁만 따르던 그래서 보고 들은 것으로 만족했던 제자 베드로와 요한도 이를 깨닫고 하나님의 일을 위한 기도의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첫 기적의 역사가 제자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1)/ “제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 갈 새” 했습니다.
즉 시간을 정해놓고 경건을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경건”이란 “데오세베스/ 하나님을 예배하다, 하나님을 향한 외적인 사랑실천”이라는 뜻입니다.
약1:26~27/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말로만 사랑한다 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생활을 살펴서 필요를 공급해 주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요6:29/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믿음은 “피스티스/ 신뢰를 가지고 의뢰하다, 합의하다, 동의하다, 삶에 법을 삼아 따르다”라는 뜻입니다.
즉 십자가의 사랑을 중심으로써 (레바/동기/내 유익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함) 좇는 삶인 것입니다. (좇다/아콜로데오/ 동행하다, 함께 그 길을 가다, 선택하다, 지정하다, 참가하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도의 목적이 이것인 것입니다.
제구 시이면 오후 3시입니다. 일을 하다가 정해진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인 것입니다. 모든 우선순위를 여기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성령 임재 후 전혀 다른 가치 변화, 복음의 본질을 좇는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이는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하루 종일 하나님의 일만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머릿속에 담고 있습니다.
오직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 하나님의 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도전하고 훼방하는 사단을 이기고 담당하기 위해서 시간을 딱 정해놓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지만 잠들었던 저들입니다. 다시 와서 깨워주어도 잠에 빠졌던 저들입니다. 결과 주께서 잡히시자 버려두고 도망치며 부인하고 저주했던 저들입니다.
그랬던 저들이 성령이 임하시자 그 십자가를 지겠노라고 매일 정해진 시간 기도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주님이 그러하셨잖습니까?
그러므로 기적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기도는 기족을 낳는 것입니다. 기적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에게 기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기 과시, 자기영광, 자기 의를 바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은 절대로 기도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적만을 원하는 사람은 병 낫기를 원하고, 사업이 잘 되기를 원하고, 자식이 잘 되기를 원하는 인간적인 본능을 좇는 세속적 가치에 묶여 있습니다.
인본주의적 종교인인 것입니다. 여기에 기적은 없습니다.
이는 무당신앙입니다.
하나님은 길거리를 지나가는 아무에게나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준비 된 사람, 준비 시키신 후에 그 연단을 그 시험을 통과해야 복을 주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것 때문에 망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달란다고 칼을 장난감으로 주지 않아)
하나님은 우리를 복 주시기 위하여 우리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십니다.
목마르게 만드십니다. 핍박을 받게 만드십니다.
마5:3, 6, 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 곧 그 기뻐하심의 일, 곧 중심으로써의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의인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배부른 복을 주시고 천국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이를 깨닫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다라 기도하러 올라감으로써 하나님은 한 사건, 곧 기적을 준비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머리 사매고 생각하고 도 생각해도 하나님의 일은 감당치 못합니다. 생각하면 세상적인 방법이 나오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방법이 나옵니다.
생각을 하면 사람이 움직이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할렐루야!
기도하는 사람 곧 하나님의 기뻐하심의 일을 위해 몸부림치는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은 만나주시고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 베드로와 요한에게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게 하시고 기적의 역사를 나타내십니다.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살펴보면 성전에는 날마다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몇 푼 얻기 위해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 누가 돌아보지 아니하면 도저히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그 사람이 거기서 구걸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구걸을 하여 생계를 간신히 라도 유지했던 앉은뱅이에게 그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지만 아무런 도움, 곧 돌아봄의 중심으로서의 사랑을 행하는 십자가를 지는 자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인들이 자기 의를 위해 종교적 열심으로 들락거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 날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깨닫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과 약속하신 복과 천국의 복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종교인의 열심을 믿음으로 착각한 사람들로 넘쳐낫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되어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그 사람을 십시일반으로라도 구제했을 것입니다.
다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돌아보지 않았습니다.l 그러면서도 성전에 들락거리며 열심으로 기도하며 나는 이 만큼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자기 의를 내세운 종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시간을 기도하고 또 기도할지라도 십자가의 도를 중심으로서 좇는 삶이 없으면 그것은 헛수고인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단의 훼방을 물리치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앉은뱅이를 하나님은 베드로와 요한 앞에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의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그들에게도 그 앉은뱅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도하러 가는 그들 눈에 날마다 그냥 지나쳤던 관심 밖의 그 앉은뱅이가 보인 것입니다.
종교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는 우연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도하러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응답인 것입니다.
