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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성령이 맺게 하시는 열매들1- 사랑의 열매
여러분들은 에스겔서와 요한복음을 통해서 성령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물론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면서도 세분으로 역사하시고, 또 세분이시면서 한분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 성령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따르는 자들에게 임하셔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행하시며, 또 성령받은 여러분들을 통해 세상을 살려내며, 새롭게 하고, 또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은 포도나무고 여러분은 모두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는 가지로부터 떨어져도 살수 있지만 가지는 나무로부터 떨어지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농부이신 하나님은 가지들 가운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제하여 버리고 열매를 맺는 가지가 더 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님께 꽉 붙어있어야 하며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성령의 열매가 바로 예수님의 선하신 성품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은 곧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은 예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그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에 대하여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우리 먼저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오늘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첫 번째인 사랑의 열매에 대하여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데는 몇 가지 방향성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흘러가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향하여 사랑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향성은 자기 자신을 향한 방향성입니다. 이런 사랑을 사람들은 자기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자기 사랑이 강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만족시키는 다른 사람의 수고와 헌신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자기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에 대하여는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요?”하며 인색해 합니다. 자기가 누군가로부터 대접을 받는 것이 좋다면 자기의 헌신과 수고가 다른 사람들 역시 좋게 느낄 것이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도 똑같습니다. 이렇게 자기 중심적인 사랑을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인 사랑의 열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기를 사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보다 더 자기를 사랑하거나 주녑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 사랑하는 것은 셩령의 열매로 맺는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두 번째로 사랑의 방향성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방향성입니다. 이것을 이웃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웃 사랑을 주고 받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받았다면 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마을 공동체나 어떤 조직들이 이루어집니다. 기업도 이러한 주고 받는 원리에 의해 세워지고 운영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거의 모든 공동체들이 크고 작은 이윤을 추구하면서 연합합니다. 그런 연합 속에 서로 용납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고, 격려하고 권면하며 응원하기도 합니다. 서로 맞지 않는 것을 맞춰갑니다. 물론 때로는 신랄한 비판과 질책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맡은바에 대한 책임추궁을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받는 만큼의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아시안컵 축구 경기가 우리 나라와는 지구 반대쪽에 있는 카타르에서 열리는 바람에 경기를 밤 0시에 하거나 0시 30분에 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응원한다고 밤을 세운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승을 기대하던 우리 나라가 요르단에게 2:0으로 졌습니다. 그런데 축구 경기를 보던 사람들 가운데 몇 몇 사람이 우리 나라 대표팀을 이끌던 클린스만 감독이 경기에 지고나서 웃었다고 해서 네티즌들이 댓글로 분노를 쏟아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웃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사람들이 덩달아 클린스만 감독에게 분노를 퍼부으면서 경질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클린스만 감독 자신은 결과에 승복한 후의 웃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했기에 나오는 웃음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우리 나라와 경기를 했던 다른 나라 감독들도 보면 경기를 지고 나서 웃으면서 상대팀 감독에게 찾아가 축하해주는 모습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 외의 그 어떤 라들도 감독이 웃는 것에 대하여 문제시 하거나 질책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 감독을 우리 나라에 데려다 놓고 그에게 우리 나라를 향한 애국심까지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이웃 나라인 일본은 자국 감독을 세워 최선을 다해 싸우고도 졌지만 일본 국민들에 의해 엄청나게 욕을 먹지 않습니까? 그는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경기에 지고 나서 웃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욕을 먹었는데 우리 나라의 팀을 이끄는 다른 나라 사람의 감독이 경기에 승복하는 웃음을 띤 것을 가지고 책임전가를 하면서 분노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는 돈을 받고 감독직을 수락했고 경기에 최선을 다했지만 이긴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진 것 역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아번 아시안컵을 보면서 느낀 것은 돈을 주고 우승시키라고 고용했는데 경기에 졌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의 역적처럼 대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이것은 나라 사랑이나 애국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는 거리가 한 참 먼 종류의 자기 사랑의 발로일 뿐입니다. 자기 사랑의 확대성이 바로 민족 사랑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 감독을 청빙해 놓고 사랑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뿐입니다. 그는 자기가 돈을 받는 만큼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또한 오늘날 젊은 사람들은 사회성보다는 핸드폰에 집중하는 현상을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서로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거나 깨지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서로가 어우러지는 창조적인 놀이나 관계를 갖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서로 맞춰가는 것에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심지어는 집에서조차 핸드폰에 인터넷을 하면서 가족과의 화목한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연합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이루어질지라도 그 관계가 금방 깨지기가 쉽습니다. 자유롭게는 자라기는 하지만 책임성을 배우지는 않는 세대가 바로 지금의 세대입니다. 서로 자기 이익에 의해 주고 받는 종류의 사랑 역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열매가 아닙니다.
세 번째는 자연만물을 향한 방향성입니다. 이것은 동물, 식물등의 자연 만물들을 다 포함합니다. 오늘날 반려 동물들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랑과 지나친 사랑은 다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떤 식물들에 대한 지나친 사랑은 자기 마음 속에서 우상화가 되어간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예를 들어 개나 고양이나 파충류를 대할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서의 소중함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사랑하면 자기의 마음을 그 피조물에게 마음의 대부분을 빼앗기게 됩니다. 지나친 애착은 거기에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이 들어서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동물이나 식물에 대한 과도한 애착 역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열매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애완동물의 가치를 넘어 그것들을 우상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방향성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방향성은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첫째로는 종교적인 방향성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신이라고 믿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일방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왜 일방적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대부분 사람들이 믿는 신이 사실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 윗대의 조상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만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신은 참된 신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원과 헌신을 그 신에게 표출하면서 복을 구합니다.
이런 종류의 종교성은 진리에 이르지 못하며 영생에 이르지도 못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이 아무리 열렬히 그 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미혹받은 사랑을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이단들이 나타나 잘못된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왜곡시키면서 사람들을 그들의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면 미혹을 받은 그들은 정신없이 빠져들어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그들의 결과는 멸망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진리에 서있지 못한 사랑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그들이 믿는 죽은 신이 멸망당하는 그들을 멸망당하지 않도록 지켜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 전에 매여있는 것 때문에 멸망을 당합니다.
둘째로는 신앙적인 방향성입니다. 신앙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찾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바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찾으시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인간의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신앙은 바른 방향성을 갖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예배에 참석도 하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시험에 빠져 교회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나는 목사 때문에 혹은 장로 때문에, 권사 때문에, 아니면 누구 때문에 교회 안 다니기로 했어”하면서 그 사람의 팡계를 댈지라도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은 아무리 주변 환경이 악하고 큰 방해를 받아도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고백하면서 그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끊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살아계셔서 친히 자신의 사랑을 증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누구로 인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끊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일차적으로 갖게됩니다. 그 사랑의 관계는 그 누구도 깰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관계성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람은 얼마 안다니다가 어떤 핑계를 대든지 간에 다니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 열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그들의 신앙생활의 기초를 자기의 열심에 두거나 아니면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합니다. 신앙은 있지만 진리의 말씀을 바탕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에 해당하는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성도나 이웃과의 관계가 결여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하는 온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렇듯 성령으로 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서나, 자연만물에 대해서나 하나님에 대해서까지도 성령의 열매에 해당하지 않는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랑이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랑에 의해 이 세상은 유지되고 계속적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런 사랑만으로는 영생에 이르지 못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진리에 기초하고 있으며, 영생을 얻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라며, 향기를 내는 아름다움의 결정체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성도들만이 맺을 수 있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인 안에 임했을 때에야 일어나는 사랑의 불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의 많은 교인들이 추구하는 성령의 은사와는 다른 인격적인 열매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가지는 서로 다른 양상을 띠지만 사랑으로 엮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는 아홉가지이면서도 한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는 여러분의 신앙이며 인격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특별하고 탁월한 사랑의 결실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대상들에게 표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된다고 말씀하까요? 진실한 사랑은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어떻게 표현될까요? 이것을 잘 설명한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입니다. 4-7절을 보면 열매로 나타나는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런 열매를 맺는 사랑은 다 함이 없이 계속되어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여러분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 사랑의 생명수는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자신의 몸을 성전으로 드린 그리스도인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땅 속에서 뜨겁게 끓고 있던 마그마가 산봉우리의 막힌 흙들을 뚫고 지표면 밖으로 터져나와 흐르듯이 그렇게 흘러넘칩니다. 분출된 마그마는 모든 것을 태우고 생명을 죽이지만, 하나님의 성전된 여러분의 몸에서 나오는 생수는 주변 사람들을 살립니다. 여러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이 사랑을 가지고 행한다 할지라도 때로는 실망하고 지칠 때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여러분들이 육체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지니셨어도 그 사랑이 고갈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시면서도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실 수 있으셨고, 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드릴 수가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불완전한 육체에 담았기 때문에 끝없는 근심과 갈등과 번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는 비결을 찾아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그것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것을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꼐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행한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자기 임의로 나온 것이면 그 사랑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노력에 불과했을 것이고 계속적으로 좌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로 바울은 자신 안에 가진 사랑이나 자랑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왔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랑 거리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랑거리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두고 하는 자랑거리였습니다.