앉은뱅이에게는 베드로와 요한도 매일 거저 지나가는 사람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하나님의 복 주심과 기적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날 때부터 영적인 앉은뱅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소함의 은혜를 입어 그 자녀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확증사건인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여러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은
첫째, 자기 마음대로 걸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마치 날개가 없는 새와 같은 것입니다. 즉 스스로 생계를 위한 활동을 전혀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둘째,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그는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성전미문에 매일 데려다 놓았다는 것을 보면 가족들에게서도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임을 말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 그래서 그는 타인에게 의존해야만 생계가 가능한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돌아 봐 주어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장애가 밥벌이 수단인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은 온갖 재능, 미모, 건강, 권력, 지식, 명예, 돈 등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밥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면 그 사람은 영적인 앉은뱅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의 반대는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즉 심판을 받는 사람은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 이 앉은뱅이는 늘 절망인 것입니다. 내일이 없고 미래가 없는 사람입니다. 구걸을 하는 날에는 먹고 없는 날에는 굶어야 하는 인생입니다. 여기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영적인 앉은뱅이로 살면 소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가져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늘 불안 합니다. 적으면 적어서 불안, 많으면 많아서 강도를 당할까? 떼어 먹힐까 불안합니다.
그래서 소망이 없습니다. 결국 육신의 쾌락과 자기사랑, 돈 사랑의 가치를 좇아 인생을 자기를 위한 것에 투자하고 낭비합니다.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이 자기의 신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는 몇 억도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은 인색하고 바들바들 떱니다. 실패한 앉은뱅이인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그 기뻐하시는 일의 결과로써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선용하는 자가 믿음의 사람이요 약속한 복과 천국을 소유할 자리에 들어가는 자인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은 그날을 준비하는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도하러 들어가는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했습니다.
매일 들어가면서 구걸함을 보았던 그 앉은뱅이!
그의 바람은 천국도 구원도 아니었습니다. 주린 배를 채워 줄 금이나 은이었습다. 이것이 그의 관심이요 구하는 것의 전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땅에서 자기 배를 신으로 삼을 금이나 은을 좇으면 앉은뱅이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이나 천국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의 이 요구는 습관적인 익숙한 태도였습니다. 우리도 이 익숙한 종교인의 틀에 갇히면 천국영광에 대한 관심은 없는 것입니다.
이 익숙하고 습관적인 종교인의 거푸집을 영원한 것을 위하여 속히 부수어 버려야 합니다.
앉은뱅이의 관심과는 달리 베드로에게 보인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관심, 곧 구원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했습니다.
여기 “더불어” 라는 말은 “쉰/ ~~함께 지탱하다, ~~와 같이, ~~와 함께, 함께 머물다”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 사람의 고통, 아픔이 함께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주목하여”라는 말은 “아우토스/ 다른 것에서 주어를 따로 떼어내어, 예수”라는 뜻입니다.
“보라”라는 말은 “블레포/ 눈으로 보라, 쳐다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사람의 소리로 듣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이 땅에서 먹고 살 금과 은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설교를 통해 예수를 바라보라 고 외쳐도 이 땅의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이를 좇으면 구원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으로 더해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그 앉은뱅이는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했습니다.
“얻을까 하여”라는 말은 “람바노 프로스도카오 의 합성어입니다. 람바노/ 가지다, 취하다. 프로스도카오/ 기대하다, 기다리다” 라는 뜻입니다.
“바라보거늘” 이란 말은 “에페코/ 굳게 잡다”라는 뜻입니다.
소망 없는 그에게 구원의 주를 바라보라 하는데 그는 몇 푼 얻을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주를 바라보고 잡는 것이 아니라 애원하듯 그들을 굳게 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종교인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하심에도 이 땅의 것, 내 배, 내 의, 내 영광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정 반대로 행하면서 새벽으로 철야로 금식해 가며 ‘주시옵소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와 방향, 그 채널이 어긋난 그런 종교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역사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 곧 하나님의 대답을 다음 시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선포는 그가 전혀 생각하지도 그리고 기대하지도 않은, 상상도 하지 않은 말이었습니다.
자기가 일어나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말이었습니다. 사람을 조롱을 해도 유분수지 참으로 실망스러운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말은
은과 금은 없다. 그러나 네게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니 일어나 걸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것이 능력이라는 선포였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람의 입에서 이런 선포의 말이 나올 수 있습니까?
방금 전에는 ‘우리를 보라’하더니 한다는 말이 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 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한 성령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온통 은과 금의 이야기로 가득 차고 넘칩니다.
모든 사람을 돈으로 평가합니다.
그 사람의 능력을 돈이 얼마나 많고 적으냐 로 평가합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가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지금 그것이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능력임을 베드로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름” 이란 말은 “쉠/ 본질” 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의 이름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중심으로써의 사랑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날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구걸하는 그 사람을 무심코 지나쳤던 그 사람이 눈에 들어왔고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십자가의 사랑이 동한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명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의 선포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는 은과 금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삶, 본질이 사라졌습니다. 기복화, 관념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들이 위기를 만난 가장 큰 요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고 이를 감당하기 위하여 대적하는 사단 마귀를 이기고 이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러 올라 다닐 때 성령께서 그 일을 발견케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감당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는 내가 세상적으로 갖고 싶은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기뻐하시는 그것을 구하고 그 요구에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마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선교하고 구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심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는 이미 자기 상을 다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교회는 구제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정의롭게 개혁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호단체도, 세상을 개혁하는 단체도 아닙니다.