실상 표면적으로나 행하는 것을 보면 고린도교회는 누군가에게 자랑스러운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라고 일컬음을 받는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어린 아이들처럼 어디로 뛸지 알수없을 정도로 문제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자랑거리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4장 16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바로 이것이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그 사랑을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 빛인 이유가 그 밝음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듯이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숨길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집이나 교회에서 충만하게 나타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인 여러분 안에 충만히 임하게 될 때 여러분에게서 표현되는 모든 사랑은 자연스러운 삶이 됩니다. 그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도 나타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서도 나타나고 자연만물을 사랑하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가장 큰 사랑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하여 나타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말입니다. 이 사랑을 날마다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라가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날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십니까? 특히나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리고 그날 주신 말씀이 사랑으로 행하는 여러분들의 신앙고백이 되십니까? 그것을 통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열매 다음에 희락이라는 열매가 따라 오고 화평이라는 열매가 따라오며 다른 열매들 역시 따로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쁨과 즐거움의 원인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변함없이 좋은 이유가 바로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이 사랑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육체가 온전한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때때로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지를 고민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걸림없이 계속적으로 표현하려면 자신이 날마다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죽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밖으로 표출될 수가 있습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영원한 생명수가 터져나와 큰 강이 됨으로 강주변이 풍요로워지고 강 안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살게 되며, 바다까지도 살아났듯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터져나오는 생명의 강물인 성령의 역사는 여러분들의 자존심과 편견과 오만과 교만, 그리고 우월감과 낮은 자존감으로부터 오는 수많은 죄의 요소들을 죽이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을 드러내기에 가능하게 합니다. 그 사랑이 열매를 맺어서 사람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나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교인들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은커녕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도 못미치는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 세상 사람들로 하며금 눈살을 찌뿌리게 합니다. 그래서 맛을 잃은 소금이 사람들에게 짖밟히듯이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어떠십니까? 여러분 안에서 성령의 생수가 날마다 흘러 넘치고 있습니까? 그 생수가 나와야할 샘이 고갈되어 마르지는 않았습니까? 어떻게 하면 말라있는 그 생명샘이 다시 터져 나오게 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터득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계속 배워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경과 교회를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육체 안에 있는 자존심들, 교만한 마음들, 이기심들, 뭔가 계산하여 얻으려는 유익들, 자기의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박수를 받고자 하는 마음들 등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 안에서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어둡고 습한 곳에서 잘 자라던 곰팡이와 세균들이 밝고 강한 햇빛과 햇볕으로 인해 타죽듯이 여러분들의 육체 안에 있는 자존심과 교만한 마음들, 그리고 이기적인 마음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 안에서 타죽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음성을 날마나, 특히나 아침마다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들은 말씀대로 믿으라고 하시면 믿고, 회개하라고 하시면 회개하고, 순종하라고 하시면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조금씩 스며나오던 물이 콸콸콸 솟구쳐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물이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을 내어드린 제단을 돌아 죄악 세상으로 흘러들어가 죽은 세상을 살리는데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로마서 12장 1-2절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과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제사에는 죽여서 드리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인류 구원을 위한 산 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죽음과 산제물이 같은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죽음없이는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죽음 없이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 죄악을 즐기고 죄가 죄인지도 모르는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 영원한 주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 앞에 산제물로 내어드리고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완전한 사랑을 구합니다. 그리고 완전치 못한 모습을 보면 신랄하게 비판을 합니다. 자기들은 그 사랑조차 갖지 않고 있으면서 마치 축구 실력도 없는 사람이 국가대표로 뛰고 있는 축구선수가 실수한번 했다고, 또는 경기에 졌다고 칭찬하다 말고 순긱간에 마음이 바뀌어서 비판으로 바뀌는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알고 그 사랑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전혀 사랑이 없어”하고 질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는 걸. 자 이제 다시 도번해보자”하고 힘과 용기와 위로를 주시면서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되고 성령이 충만한 성도는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4장 16절을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넘어진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도 역시 비판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며 권고하고 손을 잡아 주면서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누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완전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 안에 임하여 새 생명을 주시고 그 새 생명 위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은혜와 진리의 생수가 계속해서 끝없이 솟구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사랑을 가지고 누구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맺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매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의 열매가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하시는 그런 사랑을 하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구하십시오 예수님 외에는 그런 넘치며 계속되는 사랑을 주실 분은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열매가 여러분들의 삶에서 풍성히 맺혀지도록 성령충만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충만한 사랑으로 채우십시오, 날마나 주님과 더불어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십시오. 이른 아침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 그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 사랑을 알고 행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며 한량없는 자신의 사랑으로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들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로인해 여러분들의 사랑을 받는 주변의 사람들의 눈에 생기가 돌고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족들에게서, 이웃들에게서, 친구들에게서, 앞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나오는 성령에 의해 살아나 웃음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맺는 삶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9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그렇게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고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 인해 그 사랑을 품고, 그 사랑을 행하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세상이 알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로인해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나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들 모두에게 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