즉 사랑으로 행함으로써 저들이 이를 알고 주를 바라보고 좇을 수 있도록 세상은 몰라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아니해도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그 역할, 곧 중심으로써의 사랑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소유하고 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이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가지고 영적인 영향력을 끼칠 때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게 명하신 시대 속에서의 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이 사람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요, 우리 사회와 이 나라와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일어나 걸으라 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위선적이고 기복적인 관념적이고 형식적인 종교인의 거푸집을 허물어 버리고 그 본질을 좇는 삶으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4:21/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했습니다.
능력은 무엇입니까?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 곧 중심으로써의 사랑하는 삶이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우리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이르기를
요일3:16~18/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중심으로서의 사랑함이 마땅하다는 것)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어찌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할까 보냐. 형제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이르기를
약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했습니다.
왜요?
고후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했기 때문입니다. 즉 진실함과 깨끗함으로 사랑하는 삶을 떠난 것은 사단 마귀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입으로만 일어나 걸으라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7~8)/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했습니다.
“오른 손을” 이란 말은 “덱시오스 케이로스”의 합성어인데 “받아들이다, 환영하다와 하나님의 손”의 합성어입니다. 즉 하나님의 손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잡아”라는 말은 “피아조/ 낚다”라는 뜻입니다. 그 손으로 물고기를 낚아채듯 환영하여 일으켰다는 말이 됩니다.
“일으키니”란 “에게이로/ 깨우다, 일으키다”라는 뜻으로 그 영혼을 깨워 순간적으로 낚아채듯 그 앉은뱅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때, “발과” 라는 말은 “바시스/ 걷다에서 유래 된 말로 걸음”을 뜻합니다.
“힘을”이란 말은 “스트레오오/ 견고하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발과 발목이 견고하여져서 걸음마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곧”이란 “파라크레마/ 그 즉시로”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한 영혼에 대하여 긍휼한 마음의 중심적 사랑으로 손을 내밀면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기적이 임하는 것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뛰어”라는 말은 “엑살로마이/ 뛰어오르다”라는 뜻으로 빌과 발목이 견고하여져서 걸음마를 하는가 싶더니 즉시 뛰어오르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서서”란 말은 “히스테미/ 세우다”라는 뜻이며, “걸으며”란 “페리파테오/ 머물러 있다, 돌아다니다”라는 뜻입니다.
다리를 세우고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뛰기도” 란 말은 “할로마이/ 날뛰다”라는 뜻으로 너무 기쁘고 감격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닌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찬미하니” 했습니다. 이는 “아이네오”라는 말인데 “하나님을 찬양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중심으로서 사랑함으로 앉은뱅이에게 사랑의 손을 잡아 준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증거 하는 동사입니다. 명사가 아닙니다. 말이 아닙니다. 행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앉은뱅이 된 자의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그리고 그는 성전으로 들어가며 했습니다. 이전에 이 사람이 성전이 거기 있는 것을 몰랐습니까? 아닙니다.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육신적 생명을 위한 몇 푼 돈을 구걸하는데 더 주목하고 집중했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보다 이 땅의 것을 더 좇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베드로가 사랑의 손을 내밀어 잡아줄 때 성령이 임하셨고 영원한 구원까지 얻은 것입니다.
그 기쁨을 어찌 말로다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도 이 앉은뱅이 같은 하나님의 기적, 그 기쁨의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주목하십시오!
이웃을 향하여 중심으로서의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잡아 주십시오!
그때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이 사람에게서 지난날의 절망, 비참함, 배고픔, 수치, 불행은 사라졌습니다. 구걸할 때 얻지 못할 것에 대한 염려나 두려움도 사라졌습니다.
새 소망과 기쁨, 생명이 찾아 온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바라고 좇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요 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사람의 가치가 변하면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우리의 가치변화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9~10)/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을 하던 그 앉은뱅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일어서 걷기도 하며 뛰면서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 모든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앉은뱅이인 우리도 이 같은 은혜를 입어 세상 사람들이 놀라는 주인공의 복을 한없이 받아 그날까지 하나님을 찬미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주위를 변화시킵니다.
은혜를 받고 성령을 따라 행하면 과거의 아픔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고치심과 보수하심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교회가, 여러분이,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런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리는 이 앉은뱅이처럼 어찌하든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바라보라 할 때 바라보아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주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면 걸으면 됩니다. 자기 지식, 논리, 체험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 비워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려면 베드로와 요한처럼 하나님의 일에 주목하고 이를 위하여 사단을 이기고 이루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돌아보아야 할 이웃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때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주님 만나주시옵소서’하는 사람은 관념적 신앙의 사실상 주와 상관 없는 종교인입니다. 그 종교인을 하나님이 만나 주실 리 만무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초대교회의 첫 번째 기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하나님은 복음의 본질,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이를 통해 가르치시고 교회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 본질을 다 버리고 세상의 가치를 좇아 다시 앉은뱅이가 되어 세상적인 것을 하나님께 구걸하는 불쌍한 자들, 종교인들이 된 것입니다.
빨리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죽어야 합니다.
다 같은 말씀입니다. 즉 주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시고 명하신 새 계명 적 삶. 곧 중심으로써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증거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애. 육체의 남은 날 동안 이 같은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는 믿음이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